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수정 : 20일 오후 4시 51분]
제초 작업이 한창인 5월이 지나고 6월이 오면 옥수수는 훌쩍 자라 머리 위로 향긋한 꽃을 피운다. 꽃이 지고 한바탕 수정을 마치면, 6월 말부터는 여름비를 맞고 자라 속이 꽉 찬 맛 좋은 옥수수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옥수수가 자라는 과정이다.
그런데 "무심하게 심어 두고 큰 신경 쓰지 않아도 제때 비만 맞으면 성인 남성 키만큼 자란다"는 '구황 작물' 옥수수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6월 22일 국가가뭄 정보 포털에 따르면 지난 3개월 동안 충북 옥천군 강수량은 평년 대비 44.7% 수준인 143.1mm에 그쳤다. 충북도 최근 3개월 누적 강수량(121.9mm)도 평년(245.7mm)의 반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그야말로 '심한 가뭄' 상태다.
가뭄이나 장마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고, 걸지 않은 척박한 땅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구황 작물 옥수수도 이런 가뭄 앞에선 맥을 못 춘다. 이토록 심각한 가뭄 속에 우리 옥수수 농가는 얼마나 갈증을 느끼고 있을까.
[금암리 김순옥씨 농가] "극심한 가뭄 속 짧은 비, 한숨 돌렸지만... "
오랜 시간 대전에서 인삼 농사를 짓던 김순옥(67)씨는 몇 년 전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로 터전을 옮겼다. 농촌에 점차 일손이 부족해지고, 나이가 들면서 손이 많이 가는 인삼 농사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현재 김순옥씨는 금암리 밭 300여 평에 옥수수, 녹두, 동부, 마늘, 고추, 고구마, 야콘, 울타리콩, 호박 등을 조금씩 재배하고 있다. 대표 작물은 옥수수다. 지난해부터는 로컬푸드 직매장을 통해 생옥수수뿐 아니라 냉동 옥수수, 말린 옥수수 등을 판매하기도 한다.
점차 판매량이 안정화된 옥수수 덕분에 웃을 일이 많았던 지난 시간과 달리, 올해 김순옥씨의 시름은 짙어지고 있다. 극심한 가뭄 때문이다.
"엄청나게 가물어요, 올해는. 이런 가뭄 처음 봐요. 지난주엔가 비가 아주 조금 왔는데, 땅속까진 충분히 적시질 못했어요. 그 이후에 오늘 조금 또 오고. 장대비 소리는 들어본 지 오래고, (땅 표면만) 젖는 비조차도 잘 안 와요. 오늘도 이게 비가 오는 건지, 마는 건지..."
6월 14일 전국적인 비 소식이 타들어 가는 마음을 잠시나마 설레게 했건만, 이날 김순옥씨의 밭이 있는 동이면 강우량은 9mm, 군내 옥수수밭이 가장 많다는 안남·안내의 강우량도 고작 9mm에 그쳤다. 그마저도 지표면을 간신히 적시는 정도로만 내렸다가 그치길 반복해 막상 땅속 깊은 곳까지는 골고루 적시지 못했다. 한숨은 돌렸을지언정, 해갈은 역부족이었다. 키가 크고 잎이 넓은 옥수수가 줄지어 심긴 옥수수밭에는 심지어 드문드문 비가 닿지 않은 흙도 보였다.
"거름 주고 비 제때 오면 자라는 게 옥수수라지요? 지금껏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없었는데, 올해는 그야말로 가뭄이라는 걸 실감하네요. 지난주에는 인삼 농사 때 쓰던 커다란 통에 물을 가득 담아서 하루에 두 번씩 날라다 콸콸 붓기도 하고... 그 짓을 온종일 했는데도 역부족이더라고요."
옥수수가 성인 남성 허리보다 높이 자라는 최고 성장기 6월, 최소한의 수분마저 섭취하지 못한다면 수확량이 적어지는 것은 물론 옥수수의 크기도 충분히 자라지 않는다. 수확한다고 해도 알이 부실하다. 하지만 당장 그의 앞에 닥친 걱정은 생산량 감소나 옥수수 크기가 아니다.
