'대한청소년개척단'을 조직한 박정희 정권은 부랑자, 고아들을 충남 서산에 가뒀습니다. 바다를 막아 땅을 일구게 했습니다. 이들과의 강제 결혼을 위해 부녀자도 끌려왔습니다. 보상 대신 그들 앞에 놓인 것은 20년 상환으로 갚아야 할 빚 뿐. 대부업자는 국가입니다 [편집자말] |
"삑! 삐익! 개처럼 짖어!" 구호반장의 호루라기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는 개척단원들. 사방으로 혼비백산하다 구호반의 몽둥이질에 픽픽 차례로 쓰러진다. 쿵, 쾅, 쿵 이어지는 군홧발 소리에 누더기 차림의 단원들은 배를 움켜쥔 채 흐느끼고, 구타와 폭력의 효과음을 대신한 북소리는 계속해서 둥, 둥, 둥-
"너희같이 위험한 새끼들 교화시키느라고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다 같이 외친다! 어머니 사랑, 정신, 보신탕!"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단원들, 씩씩 거리며 서있는 구호반원들 위로 무대 조명은 서서히 페이드아웃. 잠시 후 다시 무대 가운데로 환하게 조명이 켜지고, 한 개척단원이 대답 없는 동료의 두 다리를 질질 끌며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여기서 노역하다 죽어나간 사람이 어디 한둘이야?" (극중 대사들)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 모니터를 응시하던 성재용(74)씨는 어느새 화면을 등지고 돌아앉아 고개를 떨궜다. 숨죽이며 극을 보던 정영철(76)씨의 눈가도 벌겋게 부어 올라있었다. 정화자(75)씨는 그 작은 손으로 연신 가슴을 문질러댔다.
지난 4일, 충남 서산시 인지면 모월3리 마을회관 안방에서 연극 <언덕을 오르는 마삼식을 누가 죽였나>(김연재 작·정승현 연출)의 녹화본이 상영됐다. 연극은 56년 전 이 지역에서 자행된 대한청소년개척단(서산 개척단)을 소재로 만들어졌다.
서산을 찾은 연극
이날 오후 2시께. 연극을 보러 오란 소식에 서산 개척단 출신 정영철·성재용·정화자씨를 비롯한 이 지역 마을 주민 19명이 회관에 모였다. 연극은 11월 3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됐지만 개척단 출신 어르신들은 감히 서울까지 올라갈 엄두도 못 냈던 터였다. 한창 막바지로 접어든 농사일과 그로 인해 치른 갖가지 병치레 탓이었다. 아직도 직접 일군 땅을 쉬이 떠나지 못하는 이들.
"우리에게도 자유가 있었다면..."계속되는 구타 장면에서 애꿎은 발가락만 꾹꾹 꼬집던 정영철씨는 "땅 하나 받겠다고 이제껏 버텼어!"하는 극중 인물의 절규를 보면서 끝내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21살에 서산 개척단에 끌려와 모진 강제 노역 끝에 받은 땅 1정보(3천평)를 국가에 다시 빼앗긴 그. 50년간 폐염전 부지를 손수 개간해 옥토로 만들었건만 국가로부터 그 땅을 되사야 했던 그였다.
열여덟 나이에 고아원에서 서산 개척단으로 온 성재용씨는 무릎에 턱을 괸 채 여전히 덤덤한 투로 연극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도 "사람답게 좀 살자!"는 주인공의 외침을 들으면서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얼굴을 뒤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정화자씨는 "보면서 자꾸 예전 생각나니까 또 목이 맥히고 마음이 아프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다니던 봉제공장에서 꾀임에 넘어가 서산 개척단으로 온 뒤 강제 결혼까지 해야 했던 정씨는 먹다 만 귤을 내려놓고 연극에만 집중했다.
"저 연극 정도만 됐으면 호강이지"
그렇게 1시간 50여분. 연극이 끝난 뒤 이들은 "만드느라 애썼겠어", "잘 봤다"면서도 "뭔가 좀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연극에 묘사된 것보다 실제 개척단 생활이 훨씬 참혹했다는 설명이었다. 50년 넘게 뭉쳐온 그들의 응어리가 두 시간 남짓한 연극으로 다 풀어질 리 없었다.
