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외로워도 될 때
외로웠던 적이 없다. 정확히 말하면 지금껏 외로울 틈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존재라지만 외로움도 시간의 여유가 필요한 일인지 모른다. 시간이 없고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외로움도 내게는 낯선 정서에 가까웠다.
가고 싶었던 학교에 가지 못하고 바로 취직이 되었다. 7년의 직장 생활을 끝으로 결혼을 하면서 나고 자랐던 지역을 떠나 낯선 고장에서 아이를 키우며 20여 년을 살았다. 전전긍긍하며 살아낸 시간이었다.
아는 사람이라고는 남편밖에 없는 곳에서 정신없이 연년생 아이 둘을 키우고 나니 5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갔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무렵 나를 돌아보았다. 뭔가 하고 싶었다. 비로소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짬이 났다.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는 경력단절이라는 말이 일반화되지 않았을 때였다. 열심히 노력하면 주어지는 일이 생기던 시절이었다.
번듯한 직장을 나가는 것은 아니었으나 하는 일의 만족도가 컸다. 독서지도사는 아이를 키우며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해보고 싶었던 일이니 열심히 했고 오래 했다.
가끔 이것이 외로움일까? 싶게 나를 에워싸는 흐릿한 장막 같은 순간이 있었으나 짐짓 외면했다. 해야 할 일이 늘 기다렸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많았다. 내게 외로움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넉넉하지 않은 집의 맏이는 늘 부모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며 살았다. 부모가 집안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 아니, 말하지 않아도, 맏이의 정서는 곧 부모님의 정서였다. 시키지 않았는데 알아서 척척 맏이 역할을 하는 나를 보는 일이 잦았다. 그렇게 형성된 맏이 콤플렉스는 사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성실함이 내 족쇄가 되기도 했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우스갯소리로 종교가 없는 내가 '혹시 목사 사모님 아니냐'는 말을 여러 번 들으며 살았다. 스스로 만들고 가둔 동굴이었고, 사는 일에 골몰하다 보니 외로움도 나를 비켜 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외로워할 방법조차 모르고 산 것 같다. 다만, 생득적으로 몹시 허할 때가 있었다. 그것이 사춘기 때 형성된, 갖지 못하고 하지 못한 것에 대한 결핍 같은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음악을 들었다. 20대부터 들었고, 매일은 아니지만 지금도 챙겨서 듣는 음악 프로인데 만약 내게 이 시간, 저녁 무렵의 두 시간이 없었다면 삶이 단조롭고 거칠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아하는 음악 프로그램이다.
KBS제 1FM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방송은 곁에 있어 준 오랜 벗과 같은 존재였다. 세상의 모든 나라 음악이 흘러나오면 귀 기울여 듣고, 눈물도 훔쳤다. 마음에 쏙 들어오는 음악을 들을 때면 살아있다는 실감을 전율하곤 했다.
결혼을 결정할 무렵 이십 대의 거리에서, 신혼 방에 조각만 하게 난 창을 통해 어둠이 내리고 있는 들녘을 보았을 때, 두고 온 고향 피붙이들 그리울 때, 아기를 등에 업고 서성거리며 음악을 실컷 듣고 나면 세상 구석구석을 여행하고 온 듯 나른한 행복에 빠지곤 했다. 쓸쓸했던 마음에 충만함이 차올랐다.
마치 한 권의 책을 깊게 읽은 것처럼, 이해할 수 없으나 한 폭의 그림을 오래 들여다본 것처럼, 말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만진 듯, 나와 마주하곤 했다. 그렇다면 그곳, 음악을 들으며 보낸 시간 속에 내 외로움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일까?
결혼 이후로 소식을 몰라 애타던 끝에 여러 경로를 거쳐 한 친구를 찾았다. 친구와 마주 앉아 얘기 나누다가 그 음악방송을 아직도 즐겨 듣고 있다는 말에 우리의 삼십 년 시간을 훅 넘어서 예전과 같은 감정을 공유했다. 나와 친구는 음악을 통해 서로 같은 호흡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음악을 들으며 나는 뭔가를 하고 있었다. 바로 글을 쓰고 있었고, 가슴 저 밑 창고에서 숨을 고르고 있던 그림을 꺼냈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일상에 나를 맞추고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이것은 곧 음악을 듣는 동안 알게 모르게 형성된 외로움이 내게 건넨 보상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살아온 일련의 모든 행위가 곧 외로움의 한 형태는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살기 위해 틈틈이 나만의 시간을 기꺼이 마련했고, 그 시간을 가꾸어 왔기 때문이다. 즉, 외로움인 줄 모르고 외로움을 가꾸어 온 것이라고나 할까?
오롯이 나만을 위한 외로움을 느끼며
이쯤에서 나도 본격적으로 외로움이란 걸 살아보고 싶다. 내 삶에 외로움이란 것을 들이고 싶다. 마음에 들지 않는 타인에게서 오는 외로움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을 위한 외로움 말이다.
얼마 전부터 딸이 권하는 게 있다. 절 체험이나, 다른 도시에서 한 달 살기가 추세라고, 엄마도 한번 해보라는 제안이다. 다 도와준다는데 사실 조금 자신이 없다. 뭐가 그렇게 걸리는 게 많은지 모르겠다. 사실 그곳이 바로 내 외로움을 성장시키는 지점 같은데, 현실에 발목 잡혀 쉽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한다.
이제 좀 외로워해도 되는 게 아닌가 싶다. 내 오랜 동굴을 벗어나 "외로움이 나를 이렇게 성장시키더군요!" 하며 외로움에 맞선 당당한 사람으로 살 수 있다면 나머지 내 삶을 기꺼이 외로움에 맡겨 볼 테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