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2015년 6월 14일부터 23일까지 일본 순회강연을 마치고 6월 24일부터 7월 9일까지 북녘의 수양딸을 찾아 북한을 여행했습니다. 또 2015년 10월 초에도 북한을 한 번 더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통해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하려 합니다. - 기자 말울적한 신의주의 아침
2015년 10월 20일, 아침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한 뒤 신의주의 아침 거리를 보기 위해 여관 주차장에 나온다. 확실히 남한의 이맘때보다 기온이 낮다. 어젯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몹씨 쌀쌀했는데 아침까지 찬 기운이 남아있다. 신의주가 국경 도시임을 알려주는 듯 압록강려관의 주차장엔 중국 번호판이 달린 차량들도 눈에 띈다.
거리엔 출근길 자전거의 행렬이 이어진다. 저들 중에 평소 교분을 나누는 한 재미동포의 친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아려온다. 그 재미동포의 부모님 고향이 바로 신의주다. 아직도 신의주에는 고모님을 비롯한 친척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소식을 전해 들은 모양이다.
내가 북한여행을 준비하면서 "혹시 원하면 고모님을 만나 소식이라도 전해 드릴까" 물으니 정색을 하면서 절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없단다. 대답하는 그의 얼굴엔 거의 공포에 가까운 표정까지 엿보였다. 나 같으면 긴 편지와 함께 가방 한가득 선물을 준비해 염치불구하고 부탁했을 텐데. 충분히 이해는 하지만, 가슴을 에는 고통이 나를 한동안 괴롭혔다.
하기야 이보다 더한 이야기도 들었다. 북한에서 살다가 해방 후 월남한 한 재미동포가 북녘에 두고 온, 당시의 어린 아들을 그리며 그의 생존여부를 알아봤다. 그 아들은 결혼해 아들 딸을 낳고 평양에 살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준 분이 아들과 손주들을 만나러 북한에 가고 싶으면 주선을 해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내가 언제 간다고 했느냐"라는 말과 함께 버럭 화를 내며 다시는 연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그는 끝내 북녘의 자식과 손주를 보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이야기다.
조국의 분단은 이렇듯 우리의 인간성마저 철저히 파괴했다. 아니면 우리가 인간성을 잃도록 강요당했거나. 아마도 그 노인은 피눈물을 흘리시며 눈을 감았을 것이다.
압록강철교 위에서
신의주 해외동포위원회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중국으로 가는 다리로 향한다. 그곳에서 중국을 가장 가까이 바라볼 수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압록강철교'라고 배운 적이 있는 그 다리로 가는가 보다.
다리의 입구에 도착해 보니 내가 '압록강철교'로 알고 있던 다리는 끊긴 채로 '조중친선다리'라고 불리는 철교 왼쪽에 놓여 있다. 옛 다리의 북측 부분은 모두 파괴돼 기둥만 남았다. 반면 중국 측 부분은 철교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 채 강 한가운데까지 뻗어있다. 아마도 그 부분은 한반도 소유가 아닌, 중국의 주권이 미치는 곳이라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폭격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조중친선다리'는 전쟁이 끝난 뒤 새로 건설된 다리일 것이다. 다리의 한쪽은 철로이고, 다른 한쪽은 자동차도로다. 다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데 경비소 같은 건물에서 제복을 입은 사람이 다가온다. 내가 멈칫하며 먼저 말을 꺼냈다.
"여기서 사진을 찍으면 안되는 건지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일하시는데….""아닙니다. 일없습니다. 사진 찍어도 됩니다. 외국 사람 같이 보여서 와 봤습니다. 우리 조선 사람이네요."이때 경미가 다가와 설명을 한다.
"재미동포분들입니다. 신의주 관광을 하는 중인데 조국땅에서 중국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을 가시고 싶다해 모시고 왔습니다.""아, 기렇습니까. 기럼 다리 가운데까지 가보십시다. 거게 가면 중앙선이 있는데 말하자면 거게까지가 조국땅입니다. 선을 넘으면 불법 월경이 되니 그 전에서 돌아서면 됩니다. 갑시다. 내가 안내하갔습니다."나를 보며 앞장 서라고 한다.