"지금까지 옥수수 농사를 몇 해 하면서 약을 한 번도 치지 않았거든요. 올해는 가뭄에 벌레나 진딧물이 생겨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어요. 약을 써야 할까 싶은 마음이 드는데, 무슨 약을 쳐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땅을 말리는 가뭄에 옥수수 성장 속도도 느리다지만, 수분 부족으로 인한 진딧물과 벌레 피해 수준도 예년과는 확연히 다르다. 줄기나 나뭇잎 구석구석 구멍을 뚫어 못살게 하니 제대로 된 열매를 맺지 못할까 근심도 깊다. 평소 사용하지 않던 약을 쓸 생각에 겁이 나고, 어떤 약을 써야 하는 지도 몰라 조언을 듣기 위해 밭 근처 농약사를 찾는 일까지 생겼다.
"풀 매느라 힘들었던 지난달(5월)에는 6월이 되면 옥수수 크는 재미에 즐거울 일이 많을 줄 알았죠. 그런데 막상 6월이 되니 비는 없고 벌레만 보여 걱정이 크네요. 갈수록 기후를 예측하기 어려워진다는데 어떤 대책이 필요할지 부지런히 생각해봐야죠."
김순옥씨의 밭에 자라는 작물만 수십 종. 독한 가뭄에 목타는 작물이 어찌 옥수수뿐일까. 상대적으로 가뭄을 덜 타는 작물인 옥수수까지 속을 태우니, 김순옥씨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올해는 가물어서 고구마도 늦게 심었어요. 고구마는 심고 나면 바로 며칠간 물이 많이 필요하거든요. 사람이 주는 데는 한계가 있어요. 주면 바짝 마르고, 또 마르고. 그럼 공들여 심는 게 소용이 없잖아요. 100여 평 호박도 모종을 두 번이나 밭에 옮겨 심었는데 자라질 못해서, 지난달(5월)에 세 번째로 옮겨 심었고요. 돈이 나가더라도 농사꾼이 별수 있나요? 계속 하늘 보고 땅 보고 그저 심어보는 수밖에..."
[대천리 윤종순·장야씨 농가] "올해 가뭄, 지난해 폭염... 이상기후 심각"
옥천읍 장야리에 거주하는 윤종순·장야(61)씨는 8년간 직장 생활과 300여 평 옥수수 농사를 병행했다. 장야씨가 직장을 그만둔 후 본격적인 농사에 뛰어든 건 2년 전. "연구를 통해 맛있는 옥수수를 더 많이 생산하고 싶다"는 욕심에서다.
농사 시작 당시에는 하수오(약초로 알려진 덩이뿌리 식물)와 옥수수를 비슷한 비율로 재배했지만, 판로 개척이 어려웠던 하수오를 과감히 줄여 지금은 밭의 95%가 옥수수다. 장야씨는 "오랜 시간 농업에 종사해온 건 아니지만, 올해 극심한 가뭄을 겪으며 '밭농사의 위기'를 뼛속 깊이 체감한다"고 말한다.
"수로가 있어 물을 댈 수 있는 밭은 상황이 좀 낫죠. 수로나 관정이 없는데 평수가 넓은 곳은 막막해요. 그나마 연못이 있어 물을 댈 수 있었는데 올해는 가뭄이 얼마나 심한지 연못 물까지 바짝 말라버렸어요. 물을 댈 엄두조차 안 나더라고요."
옥수수 잎이 '뱅뱅 돈다'는 건 수분이 부족한 잎이 마르며 점차 오그라든다는 뜻. 그 말을 그저 관념적으로만 알았는데 연못의 물까지 다 말라버린 올해 옥수수가 '뱅뱅 돈다'는 게 뭔지 실감하게 됐다.
밭작물 가뭄 정도는 토양 중 작물에 유효한 수분의 비율을 뜻하는 '토양 유효 수분율'을 기준으로 나타낸다. 한국농어촌공사 농업가뭄 관리시스템 ADMS에 따르면 2021년 6월 옥천군 밭 토양 유효 수분율(토양에서 작물이 이용할 수 있는 수분 총량 대비 현재 수분 비율)은 정상 단계인 93%, 반면 올해는 44%로 지난해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가뭄단계는 '주의'다(이 상태가 10일 이상 지속 되면 '심함', 15% 이하로 감소할 때는 '매우 심함').
가뭄에 말라버린 것은 밭과 연못만이 아니다. 농업용수 등으로 사용하는 군내 저수지 저수율도 눈에 띈다. 올해 5월 초 97%에 달했던 저수율은 6월 말인 지금 50%까지 떨어졌다. '떠 갈 연못 물도 없다'는 장야씨의 말이 과장이 아니다.
