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옥천군 이원면 지탄리. 월이산 아래 금강이 흐르고 반대편으로는 평평한 논과 밭이 펼쳐졌다. 마을 뒷산을 경계로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따라 야트막한 농가가 자리잡았다. 조용한 농촌 마을, 90가구도 채 되지 않지만 여기에 이들을 위한 간이역이 든든히 서 있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오후 1시 12분, 역무원이 없는 지탄(池灘)역 승강장에 안내방송이 울린다. 육중한 기차 바퀴 소리가 말끝을 따른다. 열차가 서서히 멈추자 출입문이 열리고 철도원이 내려 주변을 살핀다. 그는 이곳에 '두 사람이 내리기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안전시설에 가려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그는 그제야 열차 안으로 들어간다.
"7시 21분, 아침 기차를 타고 대전역전시장에 나갔다 돌아오는 길이다. 일주일에 한 번쯤 가서 모과, 도라지, 냉이... 이것저것 갖다 판다. 무겁게 가져간 모과는 순 팔리지 않았지만 냉이를 팔아서 3만 원 벌었다. 자식들은 힘들게 뭐하러 왔다 갔다 하느냐 하지만 사람이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떻게 사나. 기차타고 가서 물건 내놓는 것이 내 삶의 재미다." - 천계순(88)씨
"지탄리에 홀로 계신 어머니를 돌보러 인천에서 내려왔다. 지탄역에 기차가 서니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정차하지 않으면 옥천역이나 이원역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들어와야 했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김기숙(70)씨
상답을 팔아 세운 간이역
역이 생기기 전, 지탄리는 외딴 섬처럼 교통이 불편했다. 읍내라도 나가려면 나룻배를 타고 금강을 건너거나 소를 타고 험한 흙길을 지나야 했다. 애써 농사지은 수박, 마를 가지고 이동하려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지 같은 마을이었지만 학교에 갈 아이들은 많았다. 지탄리 학생들은 매일같이 불편한 통학 길을 가야 할 형편이었다.
당시 지탄리에서 가장 부유했던 '박인보' 어른은 이런 상황이 안타까웠다. 그의 며느리인 송인순(95)씨는 과거 풍족했던 풍경을 회상했다.
"기와집, 양철 대문에, 밥상에는 늘 흰 쌀밥이 올랐지. 상답(上畓)이 시아버지 소유였어." 송인순씨가 기억하기에 시아버지인 박인보 어른은 언변이 능하고 군의원, 면의원을 맡는 등 마을 행사에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지탄리에 간이역을 세우고자 했다.
"그때 교통부 사람들 만나러 서울엘 간다구 양복을 두 벌 맞추셨어. 큰어머니가 넥타이를 매주시던 모습이 기억이 나. 간이역 세운다고 돈도 많이 들었어. 지탄, 포동, 백지, 구탄, 장동, 원동리 6개 부락에서 기금을 모으기도 했는데 그거로도 부족했던 모양이야. 결국 상답 천 평을 팔았어. 시아버님이 8남매를 두었는데 지탄역 덕분에 다 학교 잘 다녔지. 이원으루, 옥천으루, 대전으루. 아유, (열차 이용하는) 학생이 그렇게 많을 수가 없었어."
기금을 모으고 상답과 바꿀 만큼, 박인보 어른과 지탄리 마을 사람들에게 학교 다니는 일은 중요했다. 이들의 노력으로 지탄역은 1960년 5월 16일, 문을 열었다.
지탄리 사람들은 여전히 지탄역이 문 열던 날을 기억한다. 박충훈(86)씨가 기억하기에 초기 역 건물은 "멋들어진 모양은 아니고 창고같은 모양새"였지만 마을에 간이역이 생긴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들떴다. 돼지를 두 마리 잡고 집마다 막걸리를 담갔다. 술을 거르는 데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두 동원될 정도였다. 7개 마을에서 온 사람들이 멍석을 깔고 한바탕 잔치를 즐겼더랬다.
지탄역은 빼곡한 통학생들과 이들의 부모가 정성으로 길러낸 농작물을 밤낮으로 품고 또 내보냈다. 지탄역을 향하는 발길은 점점 늘어나 하루 열차 이용객이 500명이 넘기에 이르렀다. 이에 개역 5년 후인 1965년 12월 1일, 지탄역은 배치간이역(직원을 배치하고 여객 또는 화물을 취급하는 역)으로 승격됐다.
