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인수위가 발표한 국정과제에는 여성가족부폐지가 없었으나 소위 이대남 여성혐오로 대통령이 당선된 국민의힘은 여가부폐지안을 발의하였습니다. 기본 여가부 관련 사업도 다른 부처와 같이 하는 방식으로 업무 분장을 하여 여가부의 실질적인 힘을 뺄 뿐 아니라 여가부 폐지 법안 상정까지 한 것입니다.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도 구조적 성차별을 외면하는 윤석열 정부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에 여성, 인권단체들로 구성된 ‘여성가족부폐지 저지를 위한 공동행동’은 다양한 위치에 처한 사람들에게 성평등 전담기구가 왜 필요한지를 연재합니다.[기자말] |
지난 5월 6일, 권성동 의원은 여성가족부를 폐지하고 청소년 및 가족에 관한 사무는 보건복지부로 이관하겠다는 내용의 '정부조직법 일부개정 법률안'을 대표로 발의했다. 여가부 폐지를 주장해 온 이들은 마치 이 일이 여성가족부의 기능을 쪼개어 보건복지부, 법무부, 고용노동부 등으로 이관하면 되는 단순한 일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이게 그렇게 단순한 일일까? 정부가 고민하고 추진해야 할 역할이 정말 이 정도 수준이어도 되는 것일까? 정부 각 부처는 그저 기능적인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인가? 여성가족부 폐지에 반대하고 있는 사람들은 왜 성평등 전담 부처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을까.
6월 12일 저녁 MBC에서 방영된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는 발달장애인의 가족이 처한 어려움과 돌봄 체계의 문제를 다루면서 독일과 미국의 사례를 소개했다. 독일의 경우 가족의 소득이나 재산 소득에 관계 없이 한 번 장애인으로 등록이 되면 누구나 평생 국가 책임의 돌봄 체계 하에서 지원을 받을 수 있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개인별 특성에 맞추어 일상생활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개인에 따라 작업장에도 갈 수 있고, 집이나 주간보호센터에서 돌봄을 지원받을 수도 있다. 필요한 장소로의 이동 또한 당연히 지원된다. 당사자가 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함께 조직하고 지원함으로써 사회의 일원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도 1969년 제정된 발달장애인지원법에 따라 지역별 지원센터에서 특수교육, 주간보호, 직장, 주거시설, 이동 서비스를 지원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다.
여기서 더욱 주목할 점은, 이러한 지원 프로그램이 있어 가족들이 돌봄을 전담하느라 소진되지 않고 다른 일상을 조직할 수 있으며, 활동보조사 자격증을 가지고 자신의 자녀를 돌볼 경우에는 주 정부에서 임금도 지급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의 현실은 어떨까. 산전검사는 지원하지만 돌봄에 대한 지원 체계는 턱없이 부족하다. 앞서 언급한 독일이나 캘리포니아주의 사례에서처럼 태어난 이후의 지원 체계가 탄탄해야 출산 후의 양육에 대해서도 적절한 지원 방식을 상담하고 계획해 볼 수 있을 텐데 지금 한국에서는 산전검사에서 장애가 확인되면 그다음은 온전히 가족과 개인의 책임으로 남겨질 뿐이다.
알아서 지원 체계를 찾거나, 임신중지를 고려하게 되지만 그에 필요한 비용도, 안전한 병원을 찾는 일도, 출산할 경우의 양육 책임도 모두 거의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지금까지 한국 정부는 그저 혼인과 혈연 관계 중심의 가족 단위로 돌봄 책임을 전가한 채 인구정책에 따라 여성들을 처벌하거나 출산을 통제하고, 장애나 질병이 없는 노동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을 두었을 뿐, 이 사회에 태어나 다양한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고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과 성평등 전담 부처가 필요한 이유
독일이나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사례에서처럼 국가와 지자체가 각 개인의 필요에 맞추어 관련 예산과 지원 시스템을 책임지는 돌봄 체계를 만드는 일은 기본적으로 가족과 여성에게만 전가되어 왔던 돌봄 책임에 대해 고민하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다.
이 과정에서 성평등 정책은 단지 여성이나 남성에게 무엇을 지원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법적인 성역할에 맞추어 불합리하게 짜 맞춰져 있는 사회의 다양한 구조적 문제들을 다시 보고 재조정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이 마치 별도의 예산이 책정되어 있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성 인지 예산 분석 제도 또한 이러한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에 더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으로 성평등 정책이 수립된다면 보건의료, 사회복지, 지역사회, 노동, 교육 등 정책 영역 전반을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정책의 기획과 실행을 모색해 볼 수 있다.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 보장 정책은 차별•강요•낙인•폭력 없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존중받고, 원하는 사람과 가족이나 돌봄 관계를 맺으며, 성 건강과 피임•임신•출산•양육 등에 관한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임신•출산과 양육에 관한 건강과 권리 보장은 돌봄 체계의 구축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의 보장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교육부 등이 따로따로 각자의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고 선별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성평등 관점에서 통합적인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리고 이 관점과 방향을 명확히 세워 정부에 로드맵을 제시하고 각 부처의 역할을 조정할 책임 기구가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여성가족부의 폐지가 아닌, 성평등 전담 부처가 필요한 이유이다.
'역사적 소명'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여성가족부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여성가족부가 "역사적 소명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역사적 소명'은 아직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통합적인 성평등 정책을 수립하고 책임 부처로서 힘있게 추진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국가의 경제성장 계획과 인구정책에 맞추어 매우 제한적으로 일자리 지원이나 보호•피해예방 정책, 한정된 지원 정책의 역할만을 수행했던 것이 여성가족부의 한계이고 문제점이었다.
다른 정부 부처와 마찬가지로, 여성가족부도 한정된 예산과 단절적인 제도 안에서 취약계층 여성과 청소년이 자신의 취약성을 통해서만 최소한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유지해 왔다.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하는 방향이 아닌 모성보호나 위기임신 지원 같은 협소한 틀에 머물러 왔다. 성평등 정책의 방향을 통합적인 관점과 역할로서 고려하지 못하고, '양성평등'이라는 정책 목표 하에 오히려 기계적인 남녀의 평등의 수준에 머물거나, 성소수자를 포함하느냐 마느냐는 식의 협소한 논의 틀에 흔들려 온 것이 사실이다.
여성가족부는 폐지될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한계와 문제들을 수정하여 이제부터라도 '역사적 소명'에 제대로 나서야 한다. 한정된 제도에 사람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들에게 어떻게 하면 통합적인 성평등 정책을 통해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를 보장할 것인지, 이를 위한 돌봄 체계와 다양한 돌봄 관계를 보장하는 가족/생활동반자 정책, 사회보장•노동•교육•주거•보건의료 등의 정책은 어떻게 수립되어야 하는지를 제대로 고민하고 추진하는 정부 부처로서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원래 성평등 책임 부처로서의 여성가족부가 실현해 나갔어야 할 '역사적 소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