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참석한 회의가 끝나자마자 이장으로서 공식적인 업무가 바로 시작됐다. 마을로 돌아가서 일단은 행정 통계를 위해 주민들이 기르고 있는 소, 돼지, 닭, 염소 등 총 21종의 가축에 대한 전수 조사를 해야 했다.
동시에 화목보일러를 사용하는 가구를 조사해서 주택화재보험에 가입했는지를 파악하고, 미가입 주민들에게 보험에 가입하라고 홍보를 해야 한다. 또 뭐가 있더라? 아! 복사한 이장 회의 서류를 집집마다 전달해야 한다. 그리고 보조사업이나 지원사원에 관심 있는 대상자들을 확인해야 한다.
30페이지에 달하는 이장 회의 서류 45부를 복사하면서 몇몇 면사무소 직원에게 이장 업무에 관해 물어봤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사실 이장 업무에 대해 뭐가 뭔지 1도 알지 못했던 터라, 직원들의 대답이 문제가 아니라, 내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장의 대다수가 마을 방송을 통해 회의에서 오고 간 내용을 주민들에게 전달하는 듯했다. 하지만 우리 동네의 경우 마을회관 앞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달되지 않는 집들이 절반을 넘는다. 그런 집에서 마을 방송을 들으면, 이장의 목소리는 짐승 소리 마냥 뭉개져서 웅웅거릴 뿐이다.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 대부분이 농기계의 영향 때문인지 청각 신경이 무뎌진 지 오래다. 더구나 집에 있을 때는 다들 보청기를 빼고 최대 음량으로 TV를 시청하는 탓에 마을 방송은 아무 구실도 못한다. 이 때문에 전임 박 이장이 가끔 마을 방송을 했지만 주민들은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전달받지 못했다.
눈물 젖은 김 영감
가장 먼저 김 영감 아저씨 댁을 방문해서, 뒷마당에 있는 닭장으로 우선 발길을 옮겼다. 닭장에는 암탉 2마리와 꼬리 깃털이 길쭉하고 심술궂게 생긴 볏을 이마에 올려놓은 수탉 2마리가 있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수탉 2마리는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 중이었다. 수첩에다 암탉 2, 수탉 2라고 적었다.
김 영감 댁의 앞마당에는 '공자'라고 불리는 소형견 한 마리가 예의 바른 자세로 개집 안에 누워 있었다. 공자는 시골 개 특유의 천진난만한 얼굴에다 약간은 이국적인 표정을 지닌 '믹스견' 혹은 '동서 문화 융합 생명체'다.
김 영감은 지나치게 활달한 성격의 이 개를 공짜로 입양했다고 처음에는 '공짜'라고 불렀다. 그러다 내가 '공자'라고 부르기 시작하자 이 개는 행동거지도 서서히 변했다. 예(禮)와 인(仁)을 따르고 실천하는 점잖은 생명체로 변신했고, 이제는 주민들 모두 이 개를 공자로 받아들이고 있다. 공자를 보면 존재를 규정하는 건 이름 혹은 언어일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아무튼 수첩에다 수캐 1이라고 적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엄청나게 거대한 소리가 거실에 누워 있는 김 영감을 소인국의 주민처럼 왜소하게 만들었다. TV에서는 재벌가의 시어머니가 가난한 집안 출신의 며느리에게 히스테리를 부렸고, 김 영감은 며느리 대신 울고 있었다.
"아이고야! 우리 노 이장한테 내가 못 볼 꼴을 보이뿟네. 요새 내가 마 눈물이 많아지뿌가꼬···."
"눈물이 나면 울어야죠, 아저씨. 그게 뭐 어때서요."
가방에서 이장 회의 서류를 꺼내 김 영감에게 건넸다.
"이게 뭐꼬?"
"이장 회의 서류인데요, 앞으로 이장 회의를 하고 나면, 이 서류를 복사해서 주민들에게 나눠 드리려구요.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이 카믄 주민들이야 좋긴 헌데, 매번 이래 복사를 할라 카믄 힘들 낀데."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제일 정확할 것 같아서요."
김 영감은 화목보일러를 사용했고, 주택화재보험에도 들어있는 상태였다. 안방에서 보험 관련 서류들을 들고 나온 김 영감은 지인의 아들이 보험회사에 근무하는데, 하도 부탁을 많이 해서 4개월 전에 가입했다는 얘기를 꺼냈다.
서류를 훑어보니 김 영감이 가입한 것은 장기 보험이었는데, 면사무소에서 추천한 보험에 비해 월 납부금도 꽤 많고 그에 비해 만기 환급금은 적은 편이었다. 기존의 보험을 중도 해지하고 5년짜리 화재 보험에 가입하는 게 차라리 더 나을 것 같았다. 내 의견을 들은 김 영감은 다음날 농협에 함께 가 줄 수 있는지를 물었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아저씨, 여기 서류를 보시면 보조사업과 지원사업이 꽤 많거든요. 아저씨가 짓는 농사 중에 해당되는 게 뭐 있나요?"
"내사 마(나야 뭐) 인자 늙어뿌가꼬 농사도 거의 없다 아이가."
"그러면 암탉 2마리 수탉 2마리 그리고 공자 이외에 기르는 동물이나 가축은요?"
