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가장 맞닿아 있는 술 중 하나인 맥주. 우리는 맥주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문화로서의 맥주를 이야기하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에 관하여 이야기합니다.[편집자말] |
밤보다 낮이 길어진다는 절기 춘분이 지나, 4월 5일 '청명(淸明)'이 왔다. 청명이란 '하늘이 차츰 맑아진다'는 뜻으로, 24절기 중 봄 농사를 준비하는 시기를 나타낸다. 요즘 나는 두툼한 외투들을 옷장 깊숙이 넣어놓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곤 한다. 그리고 이 따스한 계절에 맞춰 꺼내듣는 플레이리스트가 있다.
우선 추운 겨울에는 '눈'이라는 시어를 살린 노래를 즐겨 듣는다. 김현식의 '눈 내리는 겨울밤'이 대표적이다. 본 이베어(Bon Iver)처럼 광활한 겨울의 풍경을 사운드로 살린 듯한 음악을 듣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어떤가? 시원한 분위기의 댄스곡이나 EDM, 빠른 템포의 록을 즐겨 듣는다. 봄에는 여유롭고, 따뜻한 분위기의 음악을 듣는다.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의 'For Once In My Life', 백예린의 'Our Love Is Great' 등이 좋은 선택지다.
맥주 역시 음악처럼 계절을 타는 주류다. 땀을 뻘뻘 흘리게 되는 여름에는 라거 맥주 이상의 선택지가 없다. 물 대신 시원한 라거를 마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운 겨울에는 체온을 높여줄만큼 도수가 높고 맛이 진한 임페리얼 스타우트를 즐겨 마셔 왔다. 그런데 기온이 높아지고 햇빛이 많아질수록 '센 맥주'는 부담스러워지기 마련이다. 봄에는 어떤 선택지를 꺼내야 할까.
다가온 봄, 그리고 농부들의 맥주
봄에는 '세종' 맥주를 마시기를 권한다. 세종은 벨기에 남부 왈롱 지방, 그리고 프랑스에서 만들어지던 에일 맥주다. 혹여 '세종'이라는 이름 때문에 유럽 사람들이 세종 대왕에 대한 존경심을 표했다는 착각은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종(Saison)이란 프랑스어로 '계절(Season)'을 의미한다. 농한기인 겨울에 만들어, 농번기인 늦봄과 여름에 농사를 지으며 마셨기 때문이다.
사과 같은 과일을 연상시키는 효모 향, 그리고 약간 쿰쿰한 냄새가 코를 뒤덮는다. 아련한 단맛과 매운 향 역시 포착된다. 라거 못지 않게 가볍게 목을 넘어간다. 일을 방해할 정도로 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에 도수가 비교적 낮다.
우리나라의 농부들이 일을 하다가 쉬면서 막걸리와 새참을 먹는 모습을 생각해도 좋겠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종은 미국에서 '농가 에일'이라는 뜻의 팜하우스 에일(farmhouse ale)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토록 향긋한 세종 맥주를 맛보고 싶다면, 어떤 맥주를 마셔야 좋을까? 벨기에의 듀퐁 양조장이 만드는 세종 듀퐁(Saison Dupont)을 권한다. 세종 맥주를 현대식에 맞게 재현한 맥주로서, 이 스타일에 입문하는 데에 있어 가장 좋은 선택지다. 무엇보다 대형 마트에서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이 강점이다.
국내의 크래프트 맥주 브루어리에서도 세종을 만들고 있다. 맥파이 브루어리에서는 세종의 스타일과 라거의 스타일을 합친 '촌따이'를 꾸준히 내놓고 있다. 부산을 기반으로 한 와일드웨이브의 '브리즈', 매달 새로운 맥주를 내놓기로 유명한 끽비어 컴퍼니의 '봄의 모양'도 좋은 선택지다.
맥주 한 잔에 담긴 구원
가끔씩 친구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구원은 여기에 있다'고 호들갑을 떨며 말하곤 한다. 과장이 많이 섞이긴 했지만, 틀린 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좋은 음악이 인간의 감각을 확장시키는 것처럼, '맛' 역시 우리의 오감을 확장시킨다. 겨울철 동안 진득하게 숙성된 맥주가 봄과 여름, 우리의 몸 속에 들어온다. 봄을 닮은 효모의 향을 맡을 때, 이 순간에도 작은 구원이 있다고 믿는다.
볕이 좋은 날, 세종을 마셔보는 것은 어떨까. 비록 '농주'라는 정체성은 세월 속에서 흐릿해졌지만, 수백년 전 농부들이 땀을 닦으며 마시던 맥주의 맛을 더듬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