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어딘가 남과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서른에야 ADHD라는 병을 처음 알았고, 서른여덟에 성인 ADHD 확진을 받았습니다. 실체를 모르는 병에 대해 고민하는 동안 사람들 각자가 품고 사는 보이지 않는 아픔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많은 아르바이트와 직장을 거친 후 자신에게 맞는 생활을 찾은 지금, 저의 이야기를 공유합니다. 보이지 않는 장애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분들의 삶을 대변할 수는 없지만, 함께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고 손을 흔들어 봅니다.[편집자말] |
ADHD약 복용 4일차의 이야기다. 4시간 잤는데 아침 5시 반에 눈이 떠졌다. 안 하던 아침 조깅이 하고 싶었다. 동네를 휙휙 돌고 와서 클래식을 들으며 버섯을 구워 먹었다. 기분이 좋아서 빨래도 하기로 했다. 세탁기 버튼을 눌러놓고 식탁에 향초를 켠 뒤 꽂아만 뒀던 책을 펼쳤다. 이것이 행복이구나. 평소엔 몸과 마음이 다 무거워 침대에 2시간은 누워있어야 했다.
그날 나는 미루던 청소와 세금 신고를 했고, 집안을 뒤져 잃어버린 물건들을 찾아내고, 컴퓨터 바탕화면을 가득 채운 파일들을 정리하고, 휴대전화의 글감 메모를 모조리 문서로 옮겨 적고, 먼지 쌓인 훌라후프를 닦아서 돌리고, 가족에게 안부전화까지 했다. 복용 초기에 느끼는 고양감과 극적인 생산성이었다.
반대로,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 있었다. '갑자기 바보가 됐나?' 은행에서 내가 왜 왔는지 설명하는데 입에서 말이 헛돌았다. 낱말 하나하나를 심해에서 길어 올리고 있었다. 발음도 뭉개졌다. 왜 이러지? 생각하다 그날 약을 깜빡한 걸 알았다. 바보가 된 게 아니라 그게 내 '맨정신'이었다. 약효 지속 시간이 끝나면 정신은 원래 상태로 돌아간다. 마치 호박으로 돌아가는 호박마차처럼.
이럴 때 깨닫는다. 아스팔트 길을 두고 엉덩이가 들썩이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며 살았구나. 약을 먹어도 실수는 한다. 언제나 약이 잘 듣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약을 안 먹을 땐 한 발로 깡충깡충 남들을 쫓아간다면, 먹으면 두 발로 걷다가 종종 돌부리에 걸리는 것 같다.
뭣이 중헌디
한 번이라도 머릿속 안개가 걷힌 느낌을 받아보는 게 소원이었다. 그런데 막상 ADHD 확진을 받고 나니 약을 꼭 먹어야될까 싶었다. 나는 양방 치료에 불신이 심한 집안에서 자라 약물의 세계를 '까마귀 노는 곳'으로 생각했고, "정신과 약은 저얼대! 먹는 거 아니다"란 부모님 말씀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정확한 ADHD 진단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하다. 검사를 받으면 약을 먹게 될 것 같았고, 중독되거나 바보가 되거나 자살 충동을 느끼고 싶진 않았다(그때 이미 스트레스로 오랜 당 중독 상태였고, 갈수록 바보짓만 하고 있었으며, '이래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뭣이 중헌디?).
약의 안전성을 알면서도 여전히 훗날의 부작용을 상상하며 묘한 불안을 느낀다. 맨정신의 기능 수준이 그대로 있는지 궁금해져서 자주 단약했다. 하지만 인생의 반을 치료받지 않고 살아본 나로선 뭐 크게 잃을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어린 자녀의 약물치료를 망설이는 것도, 성인ADHD인 중 약물치료를 긍정적으로 보는 입장이 많은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잃을 게 많은 상태에서는 두렵다. 그러나 이미 많은 걸 잃고 난 뒤에는, 두려움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진다.
