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던 시절, 이를 처음 세상에 알린 부분은 소설 <순이 삼촌>이란 문학작품이었다. 이후 이 땅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누구보다 앞서 제주4·3의 진상을 국민들에게 알리는 한편 미해결 과제에 대한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 왔다. 제주4·3 70주년을 맞아 '제주4·3과 문화예술'이라는 제목으로 문화예술의 각 장르별 제주4·3 작품들을 소개하는 장을 마련한다. -기자말
문학을 통한 4·3 드러내기제주 현대사 최대의 비극인 제주4·3은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배·보상을 위한 특별법 개정안도 국회에서 발의됐다. 하지만 아직 그 결과가 마무리된 것은 아니다. 잊을 만하면 일부 보수우익단체들이 4·3을 왜곡, 폄훼하는 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고 거기에 걸맞은 이름을 갖는 정명(正名) 작업 역시 향후 과제다.
지금은 모두가 공개적으로 4·3을 이야기하고, 매년 1만명 이상이 모이는 추념식도 진행된다. 하지만 불과 30여 년 전만 하더라도 4·3은 금기어였다. 아니, 4·3을 거론하고 드러내는 작업 자체가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던 암울한 시대가 40년 가까이 계속돼 왔던 것이다. 실제로 그 시기, 제주 사람들은 4·3이라는 말도 꺼내지도 못했다. 꼭 필요할 경우 "무자기축년 난리" 또는 "그 시국"이란 다른 말로 표현할 정도였다. 적어도, 87년 6월 항쟁까지는 그랬다.
이 암울한 시기 금기의 벽을 깨뜨리는 첫 시작이 현기영의 <순이삼촌>이다. 유신의 최고 정점 으로 향하던 1978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발표된 <순이삼촌>은 오랫동안 금기시했던 '4·3 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린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배경은 북촌리 주민 400여 명의 학살사건이다.
<순이삼촌>은 학살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환청과 신경쇠약에 시달리다가 결국은 자살하고 마는 순이 삼촌의 삶을 통해 4·3을 알리고 있다. 4·3 진상규명 과정에서 그 시작을 말할 때 <순이삼촌>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훗날 학계와 시민사회단체, 문화예술에서 4·3 활동에 나선 수많은 사람들이 <순이삼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내와 달리 일본은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찍부터 4·3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발표됐다. 김석범 대하소설 <화산도>가 대표적이다. 1948년 2월 말부터 이듬해인 1949년 6월 제주 빨치산들의 무장봉기가 완전히 진압될 때까지,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정국을 배경으로 야만적인 폭력을 넘어 인간의 존엄성, 평화의 소중함을 담고 있다.
김석범 작가는 <화산도>에 앞서 32세였던 1957년에 발표한 <간수 박서방(看守朴書房)>과 <까마귀의 죽음(鴉の死)>을 비롯해 <관덕정(觀德亭)>(1961), <만덕유령기담(万德幽靈奇譚)>(1970)에 이르기까지 제주4·3 사건을 소재로 한 작품을 꾸준히 발표했다. 1988년 다시 한국을 찾을 때까지, 김석범 작가는 정권의 회유와 압박으로 인해 수많은 괴로움과 좌절을 겪어야 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강정효씨는 제주4·3 7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집행위원장·제주 민예총 이사장입니다. 이 글은 제주4.3제70주년 범국민위원회에서 발행한 <4.370신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