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인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6일 사망했습니다. 어느 덧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주기를 맞아서 박래전 열사의 뜻과 시를 알리려고 합니다. 뒷전에 밀어두었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작은 추모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스토리 연재에는 박래군 소장(인권재단 사람)과 김응교 시인(문화평론가, 숙명여대 교수)이 같이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가 함께 합니다. 좋은기사원고료를 3만원 이상 후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박래전 열사를 알리는 책 <1988 박래전>을 드립니다. 주소를 남겨주세요. 7회 동안 연재되는 박래전 열사의 이야기와 그의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추모관에 적어두겠습니다. [편집자말] |
'아 덕수...'대통령의 입에서 동생 이름이 나왔다. 동생의 이름을 들었던 인권재단 사람의 박래군 소장은 마음이 이상했다. 울컥하고 울음이 날 것 같았다. 민주주의를 외치다 스러져간 사람들과 함께했던 박 소장 역시 유가족이었다. 그걸 새삼 느꼈다. 그리고 최덕수를 떠올렸다.
지난해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문재인 대통령은 1988년 당시 광주를 외치며 세상을 뒤로한 열사들의 이름을 불렀다.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그리고 박 소장의 동생 '박래전'이었다.
30년 만에 대통령의 입에서 민주주의로 불린 동생의 이름을 듣고 돌아서 생각난 건 덕수였다. 최덕수. 시간관계상 대통령의 기념사 최종 원고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분명 박래전의 죽음 앞에 최덕수가 있었다. 박래전은 최덕수가 끝내 부르짖은 외침, 광주를 기억했다. 그리고 최덕수의 선택을 따랐다. 박 소장이 최덕수의 이름이 불리지 못한 것을 두고 아쉬워하며 최덕수와 그의 어머니를 떠올린 이유다.
몸의 반이 타들어갔다
단국대 천안캠퍼스 법학과 87학번. 최덕수는 6월 항쟁의 한 가운데를 겪었다. 수많은 죽음으로 얼룩진 민주주의가 성큼 다가왔다고 믿고 싶었다. 현실은 달랐다. 변한 게 없었다. 노태우 정권은 광주의 진실을 바로 볼 생각이 없었다.
1980년, 광주의 항쟁, 광주의 외침, 광주의 죽음은 진실에 다가가지 못했다. 8년이 지났지만 여전했다. 그게 최덕수의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광주의 외침은 여전히 극소수 폭도들의 난동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예속적 독점재벌과 폭력적 살인 군부정권과 외세, 이것은 지난 80년 광주민중항쟁과 민주화 투쟁을 통해 확인된 한국 현대사의 큰 장애물이다. 역사는 이것이 바로 잡혀야 할 시기에 바로 잡혀야 하며, 그 시기를 놓치면 빗나간 역사는 보다 더 큰 희생과 재물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최덕수 열사의 광주민중항쟁 성명서 중에서)최덕수는 '빚고을 광주'가 피의 현장인 '핏 고을'로 남는 것에 분노했다. 진실에 다가설 기회를 더는 놓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바로잡지 않으면 변할 리 없다고 믿었다. 이다음은 더 큰 희생이 필요할 거라고 썼다. 최덕수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는 '광주항쟁 진상규명', '국조권(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권) 발동'을 외쳤다. 그리고는 단국대 시계탑 앞에서 제 몸에 불을 붙였다. 1988년 5월 18일이었다.
제 몸의 반이 타들어 갔다. 3도 화상. 피부의 표피층, 진피층, 피하조직까지 모두 손상을 입어 회색이나 검은색이 나타난다는 고통에서도 그는 계속 광주를 말했다. 그는 "광주항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정신없이 그를 태우고 순천향병원으로 가는 학우에게도 "광주를 잊지 말자"라고 말했다. 그의 몸은 곧 광주였다.
사흘 후인 21일, 최덕수는 겨우 쌀죽을 삼켰다. 그리고는 곡목을 알 수 없는 투쟁가를 중얼거렸다. 그는 곧 민주주의였다. 다시 닷새 후인 26일 오후 1시 30분. 그는 광주를 품고 세상을 등졌다.
최덕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학생들은 화염병을 집어 들었다. 인공호흡과 기도 수술 후에도 마지막 숨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들은 수백 명의 단국대 학생들이 병원 앞에 모였다. 오후 7시에는 교문 앞에 모여 투쟁을 시작했다. 1988년 5월 27일 자 <동아일보>는 이를 사진 한 장에 담아 보도했다. 제목은 '불벼락'
25일 오후 7시경 단국대생들의 교문 앞 시위 중에 학생들이 던진 화염병이 터지면서 길 가던 할머니의 옷에 불이 옮겨붙었으나 전경들이 달려가 곧바로 진화, 다행히 큰 화상은 입지 않았다. (1988년 5월 27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중)학생들이 왜 화염병을 들었는지, 무엇 때문에 단국대 교문 앞에 모였는지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최덕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학생들은 "당시 일로 상처를 입은 할머니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라면서도, "조선일보 1면과 동아일보 사회면에 할머니의 부상만을 다룬 사진만으로 진실을 호도했다"라며 항의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침묵했다.
2018년 5월의 답
최덕수의 장례는 민주국민장으로 치러졌다. 그가 마지막까지 외친 광주 망월동 민주민주열사 묘역에 안장됐다. 최덕수의 형 최재수씨는 동생의 죽음 앞에 '진정한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돼 내였다.
그는 당시 동생을 기리는 <네 여기 타는 불꽃되어>라는 제목의 글에서 '(민주주의가) 왜 나의 동생을 불러가야만 하느냐'라고 되물었다. '진정한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너보다 많은 세월을 생각하고 그 길을 살아온 사람도 많은데 왜 네가 먼저 가야만 하느냐?'라고 한탄했다. 그것이 무엇이기에 '왜 젊은이들이 이를 불러 외쳐야 하는지' 탄식했다.
가신님 망월의 한이 밝혀지는 날, 그날의 오월의 빛이 발하여 가신님들의 뜻이 성취되고 내 동생의 한도 풀어지는 날, 민주와 자유를 사랑하는 이들의 뜻이 성취되고, 가신님들도 구천에서 떠돌지 아니하고 민족의 횃불 되고, 민족의 반석 위에 디딤돌로 우리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쉴 그날을 위해 우리 모두 뭉치고 분발하여야 할 것입니다. (최재수씨의 '네 여기 타는 불꽃 되어' 중에서)그리고는 결국 '민주'와 '자유'의 뜻이 성취되길 바랐다. 오월의 피가 오월의 빛이 되기를 소망했다. 최덕수의 외침 이후 30년이 흘렀다. 광주와 민주주의를 몸으로 외친 스무 살의 최덕수 앞에 2018년의 5월은 어떤 답을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