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시대에 재야의 대표적인 반유신 단체인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의 공동의장 윤보선ㆍ함석헌ㆍ김대중은 1980년 4월 23일 대법원에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등 10ㆍ26사건 관련자들을 위한 청원서〉를 발표했다. 장문의 내용 중 후반부를 뽑았다.
또한 사법부에 대해 우리들은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김재규 씨 등은 공정한 재판을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소리 없는 전국민들의 절규입니다.
작금 경향 각지에서 그들의 재판에 대한 관심은 지대합니다.
그는 양심범이며 확신범입니다.
그럴진대 만약 그가 처형된다면 이는 우리 국민 모두가 우리의 민주 역사에 스스로 오점을 남기게 되는 일이며, 자손 만대에 길이 큰 죄를 범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민주화 투쟁을 범국민적으로 전개하였으면서도, 자신을 불살라 그 계기를 마련한 장본인들에게는 죽음의 길을 가게 한 비겁했던 조상들로, 따라서 민주ㆍ민권ㆍ민족 의식의 훌륭한 성취를 후손에 전승시키지 못한 이 시대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조상들로 기록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때마침 엠네스티 국제사면위원회에서는 금년 들어 전 세계적으로 사형철폐 운동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생명형인 사형제도가 전근대적인 야만적 보복행위일 뿐만이 아니라 만에 하나라도 오심이 있을 경우 그 원상회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정치범, 양심범, 확신범의 경우 사형제도의 실시는 반문명적, 반인류적 폭거로 규탄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김재규 씨는 평소 일상생활에서도 민주 시민의 모범을 보여왔다고 합니다. 타인에게 겸손하였으며 이웃에 친절하였습니다.
중앙정보부장 재직시 대통령에게 고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부하들에겐 자상하였습니다. 수사 당시의 모진 고문에도 조금도 비굴하지 아니하였으며, 재판 과정에서도 추호의 동요 없이 자신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피력하고 조국의 앞날만을 걱정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어떠한 형벌이 내리더라도 명령에만 충실했던 부하들에겐 관대한 처분이 내려지기를 간원했습니다. 유연한 인품의 소유자로서 그의 언행은 보도에 접하는 국민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개인의 일신상의 부귀영화를 초개같이 버리고 오직 조국의 민주주의 회복에만 스스로를 투척하였기에 그는 오늘도 병마와 싸우며 차가운 감방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재판한다'라고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사법부는 민주 양심의 최후의 보루입니다. 국가 권력의 남용을 저지하고 국민의 저항권을 보장하는 사법부마저 그 본연의 의무를 저버릴 때, 국민의 양심이 의지할 곳은 아무 데도 없습니다. 지난 유신체제 7년 동안 사회 어느 분야와도 마찬가지로 사법부 역시 독재의 그늘 아래서 국민의 소리를 외면하고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통한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최근 신현확 국무총리가 김재규 씨 사건의 재판이 종결되기 전에는 계엄령을 해제할 수 없다고 한 발언은 사법부의 독립성을 또다시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법부를 모독하고 있습니다. 온 국민이 서로 자제하며 민주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이 때에 어떻게 해서 특정사건에 대한 재판이 계엄령 해제와 연루될 수 있단 말입니까? 사법부 당국은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여 국민의 신뢰를 파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역사는 독재와 민주 발전의 분수령에 놓여 있습니다. 유신잔재를 청산하고 대망의 민주헌정을 실현하려 하고 있습니다. 국민적 화해와 관용과 단결 속에서 모두가 과거를 반성하며 밝은 민주조국 건설을 향해 전진하고 있습니다. 오늘이 있게 한 김재규 씨에게 공명정대한 재판이 이루어져서 최소한 극형만은 면해져야 합니다. 이는 사법당국이 새 시대를 맞이하여 보여야 할 최소한의 의무입니다. (주석 5)
주석
5> 이상 자료는 『국민 여러분! 민주주의를 만끽하십시오』에서 인용한 것임을 밝힌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