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서 현금이 가장 많은 사람은 딸아이였다. 따로 통장을 만들어준다고 해도 듣질 않았다. 지갑에 가득 찬 현금을 보면 뭐가 그리 즐겁고 행복한 건지, 한 달 용돈 1만5000원을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서 지갑을 복주머니처럼 빵빵하게 모셔놓고 살았다. 거의 금고 수준이었다.
딸아이에게 용돈을 준 게 초등학교 4, 5학년 때부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딸아이의 첫 용돈은 5000원이었고, 해마다 조금씩 올려줘서 작년에는 한 달에 1만5000원(현재는 2만 원)을 받았다. 열세네 살 다른 아이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여기저기 다니며 돈을 쓰는 소비 타입이 아니어서 늘 용돈의 70퍼센트 이상을 남겼고, 어떤 달에는 용돈을 아예 쓰지 않는 달도 있었다.
어느 날인가부터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용돈이 40만 원을 넘었고, 늘 돈으로 가득 채워진 지갑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웃는 딸아이를 보는 날이 많았다. 물론 매달 받는 용돈만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채울 수는 없었고, 가끔씩 집에 오는 처남이나, 애들 고모, 이모의 지갑에서 나온 돈들로 지갑을 불려 갔다.
1년에 두 번 명절 때 가는 시골 할머니, 할아버지 집에서도 이 용돈 벌이는 꾸준했다. 이렇게 딸아이 지갑에 쌓인 돈 때문에 딸아이도 즐겁고, 행복했지만 아내도 혜택을 보는 수혜자 중 하나였다. 아내는 급하게 돈이 필요할 때나 현금을 찾아야 하는데 외출이 귀찮을 때면 항상 딸아이를 찾았다.
"지수야 엄마 돈 좀 빌려줘."
"얼마?"
"응, 3만 원만 빌려줘. 내가 주말에 돈 찾아서 줄게."
"알았어. 근데 지난번에 2만 원 빌려간 것도 안 줬는데 기억하지?"
"2만 원? 1만 원 아닌가? 제대로 셈하는 거 맞아?"
"맞다니까. 엄마 자꾸 이런 식이면 돈 안 빌려줄 거야."
"이구, 알았어. 내가 궁하니까 쓴다. 그러게 어디 적어놓으라니까."
매번 돈을 빌리는 아내나, 돈을 빌려주는 딸아이 둘 다 이런 식이다. 돈 빌려준 사람 말이 맞는지, 돈을 빌린 사람 말이 맞는지 알 수가 없지만 부모, 자식 간이라 큰 소리 안 나고 이렇게 지나가는 일이 부지기수다. 남이었으면 아마 돈 1만 원 때문에 큰소리가 날만한 상황이다.
어쨌든 늘 체크카드, 신용카드로 생활하는 아내나 나에겐 늘 딸아이가 지갑에 부족한 현금을 채워주는 해결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 덕에 급전(?)이 필요할 때도 이렇게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물론 아들도 1년 전에 만든 통장과 체크카드로 용돈을 쓰기 때문에 지갑에는 1000원짜리 한 장이 없는 날이 많아서 우리 집은 늘 딸아이만 현금을 갖고 있는 날이 많았다.
이렇게 딸아이의 지갑에 차곡차곡 쌓인 돈은 어느덧 50만 원을 넘었다. 지갑에 현금이 많아지자 아내는 쓰지도 않을 돈 통장을 만들어줄 테니 은행에 넣으라고 설득은 했지만 딸아이는 항상 현금이 지갑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다고 얘기하며 아내의 제안을 거절했다.
"지수야, 현금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으면 뭐해. 통장에 넣던가."
"싫어요. 난 지갑에 40만 원 이상 있어야 마음이 편해져."
"그게 무슨 이상한 심보야. 아니면 엄마가 주식 통장 개설해 줄 테니 주식 투자를 하던가. 묵히면 뭐해. 돈도 일을 시켜야지."
"엄마도 주식해서 돈을 번 것도 아닌데. 난 그냥 지갑에 돈 넣어두고 보는 게 좋아."
"어이구~, 그래 지수 네가 우리 집 백수르다. 백수르. 만수르는 아니더라도."
그렇게 용돈을 지갑에 채워놓고 쓰던 딸아이에게 통장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다. 용돈을 받는 날마다 돈을 세는 게 딸아이의 루틴이었다. 사건 발생 일에도 용돈을 받고 지갑에서 돈을 모두 꺼낸 뒤 똑같이 돈을 셌고, 돈을 모두 센 딸아이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여러 차례 돈을 반복해서 세기 시작했다.
