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성은 어느새 '해방구'가 되었다. 호남의 수부이면서 조선왕조의 본관이기도 하는 전주성을 농민군이 장악한 것은 의미가 남달랐다.
일본인 연구가는 동학농민군의 전주성의 점령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전주 점거
동학군이 당당하게 전주성에 들어가자 성문은 열려 있었고, 방비하는 군사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감사 김문현은 사마(司馬) 최영년을 동반하고 한벽정(寒碧亭)에서 풍류음주를 즐기는 환락 중에 있었다. 전봉준 등이 감영에 들어가 세금을 부과하는 문서를 태워버리고 관리를 쫓아버리며 〈동학본영소〉라는 간판을 달 때까지도 전라도 감사 김문현은 술에서 깨어나지 않았고, 시인 매하산인(梅下山人)과 기생 향월(香月)의 손을 잡고 태평스러운 꿈을 꾸고 있었다. 동학 본영에서 감사는 길게 한숨을 짓고 전봉준은 사람을 시켜 감영의 인장을 김문현으로 하여금 바치게 하였다.
전주는 한 사람의 군사도 잃지 않고 고스란히 동학군의 손에 들어왔으며, 김문현은 여산으로 도망갔다. 동학군의 전주 점령 소식이 전해지자, 호남의 50여 군은 동학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김개남은 남원을 점거하였고, 김정현과 안승관은 수원에 다가갔으며 고석주는 홍천을 점거하였고, 김복용과 이희개는 목천 세성산을 공략하였다. 최한규는 유구리를 점령하였고, 정원준은 옥천을 함락하는 등 조선의 8도는 이미 동학군에게 점령되기에 이르렀다.
전주 함락의 보고가 경성에 도달하자, 경성 정부는 너무나 당황하여 인선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홍계훈을 전라병사로 임명하여 강화의 병사 500명을 거느리고 전주의 동학군 토벌을 위해 급히 파견하였는데, 이 때가 4월 30일이었다. (주석 11)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함락한 것이다. 그야말로 무혈입성이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쉽게 함락할 수 있었던 요인의 하나는 성안에 농민군 내응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전주성 뿐만 아니라 농민군이 점거한 지역마다 내응자가 많았다. 농민군이 그만큼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동학군이 남진하는 동안 홍계훈이 이를 뒤쫓아 남쪽으로 내려간 사이, 지휘부는 군사를 돌려 텅빈 전주성을 피 흘리지 않고 점령한 것이다. 동학지휘부의 용병술이 보통이 아님을 보여준다.
김문현은 동학농민군이 밀려오자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처음에는 그나마 체통이 있어서 4인교를 타고 피신하다가 위급한 상황이 되자 4인교를 버리고 헤어진 옷과 짚신을 얻어 신고 피난민에 섞여 공주로 달아났다.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군은 본부를 선화당에 정하고 장수들에게 4대문을 굳게 지키게 하는 한편, 옥문을 열어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다. 군기고의 무기를 거두고 관곡을 풀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감사와 고위 관리들은 모두 도망가고 남은 자는 사령이나 관노들뿐이었다. 동학지휘부는 이들에게 동학에 입교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동학농민군 지휘부는 전주성을 점령하자 혁명군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상과 약탈을 일삼는 것을 염려하여 12개조의 군율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를 어긴 자는 가차없이 처단하였다.
-. 항복한 자는 대접을 받는다.
-. 곤궁한 자는 구제한다.
-. 탐학한 자는 몰아낸다.
-. 순종하는 자는 경복한다.
-. 도주하는 자는 쫓지 말라.
-. 굶주린 자는 먹인다.
-. 간교하고 교활한 자는 없애버린다.
-. 가난한 자는 구해주라.
-. 불충한 자는 없애버린다.
-. 거역하는 자는 효유하라.
-. 병자에게는 약을 준다.
-. 불효자는 죽인다. (주석 12)
주석
11> 앞의 책, 178~179쪽.
12> 김윤식, 『속음청사(續陰晴史上)』, 국사편찬위원회, 131쪽, 1971.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