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기자말] |
우리 힘으로 이루려던 자주적 근대화는 우금치 고개를 넘지 못하고 좌절되었다.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맨 가슴을 디민 처절한 싸움과 함께다. 동학혁명으로 전라도 남접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이후 의병항쟁 등 무장투쟁 노선으로 전환한다.
혁명전쟁에서 가까스로 법통을 보존시킨 북접은 각지로 피신 다니며 포교에 힘쓴다. 최시형은 후계자(손병희, 김연국, 손천민)를 세워 재건에 착수하는 한편, 손병희에게 북접 도통을 전수(1896.12)한다. 최시형이 처형(1898.06)당하고 후계자 간 노선 갈등이 생기자, 손병희는 세력을 넓혀 풍기에서 대도주에 추대(1900.07)되어 교권을 장악한다.
손천민이 처형(1900.08)당하고 동학은 손병희, 김연국 두 계파가 공존·대립한다. 정부는 동학을 반역 세력으로 규정하고, 손병희는 문명개화로 노선을 전환해 교단을 측근들에게 맡기고 외유를 단행(1901), 정착한 일본에서 망명한 개화파 인사들과 교류한다.
천도교 창건과 변화
러일전쟁 때 동학은 종속적 발전주의인 '일본동맹론'에 편승한다. 일본에 전비 1만 원을 지원하고 진보회를 조직(1904.09)하여 정부를 상대로 정치투쟁을 벌여보지만, 큰 호응을 얻지 못한다. 정부는 진보회를 동학 잔당이라 탄압하고, 일본도 동학이 반일 성향이라 의심한다.
길을 잃은 진보회가 친일 단체 일진회와 합병한다.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 주구로 전락한 일진회는 손병희에겐 큰 부담이다. 대중의 곱지 않은 시선에 측근마저 세력권에서 벗어나려는 조짐을 보인다. 이에 손병희는 망명 개화파와 '천도교 창건(1905.12)'으로 흐름을 바꿔, 이듬해 1월 귀국한다.
손병희는 김연국계를 포용하는 한편 막대한 재정 손실을 감수하고서 일진회를 천도교에서 축출(1906.09)한다. 일진회가 시천교를 창설하자, 김연국계마저 이적(1908.01)하고 만다.
천도교는 대한협회로 정치활동을 재개(1907.11), 시천교를 비판하면서 민족주의와 계몽의식을 설파해 나간다. 이를 통해 합방반대 운동을 전개하여 1905년 이후 덧씌워진 '매국' 오명에서 벗어난다. 그러나 대한협회는 일본동맹론에 갇힌 한계도 동시에 안고 있었다.
강제 병합 후 천도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나, 총독부는 천도교를 정치결사체로 보아 즉자적 탄압을 가한다. 간부 체포는 물론, 조선 총독이 손병희를 직접 불러 순수한 종교로 체질 개선을 요구하기도 한다. 경찰을 붙여 감시하고, 재무·회계 사항을 통제한다.
이에 천도교가 제스처를 취한다. 메이지 천황이 죽자 조의를 표하고, 메이지 신궁 건립(1915)에 1000원을 희사한다. 일제의 식민 통치를 인정하는 한편, 천도교는 순수종교임을 천명한다. 대중은 천도교의 이런 소극적 행위가 생존을 위한 최소한임을 알아본다.
갑오 동학혁명을 기억하고 있는 대중의 호응으로 교인이 급증한다. 나라를 빼앗긴 대중이 천도교로 몰려든다. 1916년 총 교인이 108만에 이른다. 천도교는 각종 근대적 계몽사업을 벌여 이에 화답한다.
3·1운동 주도
3·1운동에서 천도교 역할은 지대한 것이었다. 바닥까지 압살 당한 식민 통치공간에서 어떠한 '민족운동' 논의도 자유롭지 못했다. 모든 민족진영이 외교론·실력양성론·무장 투쟁론으로 팽팽한 대립 관계에 있었으나, 국내 종교계와 교육계는 꾸준한 교류가 있었다. 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와 2.8 독립선언으로 제반 민족운동 여건이 무르익는다. 여기에 고종 서거(1919.01)로 국내외 정세가 급변한다.
이에 민족진영은 천도교를 활용한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한다. 15인의 천도교인과 기독교, 불교, 교육계를 망라 민족대표 33인을 구성하고 조직적으로 운동에 참여한다.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를 천도교 전국조직을 활용, 각지로 신속하게 배포한다. 천도교 행정·통신망이 궁벽한 산간벽지까지 만세운동 소식을 빠르게 실어 날라 조직적 시위를 촉발한다.
3·1운동에 많은 천도교 자금이 활용될 수 있었던 배경엔 중앙 대교당 건립과 성미제(誠米制)가 있었다. 윤치오 가문이 희사한 땅에 대교당 건립을 착수(1918)하자, 많은 성금이 답지한다. 쌀값에 연동해 각호당 일정액을 헌납하는 성미제 덕분이다.
