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와 VIP의 면담으로 상고법원 입법 추진 환경에 의미 있는 전환점 도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의 법원행정처는 지난 2015년 8월 양 전 대법관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면담과 관련해 'VIP 면담 이후 상고법원 입법추진전략'이라는 문건을 작성했다. 세간에 많이 알려진 것처럼 여기서 VIP는 대통령을 의미한다. BH(Blue House, 청와대)와 함께 정치권에서 많이 쓰는 용어다.
그렇다면 'CJ'는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 'Chief Justice(법원장)'의 약자로 양 전 대법원장을 칭하는 표현이다. CJ는 대법원이 5일 공개한 '사법행정권 남용' 관련 98개 문서 곳곳에 등장한다. 이는 양 전 대법원장 체제의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을 추진하면서 당시 청와대와 교감하며 얼마나 정치적인 태도를 취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표현이다.
앞서 '사법행정권 남용 특별조사단'이 지난 25일 공개한 보고서에서 "상고심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미명 하에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라며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장치를 사법부 자신이 부인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 존재 근거를 붕괴시켰다"라고 총평했다.
특별조사단이 보고서에 인용한 문서 내용에는 "정부 운영에 대한 사법부의 구체적 협력 사례", "국정 운영의 동반자·파트너", "(정부와 사법부의)윈윈"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었다. 이것만으로도 당시 사법부가 스스로 독립성을 무너뜨렸다고 보기에 충분해 보였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날 공개된 문서 원본에는 조사단이 언급하지 않은 더 심각한 '정치적' 표현들이 등장했다.
먼저 조사단이 문건의 제목만 공개했다가 이번에 그 내용이 확인된 'VIP보고서'라는 문서에는 상고 제도 개선의 필요성·시급성을 강조하면서 상고법원 판사 임명 시 '대통령님 의중(意中)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이라고 적혀있다. 새롭게 설치되는 상고법원의 인사가 대통령 입맛에 맞게 이뤄지도록 하겠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또 대통령을 설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상고법원의 대립되는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 '대법관 증원안'의 '위험성'을 부각하기도 했다. 해당 문건에는 "대법관 증원론의 위험성과 허구, 진보 인사의 최고법원 진출", "민변 등 진보세력 배후에서 대법관 증원론 강력지지", "상고법원 좌초되면 대법관 증원론 내세우며 최고법원 입성 시도할 것" 등 정치권의 '색깔론'에 가까운 주장이 담겨 있다. 이 같은 논리로 보수적인 대통령을 설득하겠다는 게 당시 대법원의 상고법원 추진 전략이었던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또 상고법원 설치를 설득하기 위해 법원의 독립성을 해치는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상고법원은 대법원 상고심이 과도하게 늘어나면서 대법관들이 물리적으로 재판을 소화하기 어렵기 때문에 추진됐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은 이를 두고 "(상고법원은) 대법원이 처리할 가치가 없는 간단한 사건의 3번째 심급 담당 법관에 불과"하다며 "상고법원의 일탈 판결에 대법원의 통제 가능"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내용이 'VIP보고' 문건에 나와 있다는 것은 결국 상고법원이 출범하더라도 정권의 뜻에 반하는 판결이 나오지 않게 '통제'할 수 있다고 어필하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이 각급 법원과 대법원의 판결을 통제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상고법원 입법추진을 위한 BH설득방안'이라는 문건에도 자세히 드러나 있다. 이 문건에는 "단순한 소극적 암묵적 지지가 아니라 앞에서의 세부 아이템 항목에서 보는 바와 같은 적극적 참여 및 지원 활동을 기초로 한 국정 협조"라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세부 아이템'은 KTX 해고 승무원 소송과 전교조 법외노조 소송 등이다. 이들 사례들이 사법부가 박근혜 정부에 '적극적 참여 및 지원활동을 기초로 한 국정 협조'를 한 증거라는 것이다. 특별조사단은 이 같은 내용이 실제 당시 법원행정처가 판결에 영향을 끼친 것이 아니라 청와대를 상대하면서 '활용할 수 있는 사례를 수집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러한 발상 자체가 '사법 신뢰'를 훼손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법원은 이 같은 전략을 수립하면서 정치권의 상황도 면밀하게 검토했다. 특히 당시 청와대 상황과 관련해 "BH 내 권력구조의 중심축이 비서실장(이병기)에서 민정수석(우병우)으로 이동"했다며 "특히 사법부 정책은 민정수석에게 힘을 실어줘, 사실상 의사결정권이 민정수석에게 이양된 상태"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획기적인 설득 카드로 민정수석을 돌파하는 정공법이 필요"하다라고 표현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관련한 재판과 상고법원 추진 전략 등을 검토한 문건에서는 국회가 언급되기도 했다. 2015년 9월 서울고법이 법외노조 집행정지 인용 결정을 한 후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처분 효력 집행정지 관련 검토' 문건에는 대법원에 계류된 재판 결과에 따른 정치권의 반응을 분석한 내용이 담겨있다.
인용 결정(전교조 법외노조 결정)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내용 뒤에는 인용됐을 경우 후속조치로 '반발 세력 무마'라는 부분이 나온다. 여기서 당시 대법원은 야당의 상황을 "현재 사정정국이 진행 중이므로 강하게 비판에 나설 의지도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현재 수사·재판 중인 의원 수는 '야당 34 대 여당 5' → 결국 야당 의원에게 최후의 의지 대상은 대법원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대법원이 야당 의원들 재판을 쥐고 있기 때문에 비판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은 대법원의 뜻대로 재판을 움직일 수 있다는 표현과 다르지 않다.
위 언급된 내용들은 대부분 특별조사단 보고서에 없지만 문서 원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다. 결과적으로 아직 공개되지 않은 문서들 가운데 더 문제가 많은 내용이 담겨 있을 수 있다는 의심이 가능하다.
안철상 법원행정처장은 이날 문서를 공개하면서 "이번에 공개되는 98개의 파일 외에 앞으로도 410개의 파일 중 공개 필요성에 관하여 좋은 의견이 제시되고 그 의견이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공개의 범위는 더 넓어질 수도 있겠다"라며 추가 공개 가능성을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