"눈물 많은 늙은 짐승 한 놈이 노 이장 앞에 떡하이 앉아 있다 아이가."
눈꼬리에 물기를 머금은 채 껄껄 웃는 김 영감이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나는 화제를 재빨리 바꿔야 했다.
"그런데 아저씨, 공자는 수컷이죠?"
"뭐라카노, 공자가 우예 수컷이고, 암컷이지!"
"강아지 때 보니까 수컷이던데요?"
"아이다! 우리 노 이장이 뭘 몰라뿌도 한참을 몰라뿌네. 공자는 강아지 쩍에도 암컷이었고, 지금도 마 암놈이라꼬."
김 영감이 맨발로 앞마당으로 뛰쳐나가서 공자의 성 정체성을 명명백백히 밝히겠다는 걸 간신히 막았다. 내가 공자의 성별을 오해하고 있던 덕분에 김 영감은 기분이 좀 나아진 것 같았다.
김 영감이 방금 전에 슬픔 혹은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진 건 호르몬의 작용 때문일까, 아니면 재벌가의 며느리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나이 탓에 농사일이 줄어든 것 때문일까?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몇 년 전에 돌아가신 아줌마의 부재에 대한 반응일 것이다. 평생을 함께한 사람의 시·공간적 부재에 대한 갑작스러운 각성은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불러오는 것 같다.
무산댁과의 어색한 만남
무산댁은 두툼한 이장회의 서류 사본을 건네받고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소평댁의 이장 선거 후 언행에 대해서 무산댁에게 사과부터 했다. 그리고 이장 업무의 일부를 소평댁에게 위임한 사실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 무산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무산댁은 곶감 분야 보조 사업에 관심을 보였다. 곶감과 관련해서는 함양 고종시 단지 조성 사업과 임산물 유통 기반 조성 사업, 두 가지가 있었는데, 무산댁은 보조사업 목록 중에 저온 저장고를 가리키면서 가능한지 물었다. 가능과 불가능을 가늠하는 것은 내 영역이 아니었기에 그 자리에서 바로 면사무소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담당자의 말에 따르면, 보조사업이나 지원사업을 신청한다고 누구나 선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보조금은 한정되어 있고 신청 농가는 많다 보니, 경쟁이 치열할뿐더러 규모가 큰 대농 위주로 보조사업이 설계되는 측면이 많아서, 소농들은 지원을 받기가 힘들다고 담당자는 솔직하게 내게 말했다.
나는 담당자에게서 전해 들은 얘기를 그대로 무산댁에게 전했다. 무산댁은 이번에도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담당자가 그래도 사업대상자 명단에 무산댁의 이름을 올려놓겠다면서 저온 저장고 견적서를 제출하라는 말을 했다고 하자 무산댁의 표정이 약간 밝아졌다.
하지만 방문을 닫고 나올 때까지 무산댁은 내 눈을 마주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두 패로 갈렸던 이장 선거의 여파가 오래갈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냉담한 관계가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해서 약간은 당황스러웠다. 어쨌든 무산댁의 닭장을 둘러보고 수첩에다 암탉 16 수탉 1이라고 적었다.
동물의 왕국에 깜짝
귀농한 지 20년이 넘은 주씨 아재의 집을 방문했을 때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동네에서 상당히 먼 곳에 있어서 왕래가 거의 없었던 아재의 집은 동물 왕국이나 다름없었다. 닭 100마리에 염소 3마리, 소형견 2마리에 대형견 4마리가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재를 매년 연말 대동회(마을 예산의 결산 및 송년회 잔치) 때나 몇 번 봤을 뿐 제대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보통 시골 작은 마을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은 서로의 집에 있는 젓가락·숟가락 개수까지 다 아는 사람들이 노동을 마치고 밤에는 마을회관에서 모여 북적거리는 이미지로 귀결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건 약간 과장된 환상에 가깝다. 사람 사는 곳이 어디든 그러하듯이 작은 동네라도 서로에 대해 잘 모르는 데면데면한 관계도 많다. 한적한 시골 마을도 서로 마음과 말이 통하는 사람들이 소규모로 모인 집단들의 연합체와 비슷하다.
물론 작은 시골 동네의 주민들은 농수로를 사이에 두고 논밭에다 같은 작물을 기르며 비슷한 노동을 하고, 자연재해가 오면 똑같이 피해를 입는다는 점에서 지리적 공동체로서의 노동 정체성을 함께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는 시골의 관계라는 것이 도시인들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어쨌거나 전임 박 이장과 막역한 사이라는 소문이 있어서 살짝 긴장했지만, 아재는 의외로 나를 반갑게 맞아 줬다. 화목보일러와 보조사업에 관한 얘기를 마치고 집을 나서는데, 아재가 현관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이봐, 노 이장. 지금 내 얼굴을 보면 화난 것 같지? 근데 사실 이게 기분 좋은 표정이라고. 내 상판대기가 요 모양 요 꼴로 생겨 먹다 보니까 사람들과 잘 안 만나지더라고. 뭐 굳이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가끔 놀러 와서 우리 여편네랑 술 한 잔씩 하자고."
이장 업무 첫날, 우리 마을 45가구 중에 20곳도 방문하지 못했는데, 아재의 어깨 뒤편으로 어둑어둑 짙어진 공기가 산모퉁이를 돌아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