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후 39년. 떠난 자는 떠난 자대로, 남은 자는 남은 자대로 여전히 그날의 진실을 위해 싸우고 있다. 그들을 만나본다[편집자말] |
국가유공자 아빠는 국가폭력에 아들을 잃었다. 아빠는 6.25전쟁에 참전해 국가를 위해 싸웠지만, 군사정권은 총칼로 아들을 죽였다. 나라를 지키려 목숨을 걸었던 아빠에게도 폭력을 휘둘렀다. '폭도'로 내몰린 아들의 명예를 회복시키기 위해 거리로 나서자 공권력을 동원해 힘으로 제압했다.
아들의 죽음은 서랍 속 기록이 됐다. 아들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에 학교가 아닌 공장에 출근했다. 눈앞에서 사람이 무자비하게 죽어가는 걸 보고 그도 나섰다. 하지만 이런 아들의 죽음은 잘 알려지지 않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성년 노동자이자 시민군이었던 김종철(62년생, 당시 18세)군과 그의 아버지 김영배(90)씨의 이야기다.
지난 9일, 광주 북구에서 김영배씨를 만났다. 아들 김종철군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다. 아들을 잃을 당시 50대 초반이었던 아버지는 90세의 노인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야속했다. 그는 잘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1980년 5월의 그날로 돌아가 아들의 흔적을 기억하려 애썼다.
김영배씨의 구술과 전남대학교 5.18연구소의 학술DB 증언자료를 토대로 재구성한 18살 김종철군의 삶과 죽음을 전한다(전남대 5.18연구소 학술DB 증언자료는 지난 1988년 9월에 김영배씨가 증언한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자개공' 김종철
종철이네 가장은 엄마 이혜남씨였다. 아빠 김영배씨는 직장다운 직장을 다닌 적이 없었다. 광주 양동시장에서 엄마가 작은 주점을 하면서 번 돈으로 먹고 살았다. 아빠는 이것저것 사업에 손을 댔으나 수완이 모자랐던지 모두 실패했다.
궁핍한 살림살이는 바닥을 쳤다. 종철이 중학교 2학년을 다닐 무렵, 가세가 크게 기울었다. 엄마는 큰 수술을 하게 됐다. 모아둔 돈은 없고 수술비는 상당했다. 빚을 얻어 병원비를 충당했다. 돈을 벌던 엄마가 몸져눕자 가정 경제는 파탄 났다.
형은 학교를 그만두었다. 살림을 꾸려가려면 돈이 필요했다. 형은 고등학교 2학년 때 농공장으로 출근했다. 종철도 가까스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자개기술을 익히기 위해 가구공장에 취직했다.
자개공이던 종철은 공장을 옮겼다. 병아리 부화장에서 일하면 월급을 더 줬다. 거기서 먹고 자며 일했다. 집에 가는 건 한 달에 며칠뿐이었다.
80년 5월 18일, 종철은 쇠약해진 몸으로 집에 왔다. 다음날엔 몸이 나아졌는지 밖을 기웃거렸다. 점심 즈음 밖에서 돌아온 종철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부지, 큰일났습니다. 밖에 데모가 났는디 대학생들이 다 죽어갑니다."
아들은 방에 있지 못했다. 밖을 기웃거렸다. 오후 2시가 되니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다. 아빠는 별일이야 있겠나 싶어 빨리 오라고 했다.
밤이 되어도 아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틀 밤이 지났다. 아빠는 덜컥 겁이 났다. 동네엔 계엄군이 사람들을 죽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21일, 아빠는 아들을 찾아 나섰다. 친구 집을 수소문하고 광주 시내를 이 잡듯 뒤졌다. 시민군과 계엄군이 대치하는 월산동 잿등 근처, 화순 가는 길목에도 가봤지만 아들은 보이지 않았다.
'시민군' 김종철
다음날엔 자전거를 타고 광주 지원동으로 갔다. 동네 사람한테 듣기로 그곳에 청년들이 많다고 했다. 갑자기 군용트럭 한 대가 지나가는데 거기에 그토록 찾던 아들이 있었다. 아빠는 죽을힘을 다해 페달을 밟으며 아들을 불렀다. 군용트럭이 마주 오는 차량과 인사 하느라 멈춰선 순간, 아빠는 트럭을 따라잡았다.
