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남 장군을 발고한 임병찬(1851~1916)은 그 공으로 정부로부터 군수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옛 친구를 발고한 죄책감에서였을까. 그는 1906년 면암 최익현과 함께 정읍 태인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일제의 조선 병탄 후 고종의 밀서를 받고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하여 의병전쟁을 시도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거문도로 유배되어 거기서 운명하였다.
김개남 장군을 전주로 압송한 전라감사 이도재는 서울로 압송할 경우 중도에서 동학농민군에 의해 탈취당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전주 초록바위에서 즉결처형하였다.
마흔 세 살, 봉기한 지 1년여 만에 그는 목이 잘렸다.
이와 관련 황현은 『오하기문』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도재는 마침내 난을 불러오게 될까 두려워 감히 묶어서 서울로 보내지 못하고 즉시 목을 베어 죽이고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 냈는데 큰 동이에 가득하여 보통사람보다 훨씬 크고 많았다. 그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 다투어 내장을 씹었고, 그의 고기를 나누어 제상에 올려놓고 제사를 지냈으며, 그의 머리를 상자에 넣어서 대궐로 보냈다.
김개남이 붙잡혀 전주감영으로 끌려갈 때 수많은 백성들이 몰려나와 애끓는 노래를 불렀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다 두고
짚둥우리가 왠 말이냐.
이도재는 붙잡힌 김개남을 열 손가락에 대못을 박고, 황소달구지 위에 태웠다. 달구지는 소나무 서까래로 삥 둘러 엮어놓아 탈출하지 못하도록 짚둥우리를 서까래 위에 덮어 씌웠다. "짚둥우리가 왠 말이냐"는 여기서 나온 말이다.
초록바위에서 처형된 김개남 장군의 수급(首級)은 서울로 이송되어 12월 25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수(梟首)된 뒤 다시 전주로 보내 효수하였다. 그리고 유족에게 넘긴 것이 아니라 임의로 처리해버렸다.
수급과 분리된 몸통은 전북 임실군 운암면 학암리에 묻혔다는 구전이 있어서 2010년에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유해를 찾지 못하였다.
동학농민혁명 시기에 조선을 방문했던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때마침 서소문 밖에 효수된 김개남 장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외세에 좌지우지되고 있는 임금과의 충성관계를 끊고 그와 다른 주권을 약속했던 동학은 1월 초 전멸하여 충성스러운 관리에 의해 교주의 머리가 서울로 압송되었다.
나는 그것을 베이징으로 가는 길에 가장 부산한 거리인 서소문 밖의 어느 시장에서 보았다. 마치 야영장에서 쓰는 주전자대처럼 나무기둥 세 개로 얼기설기 받쳐놓은 구조물에 사람의 머리 두 개가 그 아래로 늘어뜨려져 매달려 있었다. 그 얼굴들은 고요하고 엄숙해 보였다. (중략)
동학군은 너무나 확고하고 이상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들의 지도자들을 '반란자들'이라기 보다 차라리 '무장한 개혁자들'이라고 부르고 싶다. (주석 5)
당시의 법률에도 '즉결처형'은 위법사항이었다. 전봉준을 비롯 손화중 등 지도자들이 피체되어 비록 형식적이지만 사법절차를 거친데 반해 김개남 장군을 서울 압송 도중에 즉결처형 한 것은, 그만큼 그의 존재가 두려웠고 따르는 사람이 많아 도중에 무슨 사태가 벌어질지 두려웠던 것이다. 또 탐관오리들에게 가혹했던 그에 대한 보복심리도 작용했을 터였다.
일본군이 문제를 삼았다. 그들은 김개남 장군을 '대원군과 엮어서' 대원군의 발목을 잡고자 했는데 허사가 되고만 것이다.
"김개남의 처형을 두고 일본공사와 조선정부 사이에 한때 긴장감이 맴돌았다. 일본공사 이노우에가 전라감사가 김개남을 지방에서 임의대로 처형한 사안을 놓고 조선정부에 '전라감사를 불러들여 엄중히 조사할 것'을 요구하여 조선정부가 경위를 해명하고 무마하느라 곤욕을 치렀다." (주석 6)
주석
5> 이사벨라 버드 비숍, 신복룡 번역, 『한국과 이웃나라』, 124쪽, 집문당, 2001.
6> 박맹수, 앞의 책, 186쪽, 주석 46).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