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
<오마이뉴스>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진 미성년 사망자 중 11명의 유품 사진을 5.18기록관을 통해 전달받았다. 1997년 국립5.18민주묘지(신묘역)가 만들어지면서 망월묘지(구묘역)에 있던 묘 상당수를 이장했는데, 이때 나온 유품들이다. 이 유품들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사 내용은 전남대5.18연구소 학술DB에 보관된 1988년 유족 증언을 토대로 작성했다. - 기자 주
이 자그마한 여름 교복은 자신의 처절한 모습으로 참혹했던 '그날'을 이야기하고 있다. 교복의 주인은 1980년 광주 동신중학교 3학년이던 박기현(남, 1966년생). 그해 5월 20일 "공부할 책을 사오겠다"며 집을 나간 그는 영영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계엄군은 자전거를 타고 계림파출소 앞을 지나던 그에게 무자비한 곤봉질을 해댔다. "동신중 3학년 학생이에요, 저는 데모 안 해요!"라고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이틀 후인 22일, 아들의 시신과 마주한 엄마가 이후 남긴 증언이다.
"입고 있던 옷을 칼로 찢어봉께 피는 안 나도 머리랑 목 근처가 시퍼래. 곤봉으로 얼마나 때려브렀는지..."
[박기현]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이틀 전인 18일, 엄마는 동생이 수술을 한다고 해서 대전에 가 있었다가 21일 "광주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광주로 들어오는 길이 막혀 버스, 기차, 택시를 갈아탄 것도 모자라 맨발로 샛길을 걸어 겨우 집에 도착했다. 발바닥엔 유리조각 등이 박혀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아들이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부터 광주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던 아빠는 22일 "병원에 가면 시체가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전남대병원을 찾았다. 응급실에 아들이 없어 정신없이 영안실로 발길을 돌렸다. 시신들 사이로 아들의 교복바지가 보였다. 얼굴에 천이 덮여 있었지만 아빠는 첫눈에 아들임을 알아봤다.
아들의 사인은 타박사. 27일 작성된 검시조서에 따르면 그는 '뇌좌상(외력에 의하여 뇌에 출혈 또는 손상)', '두부·배흉부·전흉부·우완상부 다발성 타박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22일 시신을 발견한 부모는 당장 다른 옷을 구할 수 없어 여름 교복을 아들에게 입히고 관에 안치했다. 27일 계엄군이 폭압적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한 후 사망자들에 대한 검시작업이 시작됐는데, 그때 다시 관을 열어본 부모는 씻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다. 시신에서 눈알 두 개가 모두 빠져 있었고, 혀가 한 뼘이나 나와 있었다. 몸에서 피도 흘러내리고 있었다. 현재로선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진 속 교복의 붉은 자국이 그때 묻은 피로 추정된다. 엄마의 증언이다.
"그냥 그대로 땅에 묻었으믄 (그 모습을) 안 보고 몰랐을 것인디 (괜히 관을) 끌러(열어) 갖고 그 처참한 것을 봤어. 으메, 시상에 내 새끼가..."
[안종필] "어머니, 지금 포기하면 모두 헛된 죽음이에요"
위 사진은 당시 고1이던 안종필(남, 1964년생)의 유품이다. 안종필은 27일 끝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있다가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다. 21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던 그는 엄마와 누나의 요청에 몇 차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다시 전남도청으로 나갔다. 훗날 누나가 증언한, 5.18 당시 그와 엄마가 나눈 대화 내용이다.
"꼭 집에 있어라! 지금 죽는 사람은 모두 개죽음이라고 하더라."
"어머니, 어떻게 개죽음이란 말이에요. 지금 우리가 포기하면 헛된 죽음밖에 되지 않아요."
엄마가 옷을 모두 감췄으나, 아들은 교련복을 찾아 입고 다시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계엄군의 마지막 작전이 진행된 27일, 잔혹한 총성이 광주를 뒤흔들었다. 엄마는 "내가 (6.25전쟁 당시) 인공 (치하) 때도 봤지만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안 가면 종필이는 죽는다"며 울부짖었다. 가족들은 그저 말릴 수밖에 없었다. 27일 작성된 검시조서에 따르면, 아들은 '우흉부관통총상'으로 사망했다.
[문재학] "도청에서 심부름이라도 하겠습니다"
위 사진은 5.18을 상징하는 사진 중 하나다. 계엄군이 도청을 점령한 27일 찍힌 이 사진엔 상하의 교련복을 입은 안종필이 엎드린 채 널브러져 있다(좌측 상단). 그의 오른편에 바지만 교련복을 입고 쓰러져 있는 이는 동갑내기 문재학(남, 1964년생)이다. 그 역시 27일까지 전남도청에 남아 있다가 사망했다.
21일 친구 집에 간다며 나간 문재학은 다음날 집에 와서 "(사람들이) 전두환이 보고 물러가라고 외치고 다녀요"라고 말했다. 형이 위험하니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타일렀지만, 그는 23일 점심을 먹은 후 몰래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24일 가족들에게 전화를 건 그는 "초등학교 동창인 양창근이가 총에 맞아 죽었고 또 다른 사람들도 많이 죽었어요, 여기서 심부름이라도 하면서 있겠습니다"라고 전했다. 엄마가 전남도청을 찾았으나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래는 그의 유품 사진이다.