이게 남는 장사일까
성인ADHD인이 자신에게 맞는 약을 찾는 데 최소 6개월 정도 걸린다. 사람마다 듣는 약의 종류와 용량, 약효와 부작용이 다 달라서 반응을 지켜보며 찾아나가야 한다. 몸에서 "OK, 진행시켜!"라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는 "이번엔 구미에 맞으시옵니까?" 하며 여러 번 시도하는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은 약은 없지만.
나는 아무래도 '진단운'이 '약운' 쪽으로 몰린 것 같다. 처음에 시도한 약을 한 번 증량한 뒤로 3일 만에 효과가 나타나 그대로 정착했다(1~2주 먹어야 효과가 나타나는 약인데, 증상이 심하면 반응이 잘 나타난다고 한다).
부작용의 악명을 익히 들었지만, 첫날은 당황스러웠다. 심장이 성질부리듯 뛰고, 머리가 핑핑 돌고, 먹은 것도 없이 구역감이 들었다. 입안이 사막화되고 팔다리가 저리고 뒤통수에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 폭풍은 한두 시간 만에 지나갔으나, 입맛이 없어져 밥을 먹으면 음식 모양 모형을 씹는 것 같았다. 밤에는 선잠을 자다 새벽 2~3시에 깨서 눈이 말똥해졌고 꾸역꾸역 잠들면 유체이탈하거나 토하는 꿈을 영원처럼 꾸며 가위에 눌렸다. 세상엔 공짜가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서서히 약해졌다. 2주가 지나자 내 몸이 약 성분과 오붓하게 마주 앉아 쎄쎄쎄를 하기 시작했다. 요즘은 입맛도 되돌아왔고 대체로 9시간 넘게 푹 잔다. 약발이 돌면 머릿속 5개의 라디오 채널 중 3개는 꺼지고 1~2개로 정리된다. 외부의 개입으로 내부의 지배에서 해방되는 기분. 이 거래는 나에게 유리하다는 게 지금의 생각이다.
당위성보다 결과
ADHD 치료제가 증상을 개선할 확률은 80%에 이른다. 하지만 약이 모든 증상을 해결하진 않는다. 내가 먹는 '스트라테라'는 체내 노르에피네프린 양을 늘려 주의집중력을 높이고 불안감도 잡아준다. 하지만 도파민에 관여하지 않으므로 충동성과 과잉행동 조절 효과는 없다. 일의 우선순위를 모르는 습관도 여전하다.
약이 좀 편하게 걷도록 돕는 신발이라면, 사고방식은 걸음걸이나 자세의 문제다. 좋은 신발을 신어도 걷는 법이 잘못됐다면 몸에 무리가 올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인지행동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는 게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자신과 세상을 인지하는 틀(자동화된 사고, 인지오류, 핵심신념 등)은 따로 바꿔나가야 한다.
어떤 장애든 정도와 사람에 따라 불편을 줄이는 요령은 다를 수 있다. 가족치료 전문가 리베카 울리스는 정신질환의 약물치료에 대해 '당위성보다 결과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담과 경두개자기자극술, 생활환경 바꾸기, 명상과 운동 등 다른 과학적인 방법으로 만족스럽게 살 수 있다면 그걸로도 좋을 것이다.
다만, 약물에 두려움과 거부감이 크다면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약이 능사는 아니지만, 한 번 발들이면 끝장인 금단의 영역도 아니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고려해서 상황에 맞는 선택을 하면 된다.
막연히 고민하기보다 여러 입장에서 쓴 책들을 읽어보면 좋겠다. 책을 읽기 어렵다면 인터넷 정보를 참고할 수 있지만, 자신의 믿음을 강화하는 정보만 취하는 '확증편향'에 빠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환자들의 블로그나 영상 기록도 다양하게 참고하되, 약효와 부작용은 개인차가 크니 혼자 결론짓지 말자. 마음에 걸리는 부분은 전문가에게 터놓은 뒤 다시 생각해도 늦지 않다.
주체적인 치병생활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겐 치료를 위한 상호작용도 도전이 될 때가 많다. 나는 하려던 얘길 잊고 횡설수설하기 쉬워서 진료실에 들어가기 전 할 말을 메모한다.
