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
어느 건축물이든 타고난 운명이 있는 모양이다. 설계되어 지어지고 그리고 이용되다 쓸모가 다하기까지, 과정에서 하나의 역사를 새기기 때문이다. 덕수궁 서쪽에 정남향으로 서 있는 집이 그렇다. 집은 여느 전각을 능가하는 규모로, 편전과 침전 겸용의 황제 위상에 걸맞게 구상된다. 오로지 '돌(石)로만 지어진(造) 집(殿)'이다.
집을 '돌로만 지었다'는 것은 혁명적인 변화를 함축한다. 가장 먼저 온돌 위주 생활양식을 버렸다는 점이다. 이는 전혀 다른 생활양태로 변화를 뜻하는 난방 체계를 도입했다는 의미다. 소위 '입식 생활'이다. 잠자리는 침대다. 방바닥을 데우지 않고, 배관을 타고 들어온 따뜻한 공기에 난방을 의존한다. 이는 어느 한곳에서 더운물이나 증기를 생산하는 시설, 즉 보일러를 두었다는 것을 뜻한다. 조명은 전기를 사용했다는 다른 의미이기도 하다.
그 다음이 식생활 변화다. 식재료의 관리와 이를 익히고 조리하는 연료 변화가 수반되는, 서구식 주방 설비를 구축했다는 의미다. 또한 건물 내 별도 공간에 목욕실과 위생처리시설을 둔 상·하수도의 도입이다. 주방설비는 물론 원활한 냉난방이 용이한 연료사용과 설비의 발달, 정주(定住)공간에 적정한 처리시설기술이 수반되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층빌딩 발달과 그 궤를 같이 한다.
궁궐에 '돌로 지은 집'이 구상된 것은 고종이 아관(俄館)에 머물던 때로 보인다. 아관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빌딩이다. 서구식 생활 패턴에 충실하게 지어진 집에서의 경험이 이런 구상을 이끌어낸 요인은 아니었을까.
도시가로체계 개선과 탑골공원을 건의한 영국인 '맥리비 브라운'의 발의라 하나, 고종이 처한 상황이나 당시 영국과 러시아 관계 등을 고려해 볼 때 신빙성이 높아 보이지는 않는다. 석조전은 그 탄생 과정에서부터 대한제국이 걸었던 길을 똑같이 걷게 된다.
지난한 탄생 과정
고종은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석조전 건립을 염두에 두었다. 경운궁을 고쳐 환궁하자마자 곧바로 '석조전' 건립에 착수한다. 설계는 영국인 '하딩'이 맡는다. 서구식 궁궐의 위용을 갖춘 건물로, 독립국이자 영세 중립국이며 부강한 근대국가를 지향하겠다는 분명한 의사를 표현한다. 설계에만 꼬박 2년이 소요된다.
정관헌이 지어진 1900년 착공에 들어간다. 기단석은 창의문 근방에서 채석한 하얀 화강석이다. 공사는 심의석(沈宜錫)이 주도하고, 영국인 '카아트맨'이 돕는다. 1901년에 기초공사가 마무리된다.
구본신참(舊本新參)이라 했던가. 고종은 경운궁을 대한제국 정궁으로 삼고자 대대적인 중창에 들어간다. 1902년부터 중화전 등 주요 전각 공사에 박차를 가한다. 그 바람에 석조전 공사는 잠시 뒤로 미뤄진다.
1903년 중층의 중화전을 비롯한 전각들이 완성되어 경운궁이 '황제의 궁'으로 위용을 드러낸다. 그해 9월 석조전 공사가 재개된다. 설계자 하딩이 공사감독을 겸한다. 이듬해 봄 경운궁이 (일본의 소행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화재로 거의 전소되어 버린다. 불탄 궁궐을 다시 지어야 한다. 모든 공력이 여기에 쏠리자, 석조전 건립은 더딜 수밖에 없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주요 뼈대(골조)공사는 1905년 초에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나라는 을사늑약으로 주권을 잃었고, 이듬해 경운궁 전각들이 재건된다. 석조전도 외관을 비롯한 주요 공종이 이때 마무리 된 것으로 추정한다. 이는 1906년 하딩이 공사감독에서 해임되고 영국인 '데이비슨'이 위촉된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나라의 입법·사법·행정이 일본 손아귀에 떨어지고, 황제가 강제 퇴위 당한 1907년에 군대마저 해산되어 버린다. 나라는 껍데기만 남았고,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난다. 실내장식과 난방설비, 위생처리시설 등의 설치를 남겨 놓은 집의 공사가 이런 와중에 순탄했을 리는 없어 보인다. 그해 말에 가까스로 실내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추정한다.