27일 계엄군의 진압 작전이 진행된 후, 가족들은 백방으로 그를 찾아 나섰다. 6월 6일이 돼서야 그의 담임선생님이 "<전남일보> 사망자 명단에 '17세 가량 고교생, 교련복 차림, 계엄사 4-3, 묘지번호 104, 관번호 94'라고 꼭 재학이 같은 사람이 있다"고 연락을 해왔다. '계엄사 4-3'이 망월묘역에 가매장돼 있다고 해 부랴부랴 그곳을 찾았다.
흙을 파 시신을 보니 머리가 뭉텅뭉텅 빠져 있고, 부패가 상당히 진행돼 있었다. 총알이 입으로 관통한 듯해 더욱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가족들은 "재학이가 아니다"라고 우겼으나, 담임선생님은 "재학이가 맞다"고 했다. 아빠는 아들이 세 살 때 다쳐 생긴 머리의 상처를 만져보려고 했으나 그러다가 머리가 곧 떨어질 것 같아 제대로 확인하질 못했다.
가족들은 27일 검시를 진행한 검사를 찾아 광주지방검찰청을 찾았다. 검시조서엔 '좌복부 및 전좌경부(목)관통총상, 하악골 분쇄 골절상'이라고 적혀 있었고, 사진 두 장이 첨부돼 있었다. '4-3'은 '문재학'이 맞았다.
[김부열] 아들이 사라져 점쟁이까지 찾았건만
위 사진은 당시 조선대학교부속고등학교 3학년 김부열(남, 1962년생)의 유품이다. 19일 학교에서 돌아온 그는 "군인들이 여대생을 붙잡아 옷을 벗겨놓고 토끼뜀을 시키더라"며 열을 냈다. 안 그래도 시내가 어수선하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집에 붙어있으라고 아들을 단단히 타일렀다.
21일 아들이 집에 오지 않았다. 아들 친구를 만나 물어보니 아들이 시내에서 차를 타고 다니는 걸 봤다고 했다. 가슴이 철렁했다. 전남도청, 병원 등을 돌아다니며 시신들 하나하나까지 모두 다 뒤졌다. 아들을 찾다가 계엄군이 쏘는 총을 피해 간신히 살아난 날도 있었다.
27일 계엄군이 잔혹하게 전남도청을 짓밟은 후에도 아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두 형과 친척, 친구들, 심지어 고용한 인부들까지 망월동, 화순, 창평 등을 찾아다녔지만 아들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점쟁이를 찾아가 아들이 어디에 있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다가 6월 7일쯤 광주시청에서 연락이 왔다. 아들이 지원동 주남부락 뒤 산속에 있으니 찾아가란 소식이었다. 산을 한창 올라갔더니 목과 몸이 따로 있는 시신이 있었다. 이미 부패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사타구니에 있는 큰 점과 옷으로 아들임을 확인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들은 27일 외곽 경비를 서던 중 계엄군이 들이닥치자 화순으로 도망치려고 했었단다. 하지만 이미 진을 치고 있던 계엄군에게 총을 맞아 사망했다. 6월 7일 작성된 검시조서에는 'M16다발성총상(흉부상부 절단)'이라고 적혀 있다.
[민청진] "어머니!" 외치며 손 잡더니, 결국...
나무판화기능공이었던 민청진(남, 1961년생)은 21일 시위를 구경하던 중 갑자기 머리에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엄마와 아빠는 아들이 누워있다는 전남도청 인근의 작은 병원으로 향했다. 아들은 의식이 있었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조그마한 상처가 있을 뿐이었다.
엄마는 아들이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들은 "어머니!" 한 마디와 함께 엄마의 손을 잡더니 사경을 헤매기 시작했다. 병원에선 단순한 외상이라 여기고 아들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고통스러운지 아들은 밤새 몸을 뒤척였다.
다음날 아빠가 아들을 업고 전남대병원으로 이동했다.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유탄이 뇌 속에 여러 개 박혀 있다고 했다. 수술을 했으나 결국 25일 아들은 숨졌다. 28일 작성된 검시조서에 따르면 아들은 두부관통총상으로 인해 사망했다. 엄마는 아들을 잃고 충격으로 1년 동안 하혈을 하다 자궁암 수술을 받았다.
* 다음 기사(시신 더미 속 아들 바지와 발바닥, 엄마는 결국 기절했다 http://omn.kr/1ja3o)로 이어집니다.
[기획 / 오월ing]
ⓛ 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http://omn.kr/1j9so)
②-1 해남 땅끝마을 사는 '여자 광수' "지만원 그놈이 나를..." (http://omn.kr/1jauj)
②-2 '광수' 지목된 두 시민군의 증언 "통합병원 시신 정말 이상했다" (http://omn.kr/1jb7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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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
http://omn.kr/1jaf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