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인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6일 사망했습니다. 어느 덧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주기를 맞아서 박래전 열사의 뜻과 시를 알리려고 합니다. 뒷전에 밀어두었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작은 추모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스토리 연재에는 박래군 소장(인권재단 사람)과 김응교 시인(문화평론가, 숙명여대 교수)이 같이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가 함께 합니다. 좋은기사원고료를 3만원 이상 후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박래전 열사를 알리는 책 <1988 박래전>을 드립니다. 주소를 남겨주세요. 7회 동안 연재되는 박래전 열사의 이야기와 그의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추모관에 적어두겠습니다. [편집자말] |
30년 전인 1988년 6월 2일은 제 동생 박래전의 스물다섯 번째 음력 생일이었습니다. 동생은 학교 앞 '길마재 신화'라는 주점으로 숭실대 동료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그 술집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동생은 별다른 내색 없이 술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술자리를 마치고 그는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글을 썼습니다. 그랬던 래전이가 이틀 뒤에 분신을 감행했으니 얼마나 충격이었겠습니까. 겨우 스물 갓 넘은 대학생들, 매일 인문대학생회실에 가면 볼 수 있던 선배의 분신은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충격으로 남아 있습니다.
지난 5월 31일, 래전이의 쉰다섯 번째 생일이었습니다. 고맙게도 아내가 동생의 생일을 기억해주었습니다. 세상에 없는 사람의 생일…아내와 두 딸은 생일 축가를 불렀지만 저는 부르지 못했습니다. 목이 메는 것도 있었지만 래전이에게는 유서를 쓴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30년입니다. 졸지에 유가족이 된 저는 이전의 글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유가족의 삶을 살았습니다. 의문사와 고문 문제로부터 국가폭력에 대한 문제를 짚고 국가권력의 부당한 인권침해에 맞서는 싸움의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죽음들을 많이도 만났습니다. 동생은 자신의 죽음이 마지막이길 바랐지만 동생이 떠난 88년에만도 그 뒤로 9명이 더 죽어갔습니다. 그해 열다섯 살 문송면은 서울 양평동 온도계 공장에서 일하다가 수은중독으로 죽었습니다. 그 소년을 보내던 날, 경찰이 장례행렬을 가로막아서 한참 동안 지열이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위에 앉아 있던 일도 기억납니다.
유가족 활동가로 산 30년
저는 동생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의 옆에 묻으면서 약속을 했습니다.
"네가 바라던 세상이 올 때까지 네 몫까지 싸울게." 그리고 그날이 올 때까지 절대 울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아버님이 약주 취하셔서 저를 보고 말씀하셨습니다.
"저 놈은 아주 독한 놈이야. 제 동생 죽었는데도 눈물 한 번 안 흘리잖아." 그랬습니다. 아버님의 그 말씀이 야속했지만, 약해져서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억지로 밀어 내리고는 했습니다.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순간이 오면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피해서 담배 한 대 피어물고는 하늘을 바라보고는 했습니다.
우리 나이 스물여덟 살 때부터 저는 끔찍한 죽음들을 보며 살았습니다. (사)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아래 유가협)의 사무국장을 5년 동안 했을 때 운동과 관련되어 누군가 죽거나 군대건, 경찰서이건 의문사한 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제게 연락이 왔습니다. 어찌나 많은 죽음들이 동생의 죽음 뒤에도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런 사건이 있으면 경찰이나 안기부(현 국정원), 군보다 빨리 손을 써야 합니다.
저들은 유가족들에게 접근해서 유서를 확보해서 공개 못하게 하거나, 가족장을 치르게 압박하고 회유해서 그런 죽음들이 갖는 정치적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합니다. 온갖 거짓 약속과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 거기에 평생 안정적인 취직자리까지 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서둘러 화장을 하면 끝입니다. 시신과 현장의 사진이라도 충실히 남겼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말입니다.
