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대 중반의 연기 거장 안소니 홉킨스에게 두 번째 남우주연상을 안긴 영화 <더 파더>(The Father). 가난과 어둠의 이미지가 강한 '독거노인'이기보다는 경제적, 문화적, 지적으로 여유로운 노후의 삶을 누리고 있는 것 같은 주인공에게 치매라는 질병이 찾아왔다. 난생 처음 보는 사람이 떡하니 자신의 집에 앉아서 주인공의 사위라고 우긴다.
남자친구와 파리에 가서 살기로 했다는 딸의 말에 어떻게든 이별을 막아보고 싶은데, 며칠 지나자 언제 그랬냐며 말을 바꾼다. 새로 온 간병인은 자신의 일상을 관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손목시계를 훔쳐가서 내쫓아버린다.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진 편안하고 익숙한 일상의 공간과 시간과 사람들이 뒤죽박죽 엉켜버린다.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이고, 저 상대는 누구인가? 당혹, 의혹, 불안, 공포가 일상을 지배한다.
보는 관객들의 입장에서도 뭐가 진실인지 헷갈리는 부분들이 꽤 있는데, 그것은 치매환자가 느끼는 혼란과 맥을 같이 한다. 보통 '벽에 똥칠한다'는 중증 치매에 비한다면, 영화에서 보여주는 주인공의 증상은 심한 게 아닐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파삭 소리를 내며 부서져 내리는 듯한 일상에 무방비인 채로 던져진 자와 그 가족들의 심리가 표정과 말들을 통해 생생하게 전해진다. 안소니 홉킨스는 촬영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고 한다.
강고한 틀을 부수고 타인의 세계로
얼마 전에는 오스트리아 작가인 아르노 가이거의 <유배 중인 나의 왕>을 읽었다. 책을 출간할 당시까지 약 15년 간 치매 환자로 살아가는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작가가 이 책을 쓴 것이 10년쯤 전이고,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면 90대 중반쯤 되었을 것이다.
책 이후의 이야기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뒤져보았더니 책을 쓸 당시 저자와 아버지가 함께한 사진들이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정이 들었는지 꽤 친한 이웃들을 보는 듯 반가웠다. 하지만, 책 이후의 이야기들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누구나 늙고 누구나 치매에 걸릴 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알면서도 내 부모가 치매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설득당하는 데는 많은 에너지와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 치매와 늙음 등에 대해 깊고 따스한 받아들임의 경지(?)에 이른, 주로 책을 통해 접했던 사람들 역시 비슷하게 덜컹거리는 과정들을 겪었고, 어쩌면 지금도 그 과정의 어떤 지점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특별함이라면, 이 이해하기 힘든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결국은 자신의 강고한 틀을 부수고 타인의 세계로 들어가야함을 알아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한 인간으로서의 상대에 대한 애틋함, 슬픔, 연민 등의 감정들을 갖게 된다.
위 책의 저자 역시 갑자기 모든 것을 놓아버린 무기력해 보이는 아버지를 향해, 화를 내고 미워하고 비난하고 빈정거렸다. '제발 정신 좀 바짝 차려라, 제발 아무렇게나 행동하지 말아라'라며 아버지를 다그쳐댔다.
한참이 지나 아버지가 보이는 여러 행동들이 정신 차리라고 소리쳐서 될 일이 아님을, 상상도 못했던 일이 아버지에게 일어났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동안 아버지를 비난하고 교정하려는 데 집중했던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어설픈'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마치 살아있는 듯이 말하는 아버지, 50여 년 전 스스로 짓고 쭉 살아온 자신의 집을 순식간에 잊어버리고 집에 가야겠다는 말을 5분마다 반복하는 아버지, 이런 부모에게 우린 어떤 태도를 보일 수 있을까?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우리들은 사실을 '제대로' 인식시키려는 의지에 불타서 소리를 높이다가 결국 화와 짜증으로 그 시간을 채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이제 저자는 할머니가 돌아가셨음을, 이 집이 당신의 집임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었을까 자문해본다.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아버지는 죽은 이들을 조금씩 살려내면서 죽음에 한발짝 더 다가서는 중이었음을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집에 간다고 할 때, 그 말에 낯설고 불행하게 느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염원이 담겨있음을 몇 년 만에 알아차린다. 진실이냐 허구냐가 아니라 아버지를 안심시킬 수 있는 것일수록 더 좋은 것이며, 이제 아버지가 내 세계로 건너올 수 없으니 내가 아버지에게로 건너가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객관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우리 사회의 저편에서, 자신의 아버지는 여전히 주목할 만한 사람임을 강조한다. 그렇다. 우리 사회는 객관성, 목표지향성 등이 우리의 삶을 압도하는 거의 신적인 지위에 올라 있다.
이렇게 저자의 가족들이 애초에 기대했던 것, 아마도 아버지가 정신을 차리는 것(?)이 무산되었을 때, 그제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그것은 아버지의 현재를 받아들이고, 그가 살아가는 세상을 궁금해 할 수 있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리라.
저자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곳에서 유난히 농밀해지는 행복'이라고 당시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저자와 아버지는 뺨을 손으로 만지고, 어깨를 걸고 손을 잡으며,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스킨쉽을 나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내 어머니에 대해, 나에 대해,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더듬더듬 생각해본다. 우리의 늙어감에 대해 아니 좀 더 정확히는 늙어가는 우리네 삶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천천히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여전히 어설프고 쉽지 않다. 어머니에 대한 나의 기대치, '~해야 한다'는 나의 사고의 틀 때문에 화와 짜증이 벌컥 일어나기도 하고, 그런 나를 곱씹어보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기도 한다.
12화의 글에도 썼듯이 어머니와 함께 하는 일상의 삶, 영화, 책 등 내가 접할 수 있는 것들 중에는 훌륭한 배움의 교재가 되어주는 것들이 꽤 많다. 엄청 유명한 작가의 책을 읽고 나서 "역시 내 취향은 아니네~"라며 책을 덮게 되는 경우도 물론 있다.
앞에 소개했던 책 <유배 중인 나의 왕>은 가능하다면,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해보고 싶기도 하다. 이 글은 그 책 전체를 소개하는 글이 아니라서 너무 단편적으로만 이야기한 듯하다. 우리네 삶은 한 가지로 이야기하기에는 너무도 다양한 총천연색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삶은 그래서 살만한 것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