집은 나라가 강점되기 직전인 1910년 6월에 완공된다. 실내장식은 영국 건축기사 '로벨'이, 난방 및 위생처리시설은 영국 '크리톨' 회사가, 내부 장치와 가구비품 등은 '메이플' 회사가 맡는다. 집 앞에 조성한 연못이 딸린 유럽식 정원(침강원(沈降園))은 공사감독 데이비슨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신고전주의 건축양식
집은 그리스·로마의 예술과 건축의 부활·계승이라는 이른바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다. 서양식 구본신참이라 할 만하다. 집은 페디먼트(pediment, 고대 그리스 신전의 박공)을 사용한 그리스 신전을 그 바탕으로 하였다.
단단한 기단 위에 육중한 건물을 세운다. 전면과 양측면은 그리스 신전 박공을 응용하였다. 비례와 대칭, 중심성과 균형 잡힌 구도, 현시적인 장식을 앞세운 엄격한 형식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권위를 앞세워야 하는 궁궐 건축에 꼭 맞는 양식이다.
전면은 네모난 돌기둥 7개씩을 좌우에, 가운데 돌출된 현관 박공지붕을 떠받히는 둥근기둥 6개를 배치했다. 기둥 주두는 이오니아식이다. 언듯 런던 대영박물관의 출입구가 연상된다. 양 측면구성도 기둥 개수만 다르지 전면과 유사하다. 특이하게 1층과 2층에 베란다를 두었다. 이는 소위 콜로니얼(Colonial) 양식이라 부르는 요소로, 출입구 상부에만 적용된 페디먼트와 함께 건축양식이 절충·혼용된 흔적으로 여겨진다.
집은 지층과 지상 2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층은 서비스 공간으로 주방과 보일러실, 위생처리시설 등이 1층은 편전 기능의 접견실과 홀이 배치되어 있다. 1층 현관에 들어서면 2층까지 트인 중앙 홀이 있고, 천장에서 자연채광이 들어온다. 귀빈대기실과 널따란 접견실, 소·대 식당으로 구성되었다. 2층은 오로지 황제와 황후의 사적인 공간이다. 황제와 황후의 침전과 거실, 서재 등 생활시설이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편전과 침전 기능을 수행하도록 설계되었다.
타고난 운명인가
집이 완성되자마자 대한제국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집도 황궁 전각으로서 온전한 기능을 수행해내지 못한다. 1907년 12월 일본에 인질로 끌려간 영친왕이 귀국 때마다 임시숙소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신빙성은 낮아 보인다. 태황제로 물러난 고종도 1919년 정월 승하할 때까지 종종 집무실과 알현실, 때론 귀빈 접대와 만찬을 개최하는 용도로만 사용했을 뿐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덕수궁 곳곳이 변형되거나 주요궁역이 사라진다. 1933년엔 궁궐이 공원으로 개방된다. 석조전 서측에 정동향 새 건물이 들어선다. 1938년 일제가 지은 석조전 별관(서관)이다.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하나 석조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해방때까지 두 건물은 '이왕가 미술관'이었다. 석조전 앞 편평하던 유럽식 정원이 이때 사라진다. 더 깊이 파낸 그 자리에, 물개가 물을 내뿜는 정체불명의 생경한 분수대(연못)가 들어선다. 우리 정원에 있는 연못이 아니다.
본디 우리는 대역 죄인이나 강상(綱常)을 무너뜨린 죄인 집터를 파 연못을 만들어 경계로 삼곤 했다. 궁궐전각 앞을 깊이 파내 물을 뿜는 분수대를 만든 그들의 의도는 과연 무엇일까?
일제강점기 미술관으로 전용되면서부터 석조전은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해방 직후인 1946∼47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장으로 변모한다. 결렬된 회의로 민족은 분단되고, 한국전쟁을 겪고 난 1955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1973년에는 국립현대미술관이다가 1987년부터는 궁중유물전시관이었다.
이런 변모는 내부 장식 등이 훼손되는 원인이었고, 한국전쟁을 거친 후에는 부분적으로 구조적 안정성마저 위협받고 있었다. 이에 원형을 되찾기 위해 2009년 10월 복원을 시작, 2014년 10월 석조전이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우리 앞에 서게 되었다.
이 집을 보면서 혹자는 위압적이라 말한다. 중화전 등 다른 전각을 찍어 누르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근대화의 길을 굳이 이런 곳에서 찾았어야했느냐며 반문한다. 정치체제는 물론 경제와 국방, 의식과 사상의 변화·수용에 더 힘을 쏟았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모두 수긍한다.
하지만 개혁과 변화는 혁명적인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황제는 과감한 생활양태의 변화와 전혀 다른 선진문물의 급진적 수용이라는 길을 이 집에서 찾고자 했다. 석조전은 이런 혁명적 변화와 급진적 수용을 꾀한 상징물이다. 늦었으되 당시로선 가장 시급하고 현명한 길 중 하나였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