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
<오마이뉴스>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숨진 미성년 사망자 중 11명의 유품 사진을 5.18기록관을 통해 전달받았다. 1997년 국립5.18민주묘지(신묘역)가 만들어지면서 망월묘지(구묘역)에 있던 묘 상당수를 이장했는데, 이때 나온 유품들이다. 이 유품들이 공개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기사 내용은 전남대5.18연구소 학술DB에 보관된 1988년 유족 증언 등을 토대로 작성했다. - 기자 말
*앞 기사(멍투성이에 입힌 교복, 관 다시 여니 "으메, 내 새끼가..." http://omn.kr/1ja2t)에서 이어집니다.
위 사진에 담긴 바지는 21일 숨진 무등중학교 3학년 김완봉(남, 1966년생)의 유품이다. 전남도청 인근 황금동에 살았던 엄마는 20일 아들과 함께 구경삼아 시위에 나갔다가 경찰이 최루탄을 쏘기 시작하자 무서워 집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다음날인 21일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절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 그러던중 구시청사거리에서 메가폰과 현금통을 든 채 "시민 여러분 지금 청년들이 배가 고픈 상황입니다"라고 외치는 남성을 만났다. 어려운 집안 형편이었지만 1000원을 주고 돌아서는데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아주머니, 안 바쁘믄 이 돈으로 빵이랑 치약, 우유, 담배 같은 거 사갖고 도청 앞에 좀 갖다 줄라요?"
현금통엔 10만원 조금 넘는 돈이 있었다. 그 돈으로 이것저것 샀더니 양이 상당했다. 혼자 들고 갈 수 없어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주변 술집의 젊은 여성 종업원들이 "아줌마, 우리가 도와줘도 돼요?"라고 물어왔다. 엄마는 그들과 함께 물건을 나눠들고 전남도청 앞으로 달려갔다.
[김완봉] 계엄군에 계란 주고 오던 엄마, 그런데...
군인들은 YMCA 건물 앞에, 시위대는 조금 떨어진 거리에 앉아 있었다. 시위대 중 한 사람이 "우리는 많이 묵었응께 저짝 군인들 좀 갖다주쇼, 군인들도 배고플 것인디"라고 말했다. 엄마는 겁이 났지만 머리에 이고 있던 계란 다섯 판을 조심스레 군인들에게 건넸다. "이거 먹을라요?"라는 엄마의 말이 떨어지자, 군인들은 서로 먹으려고 야단을 피웠다.
엄마는 절에 가지 않고 오후 1시쯤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들이 없었다. 가슴이 철렁해 다시 전남도청 쪽으로 내달렸다. 누군가 엄마를 보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줌마, 가지 마쇼!"
"우리 아들 못 봤소?"
"워매! 도청에 난리가 났소. 남학생 둘이 총에 맞고 쓰러진 것을 내 눈으로 보고 왔소!"
"총 맞은 애들이 뭐 입었습디까?"
"한 애는 밑에 해작쓰봉(청바지)에다가 욱(위)에는 퍼렁거 입었습디다."
엄마가 아들을 다시 만난 건 22일 오후였다. 전날부터 곳곳을 뒤지다가, 22일 새벽부터 동네 청년을 데리고 적십자병원을 찾았다. 부상자 명단에 아들 이름이 없어서 시신안치실로 갔는데 발이 떨어지질 않아 청년 혼자 들여보냈다.
"아짐! 아짐!"
"뭣헌다고 나를 불러. 빨리 나와! 언능 가게!"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엉금엉금 기어 문 앞에 가니 온통 시신뿐이었다. 아들의 '해작쓰봉'과 발바닥이 보였다. 엄마는 그대로 기절했다. 28일 작성된 검시조서에 따르면, 아들은 후경부(목)총상(M16), 좌건두부좌상(타박 등에 의한 손상)에 의해 사망했다.
생계가 어려워 난리통에 마땅히 갈아입힐 옷을 구할 수 없었다. 엄마는 집에 있던 여름 교복 바지와 겨울 교복 상의를 입혀 아들을 떠나보냈다.
[전영진] 교복 입고 나간 아들, 허름한 시체실에서...
위 사진은 김완봉과 같은 날 숨진 대동고등학교 3학년 전영진(남, 1962년생)의 유품이다. 21일 오전, 집에 전화가 없어 밖에서 전화를 하고 오겠다며 나간 그는 별 문제 없이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엄마! 시내에 계엄군이 하나도 없대요"라고 말한 뒤 언제 나갔는지도 모르게 교복을 입고 다시 나가버렸다.
집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데 주인집 아주머니가 엄마에게 쪽지를 건넸다. 나중에 알아보니 아들이 총에 맞을 때 함께 있던 친구가 보낸 쪽지였다. 쪽지에는 "21일 오후 1시즘 트럭을 타고 도청에서 노동청 쪽으로 가는 도중에 공수부대의 총에 영진이가 맞았다, 곧바로 전남대병원으로 옮겨졌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곧장 찾아간 전남대병원은 아비규환이었다. 복도엔 환자로, 응급실 바로 옆엔 가마니로 덮인 시신으로 가득했다. 아들을 찾을 수 없어 적십자병원을 거쳐 기독교병원까지 이동했다. 기독교병원에선 환자를 돌보는 데 지장을 준다며 출입을 막고 있었다. 다음날에서야 들어갈 수 있었다.
