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와중에 다소 의외의 사건이 벌어졌다.
7월 16일 전라감사 김학진이 특사를 남원으로 보내 김개남과 전봉준이 함께 전주감영으로 오도록 요청한 것이다. 김개남은 듣지 않았다.
7월 16일 전라감사 김학진은 군관 송마사를 급파하여 남원대회 때문에 남원에 와 있던 전봉준을 김개남과 함께 전주로 올라오도록 요청한다. 감사 김학진은 걷잡을 수 없는 국내의 사태에 대한 협조와 일본에 기울어져 버린 조정에 반대하여 농민군과 함께 국난에 대처하면서 전주를 지킬 것을 협의하려던 것이었다.
그런데 동행하던 김개남은 도중에 임실에서 상이암으로 들어가 버린다. 불만과 이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혼자 올라간 전봉준은 일사보국(一死報國) 하겠다는 일념으로 김학진 감사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하였고 감사 김학진은 전라도의 군사지휘권을 전봉준에게 위임하였다. (주석 2)
역사의 분기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변곡점에서 김개남은 줄곧 강경론을 폈다. 전봉준과는 대조적이었다. 출신 성분으로 보면 두 사람의 생각과 처신이 뒤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전봉준은 최하층의 빈농출신으로 아버지가 고부관아에 끌려가 장살당할 만큼 피해와 원한이 쌓인 반면, 김개남은 부농에 가까운 여유 있는 사족출신이었다. 사적으로도 달리 원한같은 것이 있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라는 극단은 아니지만 유사한 성분임에도 노선이 바뀐 것이다.
동학지도자들 가운데 조선왕조를 전복하려는 집단의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김개남을 들 수 있다. 김개남은 자신이 남원에 개국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실제 그는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김개남은 새 왕조를 건설하려는 태도를 취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 후 전라감사 김학진이 함께 조선왕조의 위기에 대처하자는 제안을 거부하였다. 또한 이기(李沂)의 제안, 즉 간악한 권귀(權貴)를 축출하고 주상을 받들어 국헌(國憲)을 일신하자는 제안에 대해서도, 전봉준은 흔쾌히 수락하였지만 김개남은 단호히 거부하였다. (주석 3)
김개남의 고민은 깊어갔다. 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하고 국왕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 항일봉기가 자칫 종묘사직은 물론 국가의 운명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런지 모르고 무엇보다 전봉준 세력과 의견의 차이를 좁히기 어려웠다. 김개남은 8월 하순부터 독자적으로 움직였다.
이 시기의 상황을 일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월 25일 임실을 거쳐 남원에 김개남군 진입.
8월 27일 남원 집합 격문을 보냄.
8월 27일 일본순사 3인이 천안 일대의 동학 정탐 보고.
8월 27일 일본 총영사가 동래부사의 동학 비호문제 보고.
8월 27일 일본 『시사신문』 태봉병첨부 다케노우치 대위 피살 보도.
8월 28일 경상도 예천의 동학농민군 읍내 공격.
8월 29일 경상도 안동 구원병 예천 도착.
8월 29일 일본군 문경 석문(石門)에서 동학농민군과 전투, 경상감영 남영병.
9월 1일 김인배 대접주 하동 공격을 위해 기포.
9월 4일 강원도 동학농민군 강릉 점령.
9월 5일 경상 성주 읍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
9월 9일 경기 동학농민군 죽산ㆍ안성 관아 점령.
9월 9일 전라도 금구의 동학농민군 고산 관아 점령.
9월 10일 전봉준 재기병 통문을 발송하고 삼례대도소 설치. (주석 4)
주석
2> 『남원의 동학과 동학농민혁명』, 41쪽.
3> 정인보, 「해학 이공 묘지명(海鶴 李公墓誌銘)」, 『사료총서』8, 264쪽.
4> 신영우, 앞의 책, 60~6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