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 선거가 끝난 뒤에도 마을의 민심은 여전히 두 갈래로 쪼개져 있었다. 박 이장을 지지하던 쪽에서는 주민의 대다수가 정당한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했기에 선거 자체가 무효라며, 나를 이장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다.
분열을 활활 부추기고 다닌 사람은 우리 선거 캠프에서 조직국장을 맡았던 소평댁이었다. 선거 종료 이후 소평댁은 마치 자신이 이장에 선출된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박 이장을 지지했던 몇몇 주민들에게 보복과 응징을 선언했고, 농로 포장에 관한 청탁도 두어 개 받아 놓은 상태였다.
김 영감, 우 이사, 반장이 마을의 내분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갈등을 형식적이나마 봉합하려면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고 다들 입을 모았다. 그래서 무산댁과 금촌댁 같은 박 이장의 측근들과 접촉을 시도했다.
몇몇 주민들을 만나 보니 마을의 균열은 단기적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거 때 상대편에 섰던 사람들이 절실하게 원했던 것은 박 이장의 재임이 아니라 내가 이장으로 선출되지 않는 것이었다. 무산댁과 금촌댁의 마음속에서 견고하게 다져진 이러한 신념을 몇 마디 말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즉각적으로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기는 한데. 하지만 이건 차마···."
남편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오랜 시간 내 남편을 전공한 전문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남편이 얼굴 위에다 저런 종류의 감정을 그려 붙이는 건 분명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차마! 차마 알고 싶지는 않은데."
"아니, 한번 들어봐. 소평댁 아줌마가 당신을 이장으로 만든 건 자기라면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잖아. 자기가 '킹메이커'라고. 원래 큰일을 치르고 나면 논공행상이 뒤따르긴 하지만 이건 좀 과한 거라고."
"그래서?"
"그러니까 소평댁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청산을 해야 한다는 거지. 옛말에 왜 육참골단(肉斬骨斷)이라는 말도 있잖아. 자신의 살을 내주고 상대의 뼈를 끊는다고."
"대체 뭔 소리를 그렇게 끔찍하게 하는 거야? 소평댁 아줌마를 내주고 누구 뼈를 부러뜨리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니, 작은 것을 버리고 큰 것을 가진다, 이런 거지. 소평댁을 버려야 마을이 돌아간다, 이 얘기라고."
외계어를 듣다
이장 임명장을 받기까지는 몇 가지 절차가 있었다. 박 이장이 사임 문서를 제출한 뒤, 나는 제법 두툼한 서류 뭉치를 면사무소에서 건네받았다. 최종 학력과 재산 상태 같은 상세한 인적 사항뿐만 아니라, 남편을 비롯한 시댁 구성원 전원의 학력이나 직장 같은 개인 정보를 요구하는 서류였다.
다소 과한 측면이 있다고 느꼈지만, 이장의 직무라는 것이 꽤 중요한 것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장은 주민들을 위한 봉사직인데, 이렇게까지 개인적인 정보를 많이 제공해야 하는지 계속해서 의문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2021년 1월 5일에 처음으로 이장 회의에 참석했다. 함양군의 경우 2주에 한 번 이장 회의가 열린다. 어쨌든 백전면 16개 마을의 이장들이 참석하는 회의는 면사무소 직원들이 만들어 놓은 '이장회의서류'를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 회의에서 나는 28개나 되는 회의 안건을 보며 기겁했다. 연초라서 사업 신청이 많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들었지만, 많아도 너무 많았다. 더구나 회의에서 사용되는 단어들이 생소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춘파용 맥류 보급종 신청 안내' 같은 안건은 내게 해독이 불가능한 외계어나 마찬가지였다. 면사무소의 산업경제담당 공무원이 차근차근 해석을 해줬지만,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나로서는 질문할 엄두도 못 내고 그저 눈만 끔뻑거리기만 했다.
보조사업 신청 안건으로 넘어가자 숨이 턱 막혔다. 보조사업은 국비, 경남도비, 군비 등 세금이 보조금으로 투입되는 사업인데, 자부담 비율은 사업의 종류에 따라 상이하다. 어쨌거나 첫 번째 이장 회의에서 언급된 보조사업만 해도 6개였다.