큰 사고가 나던 날
학생들의 꿈과 희망이 부풀어가던 때, 지탄역에서 큰 사고가 났다. 멈춰 있던 상행 완행열차를 하행 특급열차가 들이받은 것. 1977년 7월 24일, 오전 10시 45분경의 일이었다. 당시 사고로 승객 18명이 숨지고 백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송인순씨는 사고가 있던 날, 큰며느리가 출산했다는 소식을 듣고 대전행 열차를 타기 위해 지탄역을 찾았다가 현장을 목격했다. "큰며느리가 애기를 낳았대잖아. 대전성모병원 가려고 그랬지. 암만 안 볼래두 (시신이) 다 보이잖아. 열차 칸 사이에 서 있던 아가씨가 끼어가지구 뾰족구두만 보이는 거야. 사람들은 막 소리 지르고..."
과거 당국은 사고 원인을 특급열차 기관사의 운전부주의로 발표했지만 1977년 7월 25일자 <중앙일보> 기사에 따르면 기관사는 "이원역을 지나 지탄 간이역으로 들어갈 때 자동폐쇄신호기에 푸른 등이 켜 있어 마음 놓고 진입했다. 열차가 보여 급제동장치를 작동했지만 이미 늦었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기사에서 "양손의 엄지만 남기고 손가락 8개를 모두 잘린 채 끝까지 작동시킨 기관사에게 사고 책임을 모두 미루는 것은 억울하다"고 토로했다.
때가 더운 여름이었기에 승강구에 매달려 가는 이들이 많았던 것도 사망자가 많은 이유였다.
사고 이후로 지탄역은 시름시름 병들어가는 듯했다. 교복 입던 학생들은 철새처럼 도시로 떠나갔고 마을버스가 개통돼 역을 찾는 이들이 줄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7년 6월 1일, 지탄역은 사망 선고를 받았다.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게 된 것이었다.
'무정차역'이 된 지탄역이지만 지탄리에는 여전히 기차를 필요로 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이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농작물을 키워 시장에 내놓는 이들이다. 시내버스가 있다고는 하지만 기차만큼 편리할 리 없었다. 게다가 버스로 대전역 중앙시장에 나가는 일은 거의 포기해야 했다.
지탄리 주민들은 여기에 주저앉지 않고 자신들의 필요를 외쳤다. 이장을 중심으로 주민서명운동을 벌이고 국회의원들을 찾아가 사정했다.
주민들의 노력 끝에 2년 후인 2009년 5월 1일, 지탄역은 다시 살아났다. 2009년 3월 20일자 <옥천신문> 기사는 옥천군과 경북남부지사가 군청 상황실에서 '지탄역 여객열차 정차를 위한 업무 협약식'을 열고 운영재개를 논의했다고 말한다. 기사에 인용된 한용택 군수의 말에 따르면, 폐역된 간이역이 되살아난 것은 전국에서 처음 있는 사례였다.
명예역장이 생기다
이후 지탄역에는 두 명의 명예역장이 임명됐다. 포동리 이장 이용환씨와 경향신문 대전 주재 윤희일 기자였다. ('명예역장제'는 무배치간이역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고 효율적인 역사 관리를 위해 코레일이 2009년부터 시행한 제도다. 명예역장 대상자는 일반인 모두이지만 철도동호회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사람, 해당역 소재지 마을 주민, 퇴직 철도직원을 우대한다. 선발된 명예역장에게는 역장 제복과 신분증, 명함 등이 제공되고 이들은 무보수로 역장의 기본 임무를 수행한다.)
코레일에서 주최한 2012년 전국 간이역 위탁 운영 국민제안공모전에서 윤희일 명예역장은 다양한 지탄역 활성화 방안 아이디어를 내 우수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는 지탄역을 전국 무인역을 홍보하는 박물관으로 활용할 것, 일본 간이역과 자매결연을 맺어 기차여행 마니아들의 교류 장소로 삼을 것, '만화'를 테마로 외부 벽면을 꾸밀 것 등의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이용환씨에 이어 명예역장으로 임명된 포동리 이흥구 이장 또한 지탄역 주변의 철도공사 소유의 땅을 철도공사 직원과 가족들을 위한 주말농장으로 활용하자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중 일본 간이역과 자매결연을 맺자는 방안은 실제로 이루어져 2012년 8월, 지탄역은 일본 돗토리현 하야부사역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으로 되살아나는 듯했던 지탄역은 명예역장 자리가 공석으로 남으면서 갈 길을 잃었다.
2019년 5월, 따뜻한 봄햇살과 함께 지탄역은 새로운 명예역장을 맞이했다. 10여 년 전, 목사직을 정년 퇴임하고 지탄리에서 살고 있는 이신길(81)씨다. 그는 "집 마당 앞에 서면 지탄역과 금강 풍경이 바로 내려다보인다"고 말한다.
