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 문서를 불태우다 1253년 12월 충주산성.
동문 가파른 성벽 위에서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산 아래 충주는 몽골군이 장악했고, 산성에 오르는 길과 성벽에 접근할 수 있는 루트는 모두 몽골군이 포위했다. 가장 중요한 공격 지점이었던 동문 일대는 밤낮으로 몽골군이 지키며 공성 장비까지 동원하여 수시로 공격해왔다. 그들의 공격은 명성에 걸맞게 파괴적이고 끈질겼다.
더구나 그는 과거 그들의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한 전적이 있었고, 이를 몽골군도 알고 있었다. 몽골군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1219년 정복전을 시작한 지 8년 만에 러시아를 거쳐 유럽의 심장부까지 진격하고 아라비아 반도를 제외한 중동 전체를 장악한 데다 파미르 고원을 넘어 인도까지 나아간 그들이었다. 칭기즈 칸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아마 그들은 유럽을 손에 넣고 인도 내륙과 아프리카까지 갔을 것이다. 이런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엄청난 정복전에서도 총사령관을 잃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몽골군 입장에서는 과거 자신들의 총사령관을 죽인 지휘관이 이 성 안에 있었다. 그리고 그는 두 달 이상 그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래저래 싸움은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이제까지 성을 지켰던 것도 기적이라 할 만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성 안을 바라보았다. 성 안에는 방어군의 주축을 이룬 병사들과 남성 노비들로 구성된 노군이 있었다. 이미 그간의 전투 중에 죽거나 부상당한 이들도 수두룩했고, 살아 있는 이들도 사실상 살아 있는 것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그들의 몸을 할퀴었고, 그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몽골의 5차 침입 당시 충주산성은 총사령관 야굴이 이끄는 몽골군 주력과 대치하며 10월부터 두 달 이상 필사적으로 버티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식량은 거의 떨어졌고, 성 안의 주민들과 방어병들은 지쳤다. 이미 충주까지 내려오는 동안 남자 10세 이상은 모두 죽이고 여자는 포로로 잡아가는 대량 학살을 몇 번 씩 자행한 몽골군은 살기에 넘쳐 있었다.
이때 방호별감 김윤후는 주민과 병사들을 모아놓고 외쳤다.
"여러분! 이 성을 끝까지 지켜내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여러분 모두에게 관직을 내리겠습니다. 모두 믿으시오.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합니다!" 그리고는 병사와 주민들 앞에서 망설임 없이 관노비의 명부를 불태우고 몽골군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었다.
그의 조치에 힘을 얻은 방어군과 주민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몽골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냈다.
<고려사>에는 12월 18일 '충주에서 몽골군이 포위를 풀었다는 것을 급히 알렸다'는 기록이 있다. 70여일 간의 전투에서 충주를 함락하지 못한 몽골군은 침략을 중단하고 돌아갔다. 몽골군 총사령관 야굴은 충주성 공격의 실패로 경질되었고, 김윤후가 현장에서 한 약속은 고려 정부에 의해 지켜졌다.
김윤후는 몽골의 2차 침입 때는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여 몽골군이 철수하게 만들었고, 이번에는 총사령관을 경질시키며 몽골군을 철수하게 만들었다. 양쪽 다 몽골군 주력을 상대로 거둔 성과였다.
노비 문서를 불태우면서까지 노비와 주민들을 독려해야 하는 상황, 아마 성이 함락되기 직전, 절체절명의 위급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성과 주민들을 버리지 않고 싸웠던 김윤후는 진정한 리더요, 승부사였다.
충주산성 전투가 주는 의미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전투 중 한 장면이 충주에서 펼쳐졌다. 몽골군의 1차 침입 때 관료와 지휘관들이 다 도망가고 노비와 하층민들(역사 기록에는 노군과 잡류별초로 표현한다)만으로 성을 지켜냈던 충주는 5차 침입에서 다시 한 번 드라마를 만들었다.
1차 침입 당시 노비와 하층민들이 몽골군을 몰아낸 다음, 도망쳤다 돌아온 관료들은 자신들이 도망간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탄압을 가했다. 관청과 민가의 은그릇이 없어졌다고 트집을 잡고 그들을 도둑놈으로 몰아 처벌하고자 한 것이다. 갑질도 이런 갑질이 없다.
