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회일수 2732일.
숫자일 뿐이지만 말도 한다. 농성 시작일은 2014년 8월 25일. 7년을 훌쩍 뛰어넘었다. 경주 양남면 월성원자력 공원 앞 농성 천막 외벽에 적힌 숫자가 말하는 건 고통의 무게였다. 바로 앞 2차선 도로엔 수시로 차가 오갔고, 그 때마다 천막이 후드득 소리를 내며 통째로 흔들렸다.
지난달 18일 천막 안에서 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48) 사무국장과 마주 앉았다. 맞은편 벽에 붙은 '천막농성 7년, 주요 활동' 현수막에 빼곡하게 적힌 건 그간 힘겨운 싸움의 흔적이다. 그걸 보다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가 지난 1월 25일 페이스북에 올린 한 줄 공약이 떠올랐다.
탈원전 백지화, 원전 최강국 건설
이 13자짜리 공약에선 숫자 2732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 국장은 "국가 재앙적 공약"이라고 일축했다.
"탈원전 정책 백지화? 심하게 말하면 석기시대로 돌아가자는 거죠. 또, 원전 최강국 만들겠다? 우린 가만히 있어도 원전 최강국입니다. 미국, 독일도 손을 놨고, 일본은 원전 사고로 폭망했죠. 원전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나라들이 손을 놓은 사양산업인데, 1등이 무슨 의미인가요?"
윤 후보는 "신한울 3, 4호기 공사 중단은 국가범죄"로 규정했었다.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공사를 강행하겠다는 뜻이다.
"신한울 원전은 터만 조성돼 있었어요. 윤 후보 말을 들으면 한참 공사하다 중단한 것으로 오해할 수 있죠. 하지만 한 삽도 안 뜬 상황에서 민주적 의사결정을 통해 한국수력원자력이 포기한 사업입니다. 이게 무슨 공사 중단이고 범죄인가요? 선동이고 막말 정치입니다."
석 달 전에도 이 국장을 이곳에서 만난 적이 있다. ㈔세상과함께(이사장 유연 스님)가 선정한 제2회 삼보일배오체투지 환경상 시상식이 열린 곳이다. 경주환경운동연합은 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당시 그는 수상 소감을 탈핵 강연으로 대신하면서 천막 농성장을 이같이 소개했다.
"여러분이 서 있는 곳은 한수원 부지이고, 해안에서 보이는 4개의 거대한 원자로 중 제일 가까운 곳에서 914m 이내에 있는 원전 제한구역입니다. 핵 발전이 위험하다면서도 여기서 모신 것은 7년 넘게 천막 농성하면서 피폭당하는 분들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그는 이날 시상식 연단에 황분희 월성원전이주대책위원회 부위원장을 올려 세웠다. 기억나는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맹꽁이, 두루미도 보호받는데, 우리는 대체 뭡니까?"
그는 "대도시에서 전기를 쓰는 만큼 우리가 왜 희생을 당해야 하는지 슬프고 억울하다"라고 호소했다. 핵 사고 위험성, 일상적 방사선 피폭 때문에 안전한 곳으로 이주해 줄 것을 요구해왔지만 외면당했다는 것이다. 인근 지역은 부동산 등 자산 처분이 불가능하기에 제도 정비도 촉구해왔다.
영화 속 유령도시
2732. 매일 하루씩 자라는 이 숫자는 이들에겐 깃발이고 외침이었다. 2010년 경주환경운동연합에서 방폐장 건설 반대 운동 전담자로 활동을 시작한 이 국장도 그 깃발을 함께 들고 있다. 그에게 물었다. 왜 탈핵에 꽂혔나?
"핵발전은 범죄입니다."
그는 2011년 후쿠시마 핵사고 현장을 목격한 뒤에 확신했단다. 핵 사고가 일어나고 한 달 뒤인 그해 4월, 그는 1주일 동안 후쿠시마에 머물면서 한일 시민 조사단에 소속돼 방사능 오염도를 조사하고, 주민들을 인터뷰했다.