"종철아 너 지금 뭐 하는 짓이냐?"
핏물 든 옷을 입은 아들이 고개를 돌렸다. "집에 가자." 아들은 부상자를 옮겨야 한다며 걱정 말고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했다. 그런 아들 옆으로 피범벅 된 시체 서너 구가 보였다. 부상자들도 있었다. 종철이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꾀죄죄하고 수척했다. 옷에는 시뻘건 핏자국이 선명했다. 다행히 몸은 다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른쪽 팔에 멘 총이 눈에 들어왔다.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돌아와라."
아빠는 아들의 다짐을 받고서야 집을 향해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종철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저녁 사촌형 집에 와서 자고 갔다고 했다.
25일, 아빠는 이번엔 애들 삼촌과 함께 아들을 찾아 나섰다. 오후 4시께 옛 전남도청 앞에서 종철을 만났다. 친구들 예닐곱 명과 함께였다. 군용 트럭에서 담요와 식량 같은 것들을 옮기고 있었다.
이번엔 삼촌이 입을 열었다.
"어여 집에 가자. 엄마는 너 때문에 제 정신이 아니여."
"안 됩니다. 오늘밤 안으로 완료하고 들어가야 됩니다. 총도 회수되었으니 걱정 말고 들어가십시오. 저도 빨리 끝내고 들어가겠습니다."
이번에도 아빠는 그냥 돌아섰다. 종철을 이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인줄. 27일 새벽, 총과 탱크 소리가 요란하게 지나간 뒤, 아빠는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아빠는 아들을 찾아 두 달 동안 안 가본 곳이 없다. 상무대, 전남대 영안실 등에서 처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그래도 아들 생각에 조선대병원과 제중병원까지 두루 두루 훑었다. 하지만 종철이는 없었다.
묘지번호 59번
그해 7월, 광주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종철이가 입고 있던 바지 뒷주머니에서 주민등록증이 발견돼 전화를 했단다. 그길로 경찰서에 가니 '추 경장'이란 사람이 시체들 사진을 보여줬다. 아빠는 시체를 알아보지 못했다. 엄마는 달랐다. 사진들 중 하나를 들더니 제대로 숨도 못 쉬면서 울었다. "만일 내 자식이 죄없이 죽었다면 아마 이 사진이 분명할 거구먼." 경찰은 확실한 것은 지문을 대조해봐야 한다며, 집으로 돌아가 기다리라고 했다.
일주일 쯤 후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망월동에 종철이가 묻혀 있다고. 묘지번호가 59번이라고.
엄마는 충격으로 실신했다. 27일 새벽, 도청에서 죽었다고 했다. 사흘만에 일어난 엄마는 곧장 망월동으로 갔다. 59번 묘지 앞에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절규했다. 엄마는 손톱으로 무덤을 파면서 "내 자식 얼굴 좀 보자"라며 울부짖었다. 그걸 보던 추 경장이 한마디 했다.
"파봤자 구더기만 들끓으니 그만두십시오."
아들을 떠나보내고 엄마는 병이 심해졌다. 병원 신세를 지는 날이 길어졌다. 그렇게 평생 약을 달고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게 10년 전 일이다.
아버지의 부탁
아내를 떠나보내고 아들을 잃은 아버지. 구순이 된 아버지는 혼자였다. 그의 집은 어두웠다. 햇살이 잘 들지 않았다. 차가운 방바닥엔 책이 펼쳐져 있었다.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 5.18민중항쟁 증언록이다. 책장엔 5월 항쟁 관련 책이 수두룩하게 꽂혀 있었다.
한 장뿐이라는 아들의 사진은 서랍 속에 있었다. 김종철군이 학교를 그만두고 '자개공' 기술을 익히기 위해 가구공장에 취직할 때 찍은 사진이었다. 이 사진은 영정사진이 됐다. 벽면에 내걸린 달력의 17일과 18일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다. 17일은 광주 북구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서 합동 추모제가 있는 날이고, 18일은 39주년 기념식이 열리는 날이다. 달력 밑으로 약봉지가 수북하다.