현장에서는 늘 긴장해야 합니다. 슬픔을 느낄 여유가 없습니다. 빨리 상황을 파악해야 하고, 냉정하게 그 죽음의 의미를 간파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그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의 인권현장은 이처럼 죽음이 있는 곳이거나 국가에 의해 폭력이 자행되는 곳이었습니다. 가급적 현장을 지키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던지며 외쳤던 그 정신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폭력이 있는 곳에서 그 폭력의 피해자들의 아파 우는, 때로는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는 목소리를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주 잡혀가고, 감옥도 여러 번 드나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동생의 몫까지 싸우겠다고 약속한 유가족 활동가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세월호 참사와 관련된 일에 매달리는 것도 그 연장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두 분 곁으로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올해로써 대학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 분 모시면서 고향에서 올바른 뜻을 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독히도 더러운 세상은 그 뜻마저도 이렇게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게 하였습니다. 왜지요? 사람들은 너무나 자기 안속만 차립니다. 기성세대들도 마찬가지고 청년학생들도 역시 그렇습니다. (박래전 열사 유서 중)
동생 유서의 한 대목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부모님 모시고 농사를 짓고 시를 쓰고 싶었던 만 스물다섯의 청년의 꿈을 포기하게 만든 그때의 현실만큼이나 지금의 현실도 엄중합니다. 비록 촛불항쟁의 끝에 새 정부가 들어서서 많은 부분 변화가 있다고는 하지만 안타까운 죽음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에 드러나는 죽음도 있지만 삶의 벼랑 끝에 몰려서 죽어가는 이들도 있고, 세월호 참사처럼 국가에 의해 구조받지 못하고 죽는 죽음들도 있습니다. 더는 아픈 죽음이 없는 세상을 만들자고 30년을 쉼 없이 달려왔지만 저는 아직 그런 세상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이 강고하기만 하는 각자도생 죽음의 구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지극히 당연한 정의가 헌신짝처럼 내던져지는 현실을 많이 바꾸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아직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못난 형입니다.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올해 제 동생 박래전 30주기를 맞아서 추모위원이 되어 주십사고 감히 부탁을 드렸습니다. 30년 동안 동생의 유품도 정리 못한 못난 형의 부탁을 거리낌 없이 들어주신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의 이름을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더라도 고마움을 표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먼저 30년을 한결같이 제 동생의 추모식을 이어와 준 숭실대의 기념사업회, 민주동문회 동문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말이 30년이지 까마득한 세월 동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추모행사를 이어온다는 건 기적입니다. 그런 동문들이 이번에 30주기를 맞아서 여러 가지 추모행사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추모식이면 달려와 주시는 유가협의 어머님, 아버님들이 계십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병중에 계셔서 안타깝습니다.
그리고 인권재단 사람의 이일영 이사장을 비롯한 이사님들과 활동가들, 회원 여러분께도 감사드립니다. 비록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전액 기부하였다고 하지만 전체적으로 공간이 모자람에도 불구하고 방 한 칸을 선뜻 추모관으로 쓰게 허락하였습니다. 그 작은 방에 아담한 추모관이 들어서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30년 전에 쓴 유서와 유품들, 그리고 그의 시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은 30년 전에 민중의 세상을 염원하며 저 세상으로 떠난 이의 슬프고도 진정한 마음을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30주기를 앞두고 책을 만드는데 도움을 주신 분들과 애를 써서 편집을 맡아준 아내와 딸들, 영화 <겨울꽃>을 만드느라 고생한 김재범 감독, 유품 복원과 정리를 선뜻 맡아주신 김겸, 우경아, 채정민 선생님, 추모관 공사를 깔끔하게 마무리해주신 장시각융합소의 홍장오 디렉터와 우지연 디자이너 등등 모두 고맙습니다.
이처럼 일일이 거론할 수 없는 많은 분들의 노고가 있었지만, 이 연재를 읽어주시고, 공유해주신 독자 여러분들이 있었기에 모든 일이 가능했습니다. 그리고 연재를 보시면서 마음을 모아주신 많은 추모위원님들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앞으로도 30년 전 동생이 남긴 유서를 되새기면서 그때의 마음을 초심으로 삼아 죽음의 구조를 깨고 생명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분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거듭 고맙습니다.
마지막으로 30년 전, 세상은 온통 88올림핌의 환상에 젖어 있을 때, 광주학살의 진실이 왜곡될 것을 경계했던 청년이 마지막 순간에 남긴 유서 한 대목은 이렇습니다.
우리들이 분열되었을 때 좋아하는 것은 이 땅을 지배하는 자들뿐일 것입니다. 사소한 감정이나 작은 논리의, 사상의 차이에 매몰되지 말고, 통일, 단결을 실제화시켜 내기 위한 작업에 즉각적으로 착수하십시오. (박래전 열사의 유서 중)
우리는 촛불항쟁의 승리에 취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주체가 아니라 구경꾼의 자리로 돌아가 있지는 않는지 늘 경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오만하지 않고 겸허하게, 멀리 보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려가는 고단한 삶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오늘의 삶, 우리가 누리는 이만큼의 자유와 민주주의조차도 누군가의 희생 위에서 가능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거듭 고마움의 인사를 드립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