메모를 보면서도 망설였다. 이런 걸 물어봐도 될까? 예민하고 귀찮은 환자라고 생각하진 않을까? 지금 만나는 주치의 선생님께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불안도가 높다 보니 자꾸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환자는 자기 상태를 알리는 일과 친해질 필요가 있다. 평생 함께 갈 반려병이 있다면 더더욱. 이와 관련해 알게 된 점을 아래에 적어본다. 기본적인 것들이지만 스스로 챙기지 않으면 치료가 지연되기도 한다.
1) 질문은 환자의 권리다. 부작용 때문에 계속 약을 먹어야 할지 고민된다면 방문 없이 전화로 물어도 된다. 성인ADHD를 진료하는 병원이 주변에 많지 않을 수 있지만, 환자의 질문을 잘 받아주지 않는 병원은 웬만하면 바꾸는 게 좋다. 치료에서 치료자와의 신뢰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2) 약 처방을 받을 때는 과거 병력과 다른 약물에서 겪은 반응을 확실히 전달할 필요가 있다. ADHD 서면검사 시 질문지에 병력에 대한 질문이 포함되기도 하는데, 많은 답변을 검토하다 보면 주치의도 가볍게 넘길 수 있다.
3) 약물일기(복용일지)를 쓰자. 복용 날짜와 시간, 느꼈던 약효와 부작용, 한계 등을 기록해 두면 진료 때 할 말을 정리하기도 쉽고,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문제점을 판단하는 근거도 된다. 특히 처음 약을 먹거나 약을 바꾼 뒤라면 초반 며칠이라도 꼭 기록하는 게 좋다.
약을 먹어서 좋은 점 중 하나는 이거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의도한 삶을 살아볼 자신이 생긴다는 것. 다음 달의 나는 약을 먹고 있을지, 자연인 상태로 하루를 허우적대고 있을지 알 수 없지만, 어느 쪽이든 주체적인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태도 자체가 치료의 방법이니까. 나아질 길이 있다는 것, 다르게 살아볼 여지가 있다는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다.
덧붙이는 글 | * ADHD 약이 '공부 잘하는 약'으로 오남용되는 문제에 대해: ADHD인은 도파민, 노르에피네프린 등 신경전달물질이 불균형 상태이고, 약은 이 균형을 맞춰 증상을 완화한다. 그러므로 증상이 없는 사람이 ADHD약을 먹으면 균형이 깨져 정신증이나 파킨슨병 발병 위험이 급증한다. 참고로 기억력 증진은 약효에 없다. (참고: ADHD 치료제 먹으면 진짜 성적 올라갈까? 2021/09/04 조선헬스 https://m.health.chosun.com/svc/news_view.html?contid=2021090301664)
* 치료 방법의 병행에 대하여: "미국에서는 대략 50% 가량의 ADHD 아동이 약물치료를 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대략 16% 가량의 ADHD 아이들이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전 세계적으로는 14% 가량만이 약물치료를 받고 있으니 약물치료와 관련해서는 아직도 충분한 아이들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약물치료가 ADHD치료의 최후 수단은 아니다. 또한 약물치료를 한다고 해서 상태가 더 심각하다는 의미도 아니다. 다양한 치료와 함께 통합적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어느 단계라도 약물치료를 같이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더 옳다. 2002년 미국 국립보건원 연구 결과, 약물치료와 행동치료를 같이 할 경우 치료 성공률은 68%, 약물치료만 단독으로 하였을 경우는 56%, 행동치료만 단독으로 할 경우는 34%의 치료 성공률을 보였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ADHD의 치료', 대한신경정신의학회)
*본문 참고도서: 이성직, 『ADHD 전문가를 위한 치료 지침서』, 학지사. / 반건호, 『나는 왜 집중하지 못하는가』, 라이프페이지. / 호시노 요시히코, 『발달장애를 깨닫지 못하는 어른들』, 이아소.
* 브런치에도 연재합니다. (https://brunch.co.kr/magazine/adhdworker)
* 다음 화는 '23회기의 상담 후 느낀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