- 건강은 어떠신가요?
"요즘 몸이 안 좋아. 자꾸 어지럽고 정신이 돌아브러. 한 3년 됐제. 그래서 약을 많이 묵어. 정기적으로 병원가서 치료도 받고.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 (광주)트라우마센터에 가면 사람들도 만나고 이것저것 교육받음서 살고 있제."
- 아들이 시민군으로 활동하다 계엄군의 총에 희생됐습니다. 시민군을 폭도라고 할 때 어떠셨나요?
"종철이 누명 벗길라고 내가 별짓을 다했당께. 그러믄서 전두환이한테 숱허게 탄압받았제. 그래도 우째, 아들 생각하믄서 버텼제. 전두환이가 광주 온다고 하믄 형사들이 집으로 와브러. 문밖에도 서있고. 그러다가 소란을 피우믄, 차에 태워불고 곡성으로, 구례로, 남원으로 강제로 끌고가브러. 그리고 10리, 20리마다 내동댕이쳤제. 그런 일 숫허게 있었제."
- 최근에도 5.18민주화운동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말들이 쏟아집니다.
"아주 속이 부글부글 해. 말이 안 나와브러. 말하면 더 울화통 터진께 그래서 말을 참아."
- 김종철군은 어떤 아들이었나요?
"애가 야물었어. 빠릇빠릇하기도 했고. 우리가 가난해서 그렇지 뭘 하더라도 다 잘해낼 아들이었제. 엄마랑도 고놈한테 기대가 컸당께."
- 언제 아들이 생각나세요?
"종철이 또래 친구들이 장가를 가서 가정을 꾸려 사는 걸 보면 그라제. 우리 아들도 살아있음,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고 살았을 건디. 그런 거 볼 때마다 속이 상하제."
- 건강이 안 좋으신데 올해도 아들 만나러 가실 건가요?
"가야제. 저기 달력에도 표시해놨당께. 17일엔 망월동에 가서 제사 지내고, 18일엔 기념식 가야지. 나이 이렇게 묵었어도 5.18 행사 있으면 빠진 적 없당께. 5.18때 아들을 잃은 유공자이기도 하지만 국가유공자여."
김씨는 서랍 속에 있던 국가유공자증과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증을 꺼냈다. 국가유공자증서는 6.25 전쟁에 참전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명박 정부시절에 받은 거였다.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증서는 국가폭력에 아들 김종철군을 잃었다는 이유로 김대중 정부시절에 받았다. 아이러니다.
김영배씨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5.18 진상규명 꼭 돼야 한다"라고 여러 차례 반복했다.
국립5.18민주묘지 묘역번호 2-32.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교가 아니라 공장을 선택한 노동자, 부상당하거나 사망한 시민군을 위해 피를 뒤집어쓴 시민군, 꽃 같은 나이에 활짝 펴보지 못한 열여덟 살 김종철군이 그곳에 누워있다. 그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새겨져있다.
'전두환이가 우리 대학생을 다 죽인다고 집을 나와 시민군에 가입해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5월 18일 나가서 5월 27일까지 열심히 용감히 싸웠음.'
[기획 / 오월ing]
ⓛ 죽은 시민군 엄마가 산 시민군에게..."살아야제, 29만원 전두환도 골프치는디" (http://omn.kr/1j9so)
②-1 해남 땅끝마을 사는 '여자 광수' "지만원 그놈이 나를..." (http://omn.kr/1jauj)
②-2 '광수' 지목된 두 시민군의 증언 "통합병원 시신 정말 이상했다" (http://omn.kr/1jb7g)
③ "황석영이라면 이름을 빌려줄 것 같았다... 5.18 진실 알린 그책, 전두환 몰래 우리가 썼다" (http://omn.kr/1jaf5)
④-1 멍투성이에 입힌 교복, 관 다시 여니 "으메, 내 새끼가..." (http://omn.kr/1ja2t)
④-2 시신 더미 속 아들 바지와 발바닥, 엄마는 결국 기절했다 (http://omn.kr/1ja3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