"가뭄에 스프링클러나 분수 호스가 유용하긴 하죠. 밭을 적셔서 작물을 자라게 하니까요. 물이 아주 부족한 것보다야 낫겠지만, 저는 이런 방편으로 키운 작물은 비를 맞고 자란 작물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봐요."
아쉬운 대로 수로나 관정, 연못에서 물을 길어 공급한다고 해도 비 그 자체가 작물에 주는 영양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는 것이 장야씨의 말이다. 크기도, 양도, 맛도 비를 맞고 자란 것보다는 못하다는 것.
그는 올해와 같은 심각한 가뭄 피해를 줄이거나, 갈수록 예측할 수 없는 기후에 대비하기 위해 밭에 물을 대주는 농업용 호스나 분수 호스, 스프링클러 등 기후 상황을 보완할 수 있는 지원이 밭작물 농가에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작물이 실제 때마다 맞는 비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어 '인공'은 농사에 있어 최선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올해는 '가뭄'으로 이상기후가 드러났다면, 지난해 '8월 폭염'이 그랬죠. 옥수수가 한꺼번에 익어버려 공판장에서도 옥수수를 받아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창고에 쌓인 옥수수를 결국 소에게 먹일 수밖에 없었던 눈물겨운 일도 있었죠. 냉해나 서리 피해도 말로 다 못 합니다."
4월 9~10일경, 옥수수 씨앗을 파종한다. 옥수수 잎이 3~4장 올라오기 시작할 때 10~15cm 정도 자라면 옥수수를 밭에 옮겨 심는다. 그맘때 날씨가 옥수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친다.
"4월 15~17일경 오전 5~7시 사이에 영상 3℃ 이하로 떨어지면 옥수수는 서리 피해를 봅니다. 옥수수가 서리를 맞으면 잎새가 하얗게 탑니다. 수확해도 비린 맛이 나고 제대로 익지도 않습니다. 차진 맛도 떨어집니다. 매해 서리 피해를 조금씩 입었는데, 올해는 좀 상황이 나았습니다. 덕분에 성장이 수월하고 수확도 빠를 줄 알았죠. 그런데 이렇게 가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여름철 태풍 여부도 관건이다. 옥수숫대 위에 열매가 달리니, 휘청이다 쓰러지기 일쑤인 것. 비바람에 옥수수가 쓰러지면 빛을 받은 쪽만 알이 맺히는 일도 발생한다. 옥수수는 알이 꽉 차고 크기가 크고 찰질수록 가격이 높아지게 마련. '속없는 옥수수'는 당연히 상품 가치가 떨어질 수밖에. 그런데 장야씨가 말하는 '알찬 옥수수'를 만드는 조건은 날씨뿐만이 아니다.
"농약이며 살충제, 기후 위기로 인해 벌이 사라진다는 기사 보셨죠? 벌이 없으면요, 옥수수도 어렵습니다. 올해는 의아할 정도로 벌이 없어요. 벌이 없으면 옥수수도 수정이 어려워요. 손으로 흔들고 다니면 된다고들 하는데, 벌이하느니만 못하죠. 원래는 옥수수꽃이 피면 까맣게 벌이 달라붙는데... 수정이 제대로 안 되면 옥수수 알갱이가 꽉 차질 못하고 속이 빕니다. 내년부터는 벌을 직접 키우기라도 해야 하나 고민입니다."
장야씨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이상기후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각 농가의 노력에 더해 농촌진흥청과 지역 농업기술센터의 노력 역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본 적 없는 생소한 증상이 생기면 농촌진흥청과 농기센터를 찾아 문의하곤 합니다. 하지만 답이 석연찮은 때가 많고, 농가보다 사례나 정보가 뒤처지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기후에 따른 여러 환경에서 농가보다 선행한 다양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묻는 것은 물론이고, 농사짓는 사람에게 필요한 속 시원한 대답까지 내놓을 수 있는 연구가 필요한 거죠."
마지막으로 그는 기후 재난, 이상기후에 맞서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록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장야씨는 파종이나 수확 시기, 사용한 거름과 양, 날씨와 기후에 따른 수확량과 옥수수의 모양 등을 기록하는 일이 기후 위기에 장기적으로 대응하는 중요한 방법이 될 것이라 말했다.
"사람들은 농업의 중요성이 줄어들지 모른다고 말하지만 저는 단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후위기 시대 농업을 경험하는 첫 세대로서 다음 세대가 의지할만한 정보를 남겨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기록'이라는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월간옥이네 통권 61호(2022년 7월호)
글‧사진 서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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