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변 등 진보 인사의 최고법원 진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설치를 위해 박근혜 정부를 압박한 논리다. 자신들의 숙원사업이었던 상고법원이 아니라 '대법관 증원안'을 택한다면 진보인사가 최고 법원에 입성할 거란 일종의 '협박'이다. 정권 코드에 맞춘 압박 카드인 셈이다.
이런 내용은 양 전 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2015년 8월 3일에 작성한 'VIP보고서'에 기재됐다. 지난 2월 출범한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단장 안철상 법원행정처장·특조단)이 확보했지만 최종보고서에는 인용하지 않은 문건이다. '부실 조사' 논란이 커지자 대법원은 5일 오후 뒤늦게 해당 파일을 공개했다.
붉은 색으로 강조한 문장... "민변 등 진보 배후세력"
양 전 대법원장과 박 전 대통령의 단독 면담 사흘 전에 작성된 이 문건은 우선 '상고제도 개선의 필요성 및 시급성'이라는 큰 제목으로 시작한다. 구체적으로 "10여 년 사이 상고사건이 2배 증가"해 "2014년 기준, 대법관 1인당 연간 3178건, 하루 평균 8건을 처리"하고 있다며 "상고사건 처리 지연에 따른 경제적 손실이 막대"하다는 내용이다.
이어 상고심 개선 방안 중 하나로 제기된 '대법관 증원론'은 옳지 않은 선택지라고 강조한다. 보고서는 "대법관 증원론의 위험성 및 허구"라는 별도 카테고리를 만들고 그 아래 "진보 인사의 최고법원 진출"이라고 썼다. 해당 문장은 붉은색으로 강조했다. 그러면서 바로 아래에 "민변 등 진보 세력 배후에서 대법관 증원론 강력 지지 ⇨ 상고법원 도입 좌초되면, 대법원 증원론 대안으로 내세우며 최고법원 입성 시도할 것"이라고 부연했다.
양 전 원장이 강조했던 상고법원은 대법원이 맡고 있는 사건 중 단순한 사건만 담당하는 별도 법원을 말한다. 사회적 파장이 크거나 판례는 변경해야 하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곳에서 담당하는 안이다. 사건이 많다고 호소하면서도 정작 대법관 수를 늘리는 방안은 거부해, 대법원장을 포함한 소수의 대법관들이 권위를 독점하려는 '꼼수'라고 비판받았다.
이런 '압박 카드'는 일정 부분 통한 듯하다. 단독 면담 이후 작성된 'VIP 면담 이후 상고법원 입법추진전략' 보고서에는 "면담으로 상고법원 입법추진환경에 의미 있는 전환점 도래"했다며 "법무부와 협의하여 창조적 대안 창출해 주기 바란다"라는 박 전 대통령의 발언을 그 근거로 꼽았다.
"법무부도 문제의식 가지고 있다"박 전 대통령이 '협상 파트너'로 법무부를 지정해줌에 따라 법원행정처는 이 기관을 상대로 한 협상전략을 세운다. 그러나 법무부가 상고법원 설치에 회의적인 의견을 이미 피력해둔 상황이라 전망은 밝지 않았다.
보고서는 법무부가 상고제도 개선에 대해 "이중 플레이"를 하고 있다며 비난한다. 표면적으로는 상고제도 개선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확고한 반대 입장이라는 것이다. 그 배경으로는 "법원의 영향력 확대에 대한 견제심리 발동"해 "각종 궤변적 반대 논리 구성ㆍ유포"한다고 봤다.
그럼에도 협상의 여지는 있다고 봤다. 자신들이 내세운 '압박 카드'가 통할 거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보고서는 상고법원 설치 관련 법무부의 태도에 불만을 표하면서도 "다만, 대법관 증원론에 대하여는 진보 세력의 최고법원 진출을 우려하는 문제인식을 가지고 있다"라고 서술했다.
이 같은 상고법원 추진 과정에서 당시 법원행정처의 행위와 관련해 특별조사단은 지난달 25일 발표한 조사보고서에서 "상고심의 개선 내지 강화라는 정책목표가 너무나 시급하고 절박한 것이라는 점에만 몰입한 나머지 원칙에 위배하여 추진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라면서 "그 과정에서 재판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훼손되고, 학술활동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같은 법관의 기본권이 침해되기도 하였다"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