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불신의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권력으로의 편향된 시각과 부당한 공권력으로부터 진실의 편에 서지 않은 언론의 과거가 큰 이유 중 하나이지 않을까 합니다. 국가폭력피해자들의 과거를 통해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진실을 추구하고 공정한 보도를 위해 노력했는지 돌아보고자 합니다.[편집자말] |
지난 2021년 10월 19일 재일교포 김병진씨는 SNS를 통해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로부터 조사개시 결정을 받았다는 소식을 알렸다. 김병진씨는 이미 1차 진화위에도 인권침해 조사 신청을 낸 적이 있었다. 1기 진화위는 인권침해를 인정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적절한 조처를 취하라'는 권고(2009년 12월 4일 결정)를 한 바 있다.
그러나 1기 진화위 결정에도 현재까지 "국가로부터 아무런 소식도 없는 현실"에 김병진씨는 다시금 2차 진화위에 인권침해를 신청하게 되었다고 한다. 특히 이번에는 본인 뿐 아니라 "짓밟힌 나(김병진)와 가족의 고초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보안사의 잘못을 인정하고 국가로서 책임을 져 달라는 취지"로 신청했다. ( [관련기사]
매질·고문... 조국서 '간첩' 몰린 한 재일동포의 사연 http://omn.kr/1r67h )
보안사는 1983년 10월 19일 "학원소요 및 일부 종교단체 뒤에는 북괴의 마수가 도사리고 있다"면서 김병진 등이 상부 간첩이라는 서성수에게 포섭된 뒤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 위장 가입하여 1980년 3월 한국에 유학차 와 대학원에 다니면서 10.26 사태 이후의 혼란기를 틈타 제적 학생과 문제 학생 및 '도시산업선교회'계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시위를 선동하는 등 사회 혼란을 획책했다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보안사는 불구속 상태의 김병진을 구속자 명단에 포함하고 이름, 주소, 소속 학교와 학과, 사진과 주요 피의 사실을 언론에 공표했다. 발표 당일 20:00부터 20:35까지 KBS 2TV에서는 '조총련의 붉은 마수'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었고, 같은 날 20:20부터 22:55까지 MBC TV에서는 '조총련의 검은 그림자'라는 특집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당시 언론 보도에 대해 김병진씨는 1기 진화위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서성수 일당 재일교포 간첩사건으로 보안사에서 언론에 발표하였는데 나는 그 사건에 하부 조직원으로 되어 있었다. 그때 MBC, KBS 등 방송사 기자들이 와서 서빙고 분실 뒷마당에서 보안사 수사관 김용O(당시 보안사 대공처 수사관 수사2계장)의 지시로 강제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인터뷰 내용은 김용O이가 이렇게, 저렇게 얘기하라는 것을 그대로 말했다. 학생 데모를 선동하고 간첩 혐의를 시인하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006. 8. 23 진화위)
김병진씨의 아내 강영미씨도 진화위 조사에서 이렇게 진술했다.
1983. 10. 19. KBS 10시 뉴스에 남편의 얼굴과 여권에 동반자로 붙여있던 아들의 얼굴이 '재일교포 간첩 일망타진'이라는 제목의 뉴스에 나왔다. 남편과 아들의 사진이 얼굴에 비춰져 전 그 즉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여권에 동반자 사진으로 아이가 있었기 때문에 아이도 같이 방송되었던 것 같다. 김용O에게 전화로 항의를 하자 김용O이 '사람들은 일주일이면 잊어버리니 신경 쓰지 말라. 형식적인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을 하였다. 그날 이후로 우리 가족은 사회로부터 더욱 위축되었으며, 남편의 보안사 출입으로 인해 변변한 수입도 없어서 가정살림 또한 점점 기울기 시작하였다. (2008. 7. 15 진화위)
이 사건에 연루되어 참고인으로 보안사의 조사를 받았던 백아무개씨도 "김병진 간첩사건이 보도되었을 때 내가 제주도에서 운영중이었던 OO 목석원이 큰 타격을 입었다. 나와 고OO 등이 포섭 대상자로 보도되는 바람에 목석원을 찾는 관광객도 많이 줄어들었다. 처 김O자도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라고 하였다(2009. 10. 9 진화위).