화가 난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키자 당황한 정부에서 나서서 사태를 진정시켰다. 문제는 그 뒤에 다시 노비들로 구성된 노군의 불만이 일어나자 정부군이 나서서 진압했다는 점이다. 이 과정에서 충주성을 지켰던 역전의 용사들은 상당수가 허무하게 정부군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에 비해 성을 버리고 도망간 관료와 장수들이 처벌됐다는 기록은 없다. 어이없는 일이었다.
충주 주민들은 20여 년 전 이런 배신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자기들을 지휘해야 할 사람들이 꽁무니를 뺀 상태에서 기껏 목숨 걸고 싸워 그 살벌한 몽골군을 물리쳤더니, 돌아와서 상은 주지 못할망정 자기들을 탄압하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몽골과 다시 싸우라고 정부가 보낸 지휘관은 이번에는 양심적이고 책임 있는 지휘관, 몽골의 2차 침입 때 적장 살리타를 사살한 전쟁 영웅, 김윤후(?~?, 생몰연대 미상)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꺼이 함께 싸웠다. 김윤후가 아니었다면 과연 충주 주민들이 싸우기라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니 최악의 배신을 당한 그들에게도 신뢰를 얻은 김윤후였기에 가능한 승리였다고 봐야겠다.
김윤후는 승려 출신으로 몽골의 2차 침입 때 지금의 용인 지역 처인성에서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몽골군 총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한 당대의 전쟁 영웅이었다. 객관적으로 불리한 전투의 전면에서 위험한 지휘를 하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던 면에서 보면 조선시대 이순신에 필적할 만한 인물이다.
몽골의 세계 정복사에서 전면에 선 정복군 사령관이 전투 중에 상대방 군사에게 사살당한 경우는 굉장히 드문 사례다. 실제로 용인 처인성에 가보면 이렇게 작은 성을 지켰을 병력이 어떻게 몽골 주력군을 상대로 사령관까지 죽일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다. 그저 기습과 저격의 성공이었다고 추측할 뿐이다. 어쨌든 이 인물이 충주산성 전투에서도 70여 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몽골군 주력을 물리쳤으니 절대 우연한 일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김윤후가 인정받아야 할 진정한 이유는 그의 태도이다. 살리타를 죽인 뒤 정부가 그에게 큰 상을 주려고 했을 때, 그는 자기가 살리타를 죽인 것이 아니라며 이를 거부하고 체면치레를 할 만한 작은 상만 받았다. 적장, 그것도 최고 사령관을 죽였다면 누가 죽였든 지휘관에게 큰 상이 돌아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군대 상벌 규정의 원칙이다.
역사에 남을 만한 성과를 거두고도 그는 자기의 공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공을 돌렸다. 말이 쉽지 실제 그러기는 어렵다. 이거 하나만으로도 그가 어떤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당대 고려의 민중들이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 알 만하다.
그래서 충주산성 전투의 승리는 김윤후가 아니었다면 이루어내지 못했을 승리라고 본다. 전투 현장이든 스포츠 경기의 현장이든, 지휘관의 용기와 능력, 책임감이 그를 따르는 병사와 선수들에게 신뢰를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승패에 큰 영향을 미친다.
충주산성 성벽을 거닐다 이제 역사는 짧은 기록으로만 남고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그저 그날의 상상이 가능한 충주산성으로 가보자.
충주시 남쪽을 병풍처럼 둘러친 남산(금봉산, 636m)은 남한강을 낀 교통의 요지 충주를 지키는 천연의 방벽 역할을 한 곳이다. 이 산 정상부를 빙 둘러싼 산성이 충주산성(일명 남산성)이며, 몽골 침입 당시 몽골군을 물리친 산성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충주성 전투의 현장이 대림산성이라는 견해가 있다. 대림산성은 충주에서 수안보로 가는 길에 위치한 산성이다. 한마디만 가볍게 덧붙이자면, 양쪽 산성을 비교해볼 때 대림산성은 몽골군이 집중 공격할 지점이 있지만, 충주산성의 경우 사면이 절벽에 가까워 대규모의 군대가 집결하고 집중 공격할 지점이 마땅치 않다. 충주산성 쪽이 장기 방어를 위한 버티기에 유리한 곳이다. 다시 말하자면 군사적 관점에서 당시 몽골군의 공성 능력은 말 그대로 상상 이상의 세계 최강인데, 대림산성의 지형과 지세 정도로는 70일간에 걸친 몽골군의 파상 공세를 막아낼 수 없다는 뜻이다.)