22일 오전, 허름한 시체실 선반에 놓인 아들을 발견했다. 28일 작성된 검시조서에 따르면, 아들은 우측 두골 총상(M16)에 의해 사망했다.
[방광범] '저수지 목욕' 아이들에게까지 무차별 총격
위 사진은 당시 전남중학교 1학년 방광범(남, 1967년생)의 유품이다. 엄마는 24일 점심을 먹이려고 아들을 찾았다. 하지만 아들을 찾을 수 없어 먼저 밥을 먹었다. 그런데 식사 도중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서워 나가지 못하고 떨고만 있었는데, 총소리가 잠잠해지자 같은 동네 사는 시동생이 달려와 아들이 총에 맞았다고 했다.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가는 엄마를 마을 사람들이 붙잡았다. 아들의 죽은 모습이 하도 처참해 현장에 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제11공수여단은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던 도중 시민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그들은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놀란 아이들은 급히 언덕으로 몸을 피했으나 아들은 머리에 총을 맞고 말았다.
6월 4일 작성된 검시조서엔 'M16 두부관통 총상(두개골 좌측이 떨어져 나감)'이라고 나와 있다. 남편과 함께 동네 뒷산으로 아들을 찾으러 나섰다. 진을 치고 있던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눴다. 엄마가 울며 사정하니 길을 터줬다. 시신을 발견한 엄마는 몸져 누웠고, 아빠는 정신과 신세를 지게 됐다.
[김춘례] 18세 여성 노동자 몸의 수많은 총상
새하얀 모습이었을 수의와 버선, 이 유품의 주인인 김춘례(여, 1962년생)는 일산방직 노동자였다. 23일 그는 할아버지 제사를 위해 화순에 가야 하는데 시외로 가는 차가 끊겨 애를 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집이 화순인 같은 공장의 고영자를 설득해 걸어서 화순으로 향했다.
지원동 쯤 지날 무렵, 소형버스가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시내에 관이 부족해 화순으로 관을 구하러 가는 시민군들이 타고 있었다. 두 사람은 버스를 얻어 타고 화순으로 향했다.
주남마을을 지날 즈음, 일이 터지고 말았다. 계엄군이 버스를 향해 집중 사격을 퍼부은 것이다. 버스에 타고 있던 18명 중 15명이 즉사했다. 이 중 김춘례도 포함돼 있었다. 계엄군은 생존자 3명 중 2명도 뒷산으로 끌고 가 사살한 뒤 암매장했다. 현재까지 사망자 17명 중 9명만 신원이 확인됐는데, 나머지에 대해선 암매장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9일 작성된 검시조서에 따르면 김춘례는 전신다발성 총상(M16)으로 사망했다. 온 몸에 총상이 있었다는 건데, 6월 9일 작성된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확인된 총상만 여덟 군데였다.
[이강수] 몸조심 당부하고 헤어진 쌍둥이 형제, 하지만...
검정고시에 함격했던 이강수(남, 1961년생)는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해 27일 마지막까지 전남도청을 지켰다. 그의 쌍둥이 동생도 22일부터 시위에 합류해 전남도청에 있었는데 서로 맡은 역할이 달랐다. 계엄군의 학살이 자행되기 전날인 26일 밤, 형제는 몸조심을 당부하며 헤어졌다.
피바람이 지나간 27일 새벽, 유탄에 맞아 얼굴 광대뼈가 부러진 채 결박당해 있던 동생은 어디선가 형의 목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살았다고 생각한 형은 결국 숨진 채 발견됐다. 27일 작성된 검시조서엔 '전흉부관통총상(M16)'이라고 적혀 있었다. 동생의 딸은 초등학교 6학년인 2003년 '5.18 글짓기 한마당'에 제출한 작품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도 형님의 묘지 앞에 엎드려 통곡하는 동생에게 누가 위로의 말을 해줄 것입니까. 형제를 갈라놓은 사람은 목숨을 다 바쳐 사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죄의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까."
[김병연] 부모님 걱정돼 찾아가다...
1997년 구묘역→신묘역 이장 당시, 김병연(남, 1962년생)의 묘에선 23점의 유품이 나왔다. 옷가지 16점, 양말 1점, 동전, 단추, 칫솔, 볼펜, 립크림 등이다.
18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가 20일 공수부대에 붙들려 상무대로 연행됐던 그는 하루 만에 풀려났다. 22일 부모님이 걱정돼 담양으로 가던 중 광주교도소 부근에서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 28일 작성된 검시조서엔 '좌천흉부 맹관상(탄환이 체내에 박혀 있는 총상)'이라고 적혀 있다.
[기획 / 오월ing]
ⓛ 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http://omn.kr/1j9so)
②-1 해남 땅끝마을 사는 '여자 광수' "지만원 그놈이 나를..." (http://omn.kr/1jauj)
②-2 '광수' 지목된 두 시민군의 증언 "통합병원 시신 정말 이상했다" (http://omn.kr/1jb7g)
③ "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http://omn.kr/1jaf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