보안사 발표 내용이 언론에 보도된 날짜는 1983년 10월 19일이다. 이 날은 김병진씨가 검찰에 송치되기도 전이었으며 구속영장이 발부되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검찰 송치 2일 전에 신문과 방송을 통해 김병진씨의 피의사실이 언론에 대대적으로 발표된 것이다.
보안사가 형법 제126조 공판 청구 전 피의사실 공표 금지 및 형사소송법 198조 비밀 엄수, 피의자 및 다른 사람의 인권 존중 주의사항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더 심각한 것은 사실 확인 없이 방송과 신문을 통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는 점이다. 언론은 사건 내용에 대한 사실 확인이나 검증 없이 보안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보도했다는 점에서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당시 '민단으로 위장' 했다거나 '시위를 선동하였다'고 한 언론 보도는 보안사의 의견서나 공소장에 기재되지 않은 내용이다. 보안사는 공소장에도 없는 내용을 보도자료에 실어 배포했고 언론은 확인되지 않은 출처가 불분명한 사실을 보도해 피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겼다.
83년 10월 19일 남편이 교포 간첩으로 보도되던 날, 남편은 나와 함께 사실 유무를 확인하는 전화를 받으며 뉴스 시간마다 비쳐지는 '유학생을 잡으로'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안방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이 뉴스가 있기 전 수사관들은 남편이 흐린 화면에 목소리가 변성되어 텔레비전에 나갈 것이니 그리 알라는 전화를 해왔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남편은 얼굴까지 화면에 비쳐지며 '간첩'으로 보도되었다. 그들은 항의하는 나에게 '사람들은 얼마동안의 기간이 지나면 전부 잊어버리니 그까짓것 조금만 참으시오'라고 말했다 '그까짓것'이라니 기가 막혔다. (여성동아 1988년 12월호)
'그까짓것'이라고 취급된 '간첩 조작'은 결국 그까짓것이 아닌 일이 되어 버렸고, 그 뒤로 김병진씨와 그의 가족은 어디에서도 발 붙이고 살 곳이 없었다. 이 언론 보도로 한국에서는 더는 있을 수 없어 86년에 도피하다시피 일본으로 왔지만 보안사에서 강제적으로 2년여간 근무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보안사 스파이로 의심받아야 했다.
주위의 멸시와 냉정을 몸으로 직접 느끼며 나는 딸을 출산하는 고통보다도 더 아픈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인 시달림을 겪게 되었다. 모든 친구와 선후배, 하물며 집안 친척들까지도 나와 남편에게 등을 돌렸고,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성동아 1988년 12월호)
지난 11월 5일 김병진씨는 기자와 한 통화에서 당시의 보도에 대해 이렇게 심정을 밝혔다.
"(1983년) 당시 보안사에서 고문을 받고 수사가 마무리 될 때 보안사 뒷마당에서 MBC 방송기자들이 찾아와 허구의 방송 내용을 촬영했어요. 그날 촬영을 담당했던 피디가 젊은 사람이었다는 것만 기억할 뿐 이름도 몰랐어요. 그런데 몇 해 전 저를 취재하던 MBC 기자가 그때 보안사에서 저를 촬영했던 피디가 몇 해 전 MBC 사장을 맡았던 사람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김병진씨는 아직도 담당 피디(추가 취재 결과 김병진씨가 주장하는 '피디'는 '기자'인 것으로 보인다)가 보안사 수사관과 가깝게 말을 주고 받은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가 한 공영방송국의 사장이 되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의 눈에 여전히 언론과 권력은 한 몸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한편 2009년 10월 진실화해위원회 결정에 따르면 보안사는 김병진씨를 장기간 불법 구금하며 가혹행위를 한 사실이 있고, 이러한 불법 수사 과정으로 작성된 수사결과를 토대로 공소보류 결정을 한 사실을 인정했다. 또 기소 전 김병진씨의 피의사실을 공표하고, 보안사의 협박에 의해 1983년 10월 중순경부터 보안사 근무가 강요되었음을 인정하였다. 이로부터 2년간 김병진씨는 보안사에서 강제 근무하게 되었고, 아내 역시 보안사 직원 숙소에서 감금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