"저 멀리 잘생긴 산이 지키고 섰고 KTX, 완행열차가 나란히 금강다리를 지나는... 이런 역은 전국 어디에도 없어."
지탄역 자랑부터 하는 이신길 명예역장이다. 지탄리에 거주하며 이곳에 대해 글을 쓴 것이 그가 명예역장으로 임명되는 계기가 됐다. 당시 그의 글에는 지탄리에서의 생활상, 그리고 방치돼 있던 지탄역에 대한 건의사항이 쓰여 있었다. 여전히 역을 이용하는 이들이 있는데 비해 관리가 제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내용이었다. 훗날 알게 됐지만 코레일 대전·충남본부장이 그 글을 눈여겨 보았다고.
어느 날 코레일 직원 두 사람이 지탄역 명예역장이 되어달라며 그를 찾아왔다. 처음에는 "팔십 나이에 어떻게 역장 역할을 하겠느냐"며 정중히 거절했으나 결국 받아들였다.
하루 두 번, 그는 제복을 입고 기차를 맞이한다
2019년 5월 23일, 명예역장 위촉식에서의 일을 그는 생생히 기억한다.
"위촉식이래서 간단할 줄 알았는데 대전역장, 영동역장, 본부장에 사람들이 많이 왔대. 꽃다발에 위촉장에 묵념까지, 정식으로 하더라고. 그때 인사말을 준비해오라고 해서, 준비한 말을 했어요. '우리 할아버지가 일제시대 때 철도 보선 일을 하셨다. 힘들게 평생을 곡괭이질하면서 철도를 놓고 이제는 돌아가셨다. 장손인 내가 당신이 평생 해보지 못한 역장을 하게 됐으니, 우리 할아버지가 천국에서 얼마나 기뻐하시겠느냐.' 이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막 박수를 쳐."
명예역장이 된 이후, 그는 매일 오전 7시 21분, 오후 1시 12분 두 차례 서는 기차를 맞이한다. 아침이면 1시간 일찍 역사에 나와 역장 제복을 입고 열차를 기다린다. 그가 오는 열차에 손을 흔들면 기관사도 손을 들어 반갑게 인사한다.
"처음에는 내가 두 손을 흔들면서 반갑다고 인사를 했어요. 나중에 한 기관사가 이야기하는데, 두 손을 흔들면 기차를 멈추라는 뜻이라는 거야. 아무리 반가워도 한 손으로만 부탁드린다고. 하하."
명예역장이 된 이후, 그는 행복한 기억이 참 많다고 말한다. 지금은 코로나19 영향으로 하지 못하고 있지만, 지탄역을 이용하는 주민들을 위해 그는 직접 집까지 차로 바래다주기도 했다. 역을 잘못 알고 내린 외국인에게 '간이역 투어'를 해준 일도 있다고. "나는 재미있어서 하는 일인데 다들 너무 좋아하니까, 막 엔돌핀이 돌고 그렇지요."
지탄역 앞에 태극기·무사고기·코레일기가 휘날리고, 방치돼 있던 탓에 우거졌던 나무가 정돈되고, 4번 국도에 지탄역 도로표시판이 생긴 것도 그가 역장이 된 이후에 달라진 것들이다. 최근에는 지탄역 내외에 무선 인터넷도 설치됐다. 이렇다 보니 주변역에서 부러워할 정도다.
명예역장 이신길씨의 소망은 마지막까지 지탄역을 찾는 이들을 기쁨으로 맞이하고 좋은 인상을 남기는 것이다. 5대째 목회자 가정을 이어가는 원로 목사로서 그들이 신을 알았으면 하는 것 또한 그의 소원이다.
1960년에 태어난 지탄역은 지탄리 주민들에게 '희망'과 같은 존재다. 지탄역 덕분에 주민들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 이들은 시장으로, 학교로 향하며 내일을 꿈꿨다. 작은 시골 마을이지만 우리에게도 꿈이 있다고 주민들은 외쳤다.
이들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성장한 지탄역이 어느덧, 환갑을 맞았다.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다. 지탄역은, 또다시 꿈을 꾼다. 해질 무렵, 햇빛을 받아 지탄역이 반짝인다. 또 다른 내일을 준비하는 것만 같다.
[지탄역 정보]
주소 : 충북 옥천군 이원면 지탄1길 28(지탄리 28)
연락처 : 1544-7788
소속지사 : 대전충남본부
노선 : 경부선
여객취급 열차 : 무궁화호
열차정차 횟수 : 여객열차 2회
월간 옥이네 2020년 12월호(통권 42호)
글·사진 한수진
→ 이 기사가 실린 월간 옥이네 12월호 구입하기 (https://smartstore.naver.com/monthlyoki)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월간 옥이네 12월호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