아내는 이런 딸아이의 행동이 이상해 이유를 물었고, 딸아이는 5만 원이 빈다고 말했다. 지난달에 셌던 돈에서 5만 원이나 빈다고 했으니 아내도, 나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딸아이는 처음에는 아내가 돈을 빌려갔다가 안 준 게 있다거나, 지난번 주문한 초밥값을 내가 낸 건가 하며 스스로를 의심했다. 급기야 독서실 간 아들까지 의심하면서 사라진 돈의 행방을 찾았다. 의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냥 두면 자신이 셈을 잘못한 사실일 수도 있는 일에 모든 가족을 수사선상에 놓고 정신 건강에도 좋지 않은 상태가 길어질 것 같았다. 아내는 특단의 조치로 더 이상 의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말했고, 바로 다음날 통장을 만들자고 딸아이를 설득했다.
딸아이는 못내 아쉬웠지만 큰돈(?)을 분실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어쩔 수 없이 아내의 뜻을 따랐다. 그렇게 설득한 끝에 올해 1월에 딸아이는 통장을 개설했고, 처음에는 통장 만들기를 주저했던 딸아이가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의 쌓인 돈을 확인하기 시작하면서 실물 돈을 보는 기쁨에서 온라인 상의 숫자가 늘어나는 즐거움을 비로소 알게 됐다.
이제는 작은 돈만 생겨도 통장에 돈을 넣으려는 바람에 용돈도 아예 온라인으로 뱅킹해서 넣어주게 되었다. 그 바람에 내가 누릴 수 있는 한 가지 즐거움이 사라져 버렸다.
작년만 해도 애들 용돈 날이면 지갑에 현금을 챙겨가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촤악~' 하고 현금을 꺼내 애들에게 주고는 했었다. 하지만 이젠 아쉽게도 용돈 주는 날이면 스마트폰으로 용돈을 이체하고 톡이나, 몇 마디 말로 생색을 낼 수밖에 없어졌다.
덕분에 우리 집에는 이제 더 이상 현금 부자가 없다. 다만 통장에 쌓이는 돈을 즐기는 딸아이만 있을 뿐. 딸아이는 오늘도 스마트폰의 앱을 통해 자신의 온라인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며 즐거워한다.
아내와 난 아이들을 키우며 경제적인 자립심을 어릴 때부터 많이 가르쳤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의 세뱃돈이나 용돈은 아이들 이름으로 따로 통장을 만들어 관리하는 건 기본이었고, 꼭 필요해서 구매하는 것 이외에는 아이들이 자신의 용돈이나 저축해 놓은 돈에서 구매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또래 아이들에 비해 많이 마른 체형인 딸아이의 성장을 위한 한약과 수험생이라 많이 피곤해하는 아들의 한약도 아이들이 저축해 놓은 통장에서 절반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아내가 분담하는 식이었다. 물론 일방적으로 진행한 게 아니라, 아이들과 논의해서 결정한 일이었다.
아이들 나름 불만이야 있겠지만 우리 집은 꾸준히 이런 방식을 고수했고, 아이들도 그런 우리의 의견을 잘 따르고 지켜주는 편이다. 물론 맘에 드는 옷이나 신발도 아내나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생활비에서 지출하지만, 굳이 쓰지 않아도 되는 지출은 필요한 구성원들 주머니에서 나가는 게 원칙이다. 그래서 아이들도 쓸데없는 소비는 하지 않는 편이다.
예전엔 딸아이가 자신의 용돈으로 가끔은 가족들 밥도 사곤 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경제적 개념이 잘못 인식되었는지, 아니면 쓰는 재미보다 모으는 재미를 알게 된 건지 모르지만 좀처럼 모아놓은 돈을 쓰지 않는다.
너무 잘 가르쳤는지 헷갈리기도 하지만 통장에 차곡차곡 돈을 쌓아놓고 돈이 없다고 하는 딸아이를 보며 요즘은 어떻게 돈을 잘 쓰는 법을 어떻게 알려줄까 고민한다. 이런 고민이 차라리 낫다는 생각도 든다.
아껴 쓰라는 말보다는 돈 좀 쓰라는 말이 얘길 꺼내는 나로서도 마음이 편하다. 그래도 용돈 주는 날 딸아이에게 용돈을 보낼 때면 가끔 내 통장에 돈보다 더 많은 돈이 쌓여있는 딸아이의 통장이 부럽긴 하다.
'이보시오 따님. 그래도 스마트한 소비도 필요하니 적당히 쓰고 사시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주에 연어 초밥 한 번 쏴~'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