가다 말고 뒤돌아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는 다시 중앙선이 있다는 곳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파괴된 옛 압록강철교의 잔해가 아주 가까이서 보인다. 상처 난 기둥이 흉물스럽게 서 있다.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우리의 독립투사가 일본 경찰의 매서운 눈초리를 피해가며 저 철교 위 달리는 열차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가는 장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 순국선열들이 저 다리를 오갔을까. 그분들을 생각하니 숙연해진다.
파괴된 압록강철교. 영원히 그대로 보존했으면 좋겠다. 전쟁의 상흔을 바라보며 다시는 조국 한반도에서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기기 위해.
다리 위 도로 표면이 많이 낡았다. 바퀴가 지나가는 부분이 닳고 닳아 바퀴가 닿지 않는 부분보다 눈에 띄게 낮아 보인다. 아스팔트를 다시 깔아야겠다. 철교 중앙을 표시하는 붉은색 표지물에 다다른다. 그 표지물을 지나서 부터는 중국 단동시다.
철교 위에 부는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서서 중국의 단동과 북한의 신의주를 번갈아 바라본다. 단동시가 더 현대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기는 하나 내 눈에 두 도시는 서로 다른 나라의 도시들이 아닌 한 나라, 한 도시처럼 비친다. 마치 '한강다리 건너 서울의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걸어갔다 온 기분'이다.
한반도 북서쪽 끝다리를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에는 중국 관광객들을 싣고 온 버스들이 세워져 있다. 신의주 1일 관광 상품이 있어서 많은 중국인 단체관광객들이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온단다. 시내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북한 음식을 즐기는데 가격이 저렴해 인기가 많다고 한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 2시간 반 정도 여유가 있다. 경미가 식사를 하고 떠날 건지 묻자 남편은 "열차 식당에서 오징어젓을 한 번 더 먹어야 한다"면서 대신 시내를 돌아보자고 제안한다.
신의주는 깨끗하고 정돈이 잘 돼 있다.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이곳 동포들의 말에 의하면 '고난의 행군' 때도 신의주 사정은 다른 곳에 비해 좋았다고 한다. 아마도 중국과 붙어있어 물자의 이동이 수월했기 때문이 아닌가 헤아려 본다.
조국 한반도의 북서쪽 끝 신의주. 다리를 건너면 중국 단동시가 마치 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한 도시처럼 보인다. 압록강은 '서조선만'으로 흘러들어 중국의 발해만과 맞닿는다. 발해만의 '발해'는 어느 나라던가! 옛 조상들의 터전을 머릿속에 그려보면서 아무런 절차 없이 압록강철교를 지나 강 건너 동네로 놀러가는, 당분간은 불가능한 상상을 하며 피식 웃는다.
사랑하는 북녘의 동포들
신의주역 개찰구를 지나 플랫폼에 들어선다. 우리를 안내한 신의주 해외동포위원회 직원이 함께 들어와 작별을 한다. 잠시 만나더라도 헤어질 때는 눈물을 보이는, 정 많고 마음 여린 북녘동포들. 해외동포위원회 직원은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창 안의 우리를 들여다 보며 손을 흔들고 눈물을 글썽인다. 이렇듯 정 많고 마음 따스한 북녘의 동포들을 나는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들의 동포애에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2011년 10월, 첫 북한여행 당시가 기억난다. 평양 모란봉공원에서, '어디서 왔느냐'는 북녘동포들의 물음에 '남한에서 태어나 미국서 살고 있다'는 대답을 하면서 난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그런 내게 옷소매를 끌어 당기며 맥주를 권하고 안주를 입에 넣어준 북녘동포들! 그들을 새삼 떠올리며 신의주를 떠난다.
열차의 유리창에 손가락으로 "꼭 다시 올게요"라고 쓴다. 밖에서는 거꾸로 읽힐 텐데 금방 알아보고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눈물을 훔친다. 참았던 눈물이 와르르 솟구친다.