정화자씨는 "한낮에 쩌그 저 도비산에서 곡괭이 이만한 걸 하나씩 들고선 돌을 지고 왔다 갔다 한다든지, 이런 것들이 좀 더 자세히 나와야 하는디... 우리 동네는 돌들도 그냥 예사 돌이 하나도 없대니께"라며 "저 연극에 나온 정도만 됐으면 호강이지"라고 혀를 찼다.
성재용씨도 "아이고 우리가 겪은 거에 비해선 내용이 한참 약하지요. 맨손으로, 삽으로 집터 닦고 논 갈은 거 생각하면 노역이고 뭐고 실지로는 훨씬 심했지요"라면서 끄덕였고, 정영철씨는 "연극에서 배고픈 얘기가 너무 안 나왔어. 위에서 지들끼리 다 해쳐먹었지 우리들까지 내려오는 게 없었다니까, 얼마나 배고팠는디"라고 치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정영철씨는 이런 시도를 통해 서산의 억울함이 알려질 수 있어 고맙다고 했다. 그는 "어째든 이렇게 연극도 만들어지고 하는 게 참 우리로선 감사한 일이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고 그래야 허니께"라면서 "(이조훈 감독의)이번 다큐멘터리 영화도 아마 잘 나올 거야"라고 기대했다.
<박정희판 '군함도' 모월리의 진실> 연재, 그 후
<오마이뉴스>의 연이은 <박정희판 '군함도' 모월리의 진실> 보도 후 첫 방문이어서인지 기사에 대한 후일담도 들려왔다.
정영철씨는 "인터넷이 무섭긴 무서운가벼. 연락 안 오던 후배녀석한테 전화가 왔는데, '아이고 형님 평생 한으로만 있던 건데 잘 터뜨렸다'고 하더라고"라며 "나는 인터넷은 잘 모르지만서도 조금씩 이렇게 (서산 개척단 이야기가)퍼져야지"라고 했다.
과묵한 성재용씨를 대신해선 그의 부인 유선심씨가 후기를 들려줬다. 유씨는 "우리 며느리가 바깥양반 인터뷰 기사를 처음 보고는 아들, 딸들한테 알려줬더라고요. 사위한테서도 따로 전화가 왔는데, 그동안 그렇게 고생하셨는지 몰랐다고..."라며 웃어 보였다. 옆에 있던 성씨는 기사를 본 자식들이 눈물을 흘렸단 얘기를 전하면서 또 한번 조용히 울음을 삼켰다. 그는 이번에도 "고마워요, 여러 분들이 애쓰시고..."라고만 짧게 말했다.
정화자씨는 좀 더 복잡한 마음이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알려지는 게 한편으론 싫기도 해. 아직 얼굴 나오는 것도 꺼려지고... 그치만 우리들 당한 걸 생각하면 이걸 세상에 널리 알려야 하는 거니깐 나도 이렇게 하는겨."추우니까 자꾸 집안으로 들어오라던 그는 "영화든, 기사든, 우리들 맺힌 걸 어떻게든 국가가 풀어줄 수 있도록 하려는 거 아니겠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모월리의 시간
어느덧 저녁 어스름. 취재를 마무리하고 서울로 올라가려던 차에 회관에서 나오던 정영철씨와 인사를 나눴다. 불과 3개월만이었지만 가까이서 본 그의 얼굴은 지난번보다 수척했다.
"하여튼 관심 가져주고 우린 고맙지. 또 잘 지내고 있으라고. 나? 나는 그동안에 마이 아팠어. 아파가지고 연극도 보러 못 가고. 이번 겨울엔 이상하게 머리가 하도 지끈지끈 아프길래 병원에 갔더니 귀가 안 들려서 그렇다네. 참말로 늙으니까 원... 그래서 여기 보청기도 새로 꼈다니께. 그때 내려왔을 때만 혀도 안 그랬었잖여."말끔했던 턱 주변에도 다듬지 않은 흰 수염이 삐죽삐죽 살을 찌르고 있었다. 주름도 안으로 더 깊숙이 패인 듯 보였다. 처음 개척단원들을 소개하며 "다 죽어서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우리라도 빨리 빨리 나서야지"라던 그의 말이 동시에 머리를 스쳤다.
모월리의 시간은 조금 더 빨리 가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