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내 생일에는 미역국 끓이지 말아요."
우리 집에는 수험생이 산다. 작년까지만 해도 아들 눈치를 크게 보지 않고 살았지만 올해는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이의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삶에서 큰 분기점이 될 수 있는 대학 입학을 위해 마지막 전력투구를 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렇다고 우리 아들이 전국 상위 몇 퍼센트도, 학교에서 최상위 석차도 아니지만 그래도 열심히 공부하니 올 한 해는 어찌 되었든 아이의 눈치를 자발적으로 보고 있는 편이다.
이제 곧 아들의 중간고사 기간이다. 아내는 예년에 비해 아들이 시험 기간에 너무 밝다고 오히려 걱정이다. 다른 집 아이들은 시험 기간이면 의기소침해지고, 기분이 다운되기도 한다고 하는데. 우리 아들도 작년까지는 그랬다. 특히 시험 주간이 다가오면 떨어진 체력 탓에 많이 피곤해하는 것도 걱정인데 아들은 한술 더 떠 예민해지기까지 했으니 옆에서 보는 아내와 난 시험 주간에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왠지 분위기가 다르다. 우린 아들이 평상시보다 잘 웃고, 말도 많아진 것 같아서 되려 걱정이다. 우리가 이런 걱정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게 아들은 작년까지만 해도 평상시에는 우리와 대화도 많이 하고, 잘 웃는 항상 밝은 모습이지만 시험 기간만 되면 무척 예민하게 구는 편이었다.
아내는 늘 시험 기간이면 아이의 조금 억지스러운 고집을 받아줘야 했고, 그러다 아들이 툭툭 내뱉는 감정 가시에 종종 찔리고는 했었다. 시험 기간만 되면 날카로운 바늘처럼 시험 전부터 늘 날을 세웠고, 뭔가 고민에 쌓여있는 얼굴에, 하루하루 시험 결과에 따라 감정 변화가 너무 차이가 났었다.
그랬던 아들이 불과 시험 1~2주밖에 남지 않은 상황임에도 다른 모습이다. 여전히 몸은 피곤해했지만 우리의 기분 탓인지 예년의 비장함이나, 예민한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려워졌다. 오히려 거실에 나와서 잠시 쉴 때면 밝은 표정으로 평소 이상으로 말을 많이 했고, TV 예능 프로그램을 볼 때면 박장대소하며 웃는 아들을 종종 보곤 했다. 이런 아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아내는 오히려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더 조마조마하다고 한다.
이 일이 웃어야 할 일인지, 아닌지는 판단이 서지 않지만 고등학교 저학년 때처럼 여유가 있는 학창 시기를 보내는 것이 아닌 대학 입시를 코 앞에 둔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의 일이라 단순하게 웃어넘길 수 없는 게 부모 마음인 것 같다.
하지만 아들도 이제 열 하고도 아홉이다. 스스로 자신이 표현하는 감정이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할 나이다. 밤늦은 시간까지 독서실에서 공부하다 들어오는 아들이 안쓰러워 아내는 졸린 눈을 비벼가며, 때로는 거실 소파에 쓰러져 자기도 했다. 몸이 너무 피곤하거나, 아플 때를 빼고는 늘 아들을 기다리는 아내를 아들도 걱정하고, 감사해하는 눈치다.
아들이 철이 들어가는 건지, 아니면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먹은 건지 알 수 없지만 우린 아들의 변화를 조금은 긍정적으로 바라보기로 했다. 비쩍 마른 몸이라도 이젠 아빠인 나보다 넓어진 아들의 어깨가 오늘따라 든든해 보인다.
결국은 고3의 승리다
얼마 안 있으면 내 생일이다. 지난 4월 초 저녁 식사 때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4월 말에 있을 내 생일에 식사를 어떻게, 무엇을 먹을지 등에 대한 얘기였다.
"철수씨, 이번 생일에는 언제 식사할까요?"
"민수가 내 생일 다음 주가 시험이라 식사하는 시간도 아까워할 테니 간단하게 집에서 하죠."
"아빠 난 밥 아무 곳에서 먹어도 괜찮아. 아빠 드시고 싶은 걸로 골라요."
"아냐, 다음에 시험 끝나고 맛있는 거 사 먹고, 생일 낀 주말에는 그냥 집에서 먹어요. 영희씨."
"그렇게 해요. 시험 전이니까 아들 때문에 미역국 끓이기도 미안하네요."
"그래요. 영희씨. 내년 생일에 끓여 먹으면 되죠. 민수도 대답 안 하는 걸 보니 찜찜한가 보네요. 미역국은 끓이지 않는 걸로 해요."
결국 아들 눈치를 또 봤다. 아들은 별말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미역국을 끓이라는 얘기도 없어서 먹고는 싶지만 괜한 징크스를 만들기 싫어서 올해는 미역국을 패스하기로 했다.
내 생일뿐만 아니라 우리 집에서 올 한 해는 미역국 먹기는 어려울 듯하다. 결국은 고3의 승리다. 그나저나 녀석 시험 며칠 안 남았더니 예전의 예민함이 다시 도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싶지만, 무사히 시험 치르기를 바랄 수밖에.
'아들 입시만 끝나 봐. 아빠랑 둘만의 여행도 각오해야 할 거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제 개인 브런치에 함께 연재됩니다. 이 기사에 나오는 이름은 가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