북한 열차에서 맛본 오징어젓
기차가 출발하자 남편이 어서 식당칸에 가지고 마구 조른다. 남편과 나는 밥과 반찬이 나오는 식사와 대동강맥주를 주문하고 경미는 즉석국수(라면)를 주문한다. 반찬과 맥주가 먼저 나왔다. 남편이 좋아하는 오징어젓이 한 접시 가득 나왔다. 남편은 맥주 한 모금을 마시곤 젓가락으로 그 짠 오징어젓을 한웅큼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는다. 채 한 접시 비우기도 전에 식당칸 승무원을 불러 큰 접시로 한 접시 더 달라면서 별도 주문을 한다.
밥과 국이 나왔다. 지난번에는 뭇국이었는데 이번에는 순두붓국이다. 두부가 모나지 않고 두리둥실 먹음직스럽게 담겨있다. 두부 한 쪽을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는다. 고소하다. 그냥 양념간장에 찍어 먹어도 아주 맛있을 것 같다.
경미의 라면은 중국제다. 국물을 한 모금 마셔봤더니 중국 특유의 향이 강해 비위에 거슬린다. 자연스레 우리의 라면이 떠올라 경미에게 물었다.
"혹시 남조선 라면을 먹어본 적 있니?""있습니다. 해외동포가 갖다줘서 먹어봤습니다.""어땠어?""역시 우리 입맛에 맞습니다. 그 전에 일본라면을 먹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상당히 맛있다고 생각했단 말입니다. 긴데 남조선 라면을 먹어보곤 역시 조선사람의 입맛은 다르구나, 북과 남이 한 민족인데 다를 수가 있겠는가 생각하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이번에는 경미가 남편을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젓갈을 정말 좋아하십니다. 미국에 40년 가까이 사셨으면 식성이 변하실 만도 한데…. 그동안 여러날 모시면서 식사 때마다 봤는데 다른 건 별로 손도 안대시고 고저 나물, 젓갈, 가재미식혜, 뭐 이런 건만 드신단 말입니다."그러더니 내게 고개를 돌려 묻는다.
"기런 것만 드시는데 미국서는 어케 구합니까?" "그저 웬만한 건 다 있어. 내가 살고 있는 남캘리포니아만 해도 수십만의 남조선 사람들이 살고있는 거 경미도 알잖아. 불법체류자까지 합하면 아마 100만은 될거야. 그러니 별 게 다 있지. 게다가 이북이 고향인 분들 그리고 그분들의 자손들도 꽤 되니까 이북음식도 쉽게 구할 수 있어."대화를 듣고 있던 남편이 끼어든다.
"경미야, 조선사람은 어딜 가도 조선사람이야."경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짓는다.
평안북도 정주 그리고 백석
열차가 평야를 달린다. 황해도에서나 볼 수 있는 넓은 논이 평안북도에서도 가끔씩 눈에 들어온다. 열차가 역에 정차한다. 평안북도 정주다. 나와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촌 형부의 고향이다. 이곳에 있는 오산학교를 다니다 월남한 후 미국으로 이민 와 의사로 활동하셨다. 지금은 은퇴해 여생을 보내고 있다. 바로 그 형부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정주는 시인 백석의 고향이기도 하다. 문학적 소양이 없는 내게는 그저 바람둥이의 술주정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의 고향이다.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燒酒)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에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1938. 3월 발표)정주의 동쪽에 산이 보인다. 바위로 뒤덮은 산 어디에도 백석이 나타샤를 흰당나귀에 태우고 갈 만큼 낭만적인 곳은 보이지 않는다. 백석이 얘기한 그 '마가리', 상상의 숲속 초가삼간인가.
백석은 전후에도 북한에서 작가로 활동을 계속했다고 한다. 주로 동화시집과 그림책을 출간했고 외국 아동문학을 번역하며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우리는 백석을 월북작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한때 그의 작품들은 금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월북작가가 아니다. 그는 정주에서 태어났으며 전쟁이 끝나자 그냥 고향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그는 북한의 시인도 남한의 시인도 아닌, 우리 나라의 시인이다.
아직도 정주에 있다는 오산학교는 우리의 근현대사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과 연결돼 있다. 이승훈, 조만식, 신채호, 이광수, 염상섭, 함석헌, 김소월, 홍명희 등 무수한 인사들이 오산학교와 관계가 있다. 평야를 끼고 있어 쌀이 풍부했을 이곳에서 민족 의식도, 종교도, 혁명도, 문학도 피어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보며 정주의 들녘을 차창으로 바라본다.