"방사능 측정기를 달고 다녔는데 측정치가 어마어마했죠. 원전에서 80km 떨어진 거리에선 방사능 기준치의 30배 이상이 나왔어요. 반경 20km에 갔더니 100배 이상 치솟았습니다. 1km 떨어진 원전 담벼락에서 쟀는데 1000배였습니다."
그가 목격한 원전 인근 마을은 영화 속의 유령 도시였다. 거리에 자재도구들이 흩어져 있었다. 혼비백산 떠난 흔적이다. 방치된 차량도 많았다. 서둘러 버스로 피신시킨 탓이다. 국가는 이들의 피해를 제대로 보상하지도, 책임지지도 않았다.
그해 국내에선 고리 1호기 폐쇄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전국 집회 연단에 올라간 그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도 "핵발전은 범죄다"였단다. 그는 "지금까지 우리는 그들보다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라고 말했다.
핵 발전은 기후위기 대응의 최대 걸림돌
그가 탈핵을 주장하는 것은 핵 발전의 위험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찬핵론자들은 최근 국제 주요 의제로 다뤄지는 기후위기 대응책의 하나로 원전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 국장은 최대 걸림돌이라고 단언했다.
"정부는 2050년까지 탄소 제로를 선언했어요. 2030년까지 탄소배출을 2018년 대비 40% 감축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약속했죠. 8년 남았습니다. 에너지 생산과 공급을 재생가능한 에너지 체계로 바꿔야 합니다. 문제는 속도인데, 핵 발전에 꽂혀 있는 사람들이 이를 막고 있죠."
그는 "소위 핵마피아들과 조중동 레거시 미디어들은 석탄과 가스 발전 등을 공격하지 않고 전체 에너지 생산의 몇 프로도 되지 않는 재생에너지의 싹을 자르려고 혈안이 돼 있다"라면서 "재생가능 에너지가 성장하면 핵 발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신한울 3, 4호기 건설에 8조 원의 돈이 들어갑니다. 그 돈을 재생가능에너지에 투자하면 원전으로 이권을 나눠먹었던 카르텔이 흔들리겠죠. 또 재생가능에너지를 확대하려면 국가 주도로 한정된 재원을 투입해야 합니다. 재생가능에너지를 죽여야 이권이 생기는 구조입니다."
그는 "기후위기의 대응책으로 확실하고 유리한 선택지인 재생가능에너지를 놔두고 핵발전을 택할 필요는 없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탈핵운동 최전선, 경주환경연합 유일한 상근자
'원전 밀집도 세계 1위'인 대한민국에서 '탈핵'을 외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원전 산업 규모는 연간 수십조 원에 달할 정도로 천문학적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생계뿐만 아니라 산업계와 학계, 언론계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막대한 이권이 끈끈하게 얽혀 있다.
탈핵 환경단체들의 전국 네트워크도 결성돼 있지만, 거대 자본과 권력을 가진 그들과 대항해 싸우는 건 버거운 일이다. 원전뿐만 아니라 방폐장과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까지 위치한 경주는 탈핵운동의 최전선이다. 그는 현재 경주환경운동연합의 유일한 상근자이다.
1999년에 창립한 경주환경운동연합은 월성1호기 폐쇄 준비운동본부, 월성 원전 주변 지역 갑상선암 피해자 지원 활동과 경주시 고준위 핵폐기물 공동대응위원회, 월성원전 이주대책위원회, 탈핵경주시민공동행동 등의 활동을 해왔다. 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싸움이 뭐냐고 물었다.
"2015년 2월 27일 새벽 1시에 원자력 안전위에서 월성 1호기 수명연장안이 날치기 통과됐을 때였죠.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막막했습니다. 정부가 승인한 마당에 우리는 대체 뭘 바꿀 수 있지? 그때 김윤근 공동대표가 월성 1호기 폐쇄 주민투표 '만인소'를 제안했습니다."
당시 김 전 대표는 한지 100장을 그에게 건네줬다고 한다. 붓펜으로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고... 한 장에 100명씩 채우면 만 명이라는 말과 함께.