친환경농업분야 보조사업, 쌀 생산분야 보조사업, 곶감분야 보조사업, 원예분야 보조사업, 과수분야 보조사업, 양봉분야 보조사업. 서류를 읽다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보조사업에 관련된 농사를 짓는 주민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보조사업 관련 설명이 끝난 뒤에는 '공공비축미곡' 등급별 매입가격에 관한 발표가 있었고, 이어서 '축사시설현대화사업' 안내 및 접수에 관한 소개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귀농한 지 7년이 되었지만, 내가 과연 농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제대로 산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나면 마을로 돌아가서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행정 통계를 위해 주민들이 기르고 있는 소, 돼지, 닭, 염소 등 총 21종의 가축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가구를 조사해서 주택화재보험에 가입했는지를 파악하고, 미가입 주민들에게 보험에 가입하라고 홍보를 해야 했다.
회의 시작 전에 받은 이장 임명장을 면사무소 구석에다 슬그머니 버리고 아무도 모르게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남편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내가 왜 귀농을 했는가? 조용하게 농사지으면서 바쁘지 않게 살려고 고향으로 돌아온 것 아닌가. 그런데 남편의 꾐에 빠져 대체 이게 뭐란 말인가. 내 몸은 회의실 의자에 들러붙어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두 개의 세계
"아이고, 노 이장. 축하하네! 나는 돌아가신 자네 부친의 후배 조 이장이라고 하네, 귀향한 지는 한 15년 정도 됐지. 아무튼 반갑구만. 아버님 뒤를 이어 이장이 되었으니 주민들의 기대가 참 크겠네, 그러니 자네도 부담이 클 거고."
면사무소 회의실에는 나와 조 이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사무실로 보조사업이나 지원사업을 신청하러 간 것이 아닌가 해서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조마조마한 내 마음과 달리 반달 눈웃음으로 추측하건대 마스크 속 조 이장의 입꼬리는 시원하게 올라가 있는 듯했다.
"오늘 처음이라 뭔 소리 하는지 잘 모를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봄여름가을겨울 한 바퀴만 돌고 나면, 회의에서 나오는 얘기 다 알아먹게 되니까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고. 아무튼 이장 업무란 게 안 하려고 마음먹으면, 할 일이 거의 없는 거고. 하려고 작정하면, 엄청나게 할 일이 많다는 것만 명심하게. 명예직 이장이 될지 봉사직 이장이 될지는 자기 자신에게 달린 거니까."
조 이장이 떠난 뒤에도 한참이나 회의실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30페이지에 달하는 '이장회의서류' 내용을 주민들에게 전할 자신이 없었다. 나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을 어떻게 설명해서 그 사업에 관해 신청을 받는단 말인가.
'춘파용 맥류 보급종'을 주민 중 누가 원하는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춘파용 맥류 보급종'은 국가에서 보급하는 봄에 뿌리는 보리 종류를 의미한다. 5종류의 보급종 중에는 '누리찰쌀보리'라는 품종이 있다.
회의 자료에 따르면, 이 품종은 6조 찰성 쌀보리이고, 다수성·내도복성이 강하고, 까락은 짧고 호위축병에는 강하다. 재배적응지역은 충남 이남의 쌀보리 재배 지역이면 가능하다고 한다. 파종 적정 시기는 함양군의 경우 2월 15일에서 2월 25일까지라고 적혀 있었다.
기가 찰 노릇이었다. 면사무소와 이장의 세계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농촌의 일상적인 삶에서 사용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언어가 다르면 개념에도 차이가 있을뿐더러 세계도 다르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도 다른 것 아닌가?
1시간 정도의 짧은 경험이었지만, 나는 농촌에 두 개의 세계가 살짝 겹쳐져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더 많은 세계가 농촌 사회에 관여하고 있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하나는 일상적 세계, 또 다른 하나는 행정적 혹은 보조적 세계라고 이름 붙일 수 있겠다.
아무튼 한쪽에는 농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노동을 통해 삶을 재생산하는 일상적 세계가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농촌 사회의 노동을 지원하고 돕는 보조적 세계가 있는 듯하다. 문제는 이 보조적 세계가 행정적·농업 기술적 언어로 짜여 있어서 농민들의 일상적 세계와 쉽게 포개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면사무소 회의실에 앉아서, 다른 언어를 번역해서 서로의 뜻을 이해하게 해주는 통역사가 이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생각에 이장은 농촌 사회의 일상적 세계와 행정적 세계를 연결하는 접점인 것 같았다.
2층 회의실에서 1층 사무실로 내려가 복사기 앞에 섰다. 그리고 30페이지짜리 '이장회의서류' 45부를 복사하기 시작했다. 내가 아직 다른 세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기에, 우리 마을 주민 개개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