그러나 민족대표 33인은 제대로 된 지도부가 되지 못한다. 천도교 지도부도 일본과 동등한 처우 및 보호국 체제 자치권요구, 연방제 시행 같은 자주독립과는 거리가 먼 개량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한계는 3·1운동의 혁명적 열기를 조직화해 내지 못하고 산발적·분산적 항쟁에 가둬버렸으며, 무장투쟁으로 나가지 못한 결과로 나타났다. 이런 개량주의는 손병희 사후(1922) 천도교가 대립·분열하는 불씨가 된다.
그러함에도 천도교는 각계 힘을 모으는 준비단계부터 운동 확산은 물론 조직 동원과 자금지원, 운동원칙 마련 등 실질적으로 3·1운동을 이끌어간 중추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천도교 중앙 대교당
대교당과 길 하나 사이로 운현궁이 자리한다. 흥선대원군의 '귀족 공간'과 동학혁명 맥을 이어 대중의 힘으로 문명개화를 이루려 했던 '백성 공간'이 공존한다. 대교당은 서구 역사주의(복고적 재현)를 혼용한 절충주의다. 여기서 전통 건축을 채택하지 않은 이유가 엿보인다.
대교당 설계 당시 천도교는 종교나 건축적으로 명동성당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서학을 대표하는 고딕의 웅장하고 통일성을 갖춘 명동성당에, 유·불·선과 서학 장점을 취한 자생적 민족종교로서 천도교는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응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명개화 노선에 합일하는 서구 건축양식으로 귀결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이런 고민이 서구 역사주의 채택으로 귀결되었다.
설계와 공사 총감독을 일본인에게 맡기고, 시공은 중국인에게 일임한다. 유사종교 감시단체라는 시선을 희석해 보려는 조치로 보인다.
대교당 물적 기반은 성미제를 통해 축적된 재정에 기부받은 땅 4950㎡(1500평)이다. 교단은 총독부에 1320㎡(약 400평) 규모로 건축허가를 신청한다. 총독부는 '종교 집회장이 대규모이고 강당 중앙에 기둥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불허한다. 아울러 모금 중단과 모은 기금을 반환하라 압박한다. 교인들은 총독부 조치에 허위 영수증으로 대응한다. 이런 난관을 뚫고 건축면적 703.5㎡(212.8평)로 착공(1918.07)과 개기식(1918.12.01)을 올린다.
그러나 3·1운동에 자금 대부분이 쓰이면서 작업은 잠시 중단되어야 했고, 천도교는 요시찰대상이 된다. 일제는 자재구입을 막아 대교당 건립을 방해하며 중국인 시공 책임자를 구금하기도 한다. 온갖 방해에도 7월에 작업을 재개하여, 22만 원 비용으로 재개 1년 8개월 만에 준공(1921.02.28)한다.
대교당은 오롯이 대중 성금이 세워낸 소중한 건축물이다. 강당 내부는 기둥 없는 개방공간이다. 4층 누각에 오르면, 맞은 편 멀리 명동성당 종탑 사이로 질곡 가득한 한양 경치가 보였다.
3·1운동 이후
3·1운동 후 천도교 지도부는 대거 검거되거나 목숨을 잃는 시련을 겪는다. 이후 천도교는 문화운동만을 전개하며, 사회사상으로서 교리 확산을 도모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직접적 독립운동과 거리를 둔다.
이 효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분출된다. 1970년대 이후 명동성당이 독재에 저항하는 분출구였다면, 1920년대 대교당은 일제 억압과 감시를 뚫고 새로운 개벽을 꿈꾸는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계몽적 문화운동을 이끈 '개벽' 같은 잡지와 온갖 서적이 출간된다. 방정환이 '어린이날 기념식(1923.05.01.)'을 거행하기도 한다. 명실상부 문화운동을 통한 자각과 실천을 담보하는 공간이 된 것이다.
또한 군중 집회공간 역할로 각종 보고회와 연설회, 노동조합 총회와 강연회 등이 열린다. 형평사 창립 1주년(1924.04)과 신간회 창립 1주년(1928.02) 기념식 등이 대표적이다.
동학에 뿌리를 둔 천도교는 3·1운동 중심에 서서 3백만 교인을 거느린 민족종교로 거듭 성장한다. 하지만 대립과 분열, 계파 갈등을 거치며 1930년대 후반 친일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이에 대중의 반응은 명약관화하다.
명동성당이 민주화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된 기저엔, 천도교의 이런 오류가 결정타로 작용했으리란 짐작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제 사람들 발길마저 뜸해진 쓸쓸한 대교당을 보면서, 역사가 써내는 무서움을 새삼스레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