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은 청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더 이상의 북상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그동안 많은 사상자가 있었고 병사들의 사기도 크게 떨어져서 재충전의 시간이 요구되었다. 이즈음 황토현에서 패배, 후퇴하고 있던 전봉준 부대와 강경에서 만났으나 일본군과 관군의 맹렬한 추격으로 각기 행로를 달리하였다.
이후 김개남 부대의 행적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전봉준 휘하의 주력군이 벌인 마지막 전투인 원평 태인전투에 김개남 부대도 참여했을 가능성은 있으나 이를 입증할 사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김개남이 마지막으로 체포된 것이 태인이었음을 미루어 그의 부대 역시 태인에서 공식 해산했으리라는 짐작이 있을 뿐이다.
불같은 혁명의지로 항상 과감한 행동을 앞세웠던 김개남도 태인까지 후퇴한 이후에는 후일을 기약하며 몸을 숨겨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가 지칠대로 지친 심신을 의탁한 곳은 태인 종송리(현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있는 매부(徐英基)의 집이었다. (주석 1)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패한 혁명가의 말로는 비참하다. 더러는 현실적으로 패배해도 역사적으로는 부활하는 혁명가도 있지만, 김개남 장군의 경우는 긴 세월 역사적으로도 묻히고 망각되었다.
김개남이 피신한 곳에서 20여 리의 순창군 파노리 마을에 전봉준도 피신하였다. 두 영웅이 은밀히 만나 재기를 도모하고자 선택했을 것이다. 12월 5일자 호남 소모관(召募官) 박화압(朴花押)이 조정에 올린 첩보내용이다.
그런데 무슨 행운으로 천신(天神)이 길을 안내하였는지, 이달 초 2일 밤에 이놈이 김개남을 서로 만나려고 몰래 순창의 피노리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사인(士人) 한신현이 힘써 의로운 거사를 도모하여, 김영철ㆍ정창욱 2인과 더불어 몰래 민정(民丁)을 인솔하고 갖가지 방도로 주선하여 그를 수종하는 세 놈까지 싸잡아 한꺼번에 생포하였으니, 그야말로 함정을 파서 사나운 범을 기다리고 그물을 펼쳐놓고 사나운 새를 기다린 격이었습니다.
이것이 어찌 성덕이 미친 것이 아니겠습니까마는, 세 백성이 힘써 의로운 거사를 도모한 일이 어찌 가상하지 않습니까. 권장하는 방도로 먼저 상으로 1천 냥을 주었습니다. (주석 2)
전봉준이 체포된 것은 배신한 농민들이 밀고한 것이지만, 이 관리는 자신들의 공을 내세우고자 '첩보'를 조작한 것이다.
첩보 내용 중 "김개남을 서로 만나려고"의 대목에 이르면, 김개남과 전봉준이 만나려고 시도한 정보를 관에서 입수했던 것 같다.
김개남이 매부의 집에 은신하고 있던 며칠 후 이웃 마을의 옛 친구 임병찬(林炳瓚)이 찾아와 자기집이 더 안전할 것이라며 데려갔다. 임병찬은 관직이 탐이 나서 김개남을 밀고했다. 전봉준과 김개남의 머리에는 밀고자가 원하는 지역의 군수자리와 거액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12월 2일 강화수비병 병방(兵方) 황헌주(黃憲周)가 이끈 80여 명의 병정들이 들이닥쳐 김개남을 체포하였다. 거의 비슷한 시각에 피노리에 피신했던 전봉준도 붙잡혔다. 전라감사 이도재(李道宰)는 다음과 같은 장계를 조정에 올렸다.
30일에 김개남이 태인 지방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당일 신시(申時)에 신영 병방 황헌주를 시켜 전 초대관 박승규에게 병정 80명과 동영 포교 3인을 인솔케 하고 향도를 대동시켜 진진케 하였습니다. 그날 밤에 우설(雨雪)을 무릅쓰고 80리 협로를 질주하여 동현 산내면 종송리에 이르러 김개남과 동당(同黨) 삼한(三漢)을 급습 포촉하여 초 2일 유시(酉時) 경에 신(臣)의 감영으로 압송해왔습니다. (주석 3)
12월 8일 양호도(兩湖道) 선봉장 이규태도 조정에 김개남과 전봉준을 체포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방금 도달한 완영(전라감영)의 공문 내에, 초 1일에 비류의 괴수인 김개남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연달아 도달한 순창소모관인 임두학의 첩정에 의하면, 동도(東徒) 중 수창(首長)한 거물급 괴수인 전봉준을 잡은 순창의 사인 한신현ㆍ김영철ㆍ정착욱 세 사람에게 마땅히 포상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그 연유를 알려드립니다.
개국 503년 12월 초8일 선봉장 이규태. (주석 4)
부패 무능한 왕조와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을 몰아내고자 혁명에 나섰던 김개남과 전봉준은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장소에서 배신자들에 의해 어이없이 체포되었다. 손화중을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대부분도 구속됨으로써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되고 말았다.
주석
1> 박맹수, 앞의 책, 22쪽.
2>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8』, 100쪽, 2010.
3> 『주한일본공사관 기록』1권.
4>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8』, 21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 / 72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