이번에는 열차를 타고 정주를 그냥 지나치지만 다음엔 꼭 정주에 들러 이곳 저곳 자세히 살펴보리라 다짐해본다.
평양에서의 마지막 밤
평양에 도착하니 어둠이 깔려있다. 우리를 태울 차량이 보이지 않는다. 역앞 주차장에서 두리번거리지만 많은 차량이 뒤섞여 있어 찾을 수 없다. 중국에서 열차를 타고 입국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맞는 버스들이 여기저기 주차돼 있어 시야를 가린다. 경미가 전화기를 들고 겨우 운전기사를 찾아내 호텔로 돌아온다.
짐을 풀고 남편과 저녁식사를 논의한다. 이제 미국으로 돌아가면 맛볼 수 없는 음식을 먹기로 결정한다. 명태회무침이 얹혀 있는 함경도 농마국수로 낙점했다.
먹음직스럽고 색깔도 잘 조화를 이룬 농마국수. 감자전분으로 만든 국수는 질기기가 마치 고무줄 같아 여간해선 끊어지지도 않는다. 가위를 좀 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북한에서는 국수를 절대 가위로 자르는 법이 없다. 국수발을 입에 줄줄 매단 채 으적으적 소리내며 씹는다. 북한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다.
안녕, 동포들!
10월 21일, 아침에 일어나 주섬주섬 가방을 챙긴다. 2주간의 긴 여행이었다. 듬뿍 정든 호텔방을 나선다. 내게 북한 만큼 떠나기 전 아쉬움이 크게 남는 나라는 없다. 물론 내 조국 한반도라는 생각 때문이겠지만 이곳은 또한 나의 수양가족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호텔을 나서니 안개가 자욱하다. 김일성광장 앞을 지난다. 지난 10월 10일 열병식을 위해 도로 위에 만들어 놓은 하얀 표시 자국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열병식 때 본 무시무시한 무기들의 잔영이 눈앞을 스친다.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육중함이 준 위압감도 머릿속에 맴돈다.
정든 거리들을 지나친다. 차가 개선문을 지난다. 개선문 바로 오른쪽에 둘째딸 설향이의 아파트가 있다. 특별히 이번 여행은 아기를 갖은 설향이에게 출산준비를 해주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러나 내게 더 의미있었던 일은 '브로커에 속아서 남한에 왔다'며 북송을 요구하는 김련희씨와 평양의 김련희씨 딸을 페이스북으로 연결시켜 준 일이었다. 김련희씨가 남한으로 간 후 처음으로 평양의 딸과 문자를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 역시 한국 입국 금지 조치로 인해 서울에 갈 수 없는 입장이라 그녀를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김련희씨에 비하면 내 상황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어서 빨리 김련희씨가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길 간절히 기원할 뿐이다.
경미와 작별인사를 나눈다. 동포의 정에 가족의 정이 더해진다. 나의 세 번째 평양의 딸이 됐지만 나이는 경미가 제일 위다. '설경이와 설향이를 잘 부탁한다' 말하고 작별인사를 한다. 경미는 눈물을 훔치며 "어서 들어가시라" 내 등을 떠민다. 출국수속을 마치고 고려항공에 오른다. 창밖을 내다보며 북한동포들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두손을 모아 기도한다.
평양을 떠난 북한 고려항공 비행기가 심양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인천을 거쳐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입국 금지 때문에 인천공항 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 그리운 어머니를 지척에 두고서 비행기만 갈아탔다.
2014년 차가운 겨울이었다. 북녘의 소식을 전하는 '통일 토크콘서트'를 '종북 콘서트'라 규정하며 청와대와 '반관제' 종편 언론이 기획·주도한 종북몰이. 민족의 화합과 조국의 평화적 통일이란 이렇듯 요원한 것일까. 쓰라린 가슴을 안고 모국의 국적기 대한항공에 오른다.
[오마이뉴스 독자 여러분 그리고 10만인클럽 회원 여러분께 드립니다]여러분들의 성원에 힘입어 2015년 8월 10일에 시작한 북한 기행문 연재 <수양딸 찾아 북한으로>를 32회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성원해 주신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앞으로 기회가 되는 대로 또 북녁의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