남산과 이웃한 계명산과의 사이에 마즈막재라는 고개가 있다. 충주산성을 가려면 일반적으로 이곳에서 2.2km의 산길을 걸어 올라간다. 오르는 길에 보이는 북쪽 편 충주 시가지의 모습과 동쪽 충주호와 산줄기들의 전망이 꽤 좋다. 비교적 평탄한 산길로 정상부에 오르면 척 보기에도 쉽게 공략당하지 않았을 산성의 위용이 나타난다.
충주산성은 둘레 1120m, 높이 약 6.5m의 돌로 쌓은 산성으로, 산 정상부에 테를 두르듯 쌓았다 하여 테뫼식 산성으로 분류한다. 규모는 그렇게 크지도, 작지도 않다. 복원한 부분까지 포함하여 성 전체를 걸어서 한 바퀴 돌 수 있다. 이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산성이 가파른 경사면을 따라 구불구불 뱀처럼 돌아나간 모양이 인상적이다. 기왓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잘 복원, 정비된 동문 쪽이다. 경사가 가파르기는 하지만, 임도에서 성벽이 잘 보이기도 하고 접근하기도 쉽다. 전투가 벌어지면 이쪽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을 법한 곳이다.
동문 안쪽에는 석축으로 둘러친 연못이 복원되어 있다. 연못은 식수에 필요한 물을 모아 놓는 집수지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급박한 전투에서는 적의 화공을 막기 위한 방어 수단으로도 활용된다. 성벽 가까이에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식수보다는 방어용일 가능성이 높은 듯하다.
또 동문 남쪽 벽에 수구(水口)가 있다. 성벽 바닥에서 약 60cm 올라온 지점에 원형대로 남아 있어 한번 들여다 볼 만하다.
5~6월에 천천히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곳곳에서 붓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보랏빛의 토종 꽃은 전국 어디에나 산에서 피어나지만, 특별히 이 산성의 붓꽃은 그 옛날 전투에서 죽은 젊은 그들의 넋이 아닌가 하는 감상이 일어난다.
성 안쪽에 남산 정상이 있다. 정상부 근처에 오랫 세월 비바람을 맞으며 버텨온 멋드러진 소나무들이 있고, 비교적 평탄한 부분과 숲이 있는데, 왠지 이곳에서 김윤후가 주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했음직한 상상이 든다.
남아 있는 흔적 속에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그 성에서 실제 적과 목숨 걸고 싸웠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극적인 스토리가 오늘날의 우리에게 시공을 넘나드는 감동을 준다.
능력과 양심, 책임감을 가진 지휘관의 리더십, 강력한 적 앞에서 오랜 경험과 끈질긴 저항의식으로 무장한 주민들의 단결력, 이 두 가지가 결합한 충주산성의 승리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답사 정보]* 생각보다 길이 험하지는 않지만, 성벽까지 걸으려면 등산 복장에 준하는 준비를 한다. 마즈막재에서 산성까지 편의시설이 없으므로 충주 시내에서 마실 물과 음료수, 먹을거리를 미리 준비해 가는 것이 좋다. * 가는 법 중부내륙고속도로 충주IC→3번 국도 충주 방향→충주 시내→안림로를 따라 마즈막재 정상에 오른 후 삼거리에서 우회전하여 200m 진행하면 충주산성 오르는 주차장이 나온다. 여기서부터 걸어간다. 대중교통으로는 충주역과 충주공용버스터미널 등에서 종민동 행 515번 버스가 마즈막재까지 간다(하루 4회). 비교적 자주 다니는 116번, 119번 버스를 이용, 의료원 입구에서 내려 걸어 올라가는 것이 시간의 구애를 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