"한지를 들고 다니면서 붓으로 이름을 쓰라니? 처음엔 의구심도 들었지만, 회원과 연대단체들이 함께 했습니다. '우린 몇 명 받았다'는 말이 매일 회자됐고, 어떤 분은 한지 1장에 200명을 받아오셨습니다. 한 장에 평균 140여 명, 한지 90장 모으니 1만명이 채워졌죠."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면서 열패감은 극복됐고, 아래로부터의 조직력도 복원됐다. 이 과정에서 김영희 변호사가 수명 연장 무효 소송을 제안했고, 결국 2017년 2월 법원에서 승소했다. 변방에서 탈핵의 깃발을 든 그는 '나홀로 상근자'가 아니었다.
"1심에서 승소한 뒤 대선이 치러졌죠. 법원도 월성 1호기 폐쇄 판결을 내렸기에 국민의힘 전신인 당시 자유한국당도 민주당과 비슷한 공약을 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돌변했죠."
왜일까? 문재인 정부에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은 고리 1호기 퇴역식 행사에서 '탈원전'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낸 뒤 재생가능에너지의 비전을 제시했는데, 국민의힘 등에서 정치적 공격이 들어와 5년의 시간을 허비했고 우리는 그동안 희망고문을 당했다"라고 아쉬워했다.
그는 이어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연착륙을 전제로 한 것인데, 국민의힘 등은 '지금 당장 모든 원전을 멈추겠다'는 것이냐고 공격을 했다"라면서 "지금 여론조사를 하면 원전 찬성 여론이 더 높게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고, 국민의힘이 이번에 선거공약으로 들고 나온 이유이기도 하다"라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 5년간 많은 사회적 논의 속에서 탈원전이라는 큰 흐름은 잡혔기에 대선 후보들은 더 이상의 소모적인 논쟁을 멈추고, 누가 빨리 원전을 줄이고 정의로운 에너지로 전환할 것인지 경쟁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체투지환경상이 고마운 까닭
전국의 탈핵단체들과 함께 월성 1호기 폐쇄를 견인했고, 핵 발전의 위험성을 공론화해 온 그이지만 지금도 여전히 '거대한 벽'과 마주한 느낌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 단단하게 똬리를 튼 핵발전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이 순순히 붕괴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특히 자신을 더욱 피폐하게 만드는 건 탈핵 현장의 삭막함이라고 했다. 핵 발전소 등 방사능 누출 현장은 그야말로 죽음의 땅이다. 생태운동 등 다른 환경운동에 비해 원천적으로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이런 곳에서 유령과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단다. 그에게 삼보일배 오체투지 환경상이 각별하게 다가온 이유이기도 했다.
"탈핵이라는 우리 사회 주요 의제를 계속 부여잡아야 한다는 당위에서 수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주변에서 묵묵하게 일해온 분들도 많은 치유를 받았습니다. 이 상이 헌신적인 운동가들에게 버팀목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와 함께 천막 바깥으로 나가서 바람 부는 해변에 섰다.
"저기, 가장 멀리 보이는 원전이 월성 1호기입니다. 영구 정지했고 해체할 일만 남았죠. 2호기는 2026년, 3호기는 2027년, 4호기는 2029년에 수명이 끝날 예정입니다. 그런데 윤석열 후보는 계속 돌릴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죠. 국가 장래를 망치는 일입니다."
그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인 뒤 거대한 원자로가 우뚝 선 해변 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높은 파도가 모래해변 앞에서 하얗게 쓰러졌다. 후쿠시마 원전 앞 해변도 이처럼 무심했을 것이다. 그의 뒷모습을 보니 집회일수 2732, 천막 앞에 적힌 숫자가 또다시 떠올랐다.
그에게 이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유를 물었다.
"재생가능에너지는 공짜입니다. 초기 투자비용은 있지만 생산과정이 공짜고 순수한 국산 에너지죠. 지구도 살립니다. 우리집 지붕 위에, 마을공동체를 위해 새로운 대동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
▲ 윤석열의 원전 '한 줄 공약'... "막말-선동 정치" 경주환경운동연합 이상홍 사무국장을 만났다. 경주 양남면 월성원자력 공원 앞에 천막을 쳐놓고 2732일째 농성을 벌이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원전 공약에 대한 입장을 들었다.
|
ⓒ 김병기 |
관련영상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