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기사] 트럭이 나를 치었다, 내 일상이 부서졌다 http://omn.kr/1z8y5
사고가 난 곳 바로 건너편에는 119센터가 있었다. 그곳 근무자들이 나를 응급차량으로 이송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제주권역외상센터인 한라병원으로 이송되었고, 낯선 병원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3인실에 며칠 지내던 중, 4인실에 창가 자리가 났다며 이사를 권하기에 그곳으로 옮겼다. 침대에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하늘이 보였다. 누워있는 침대가 내 공간의 전부인 나에게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선물이었다.
내 침대와 간병인 침대 사이는 간호사나 의사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1~2평 정도 될 듯한 공간이 나와 간병인의 방인 셈이다. 커튼 바로 너머 손을 뻗으면 닿을 곳에 다른 환자의 침대가 있었다. 부서진 몸에 온 신경이 가있는 터라 그 공간이 좁다거나 답답하다는 생각은 거의 들지 않았다.
트럭과 부딪친 왼쪽 종아리뼈, 골반, 갈비뼈가 부러졌고, 입원 8일째 골반수술이 진행되었다. 좀 까다로울 수도 있다는 수술 설명을 대략 들었다. 지금 몸 아픈 것이 우선이라 앞으로 있을 수술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 코로나로 모든 면회가 금지된 상태였는데,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그 앞에 있던 언니와 잠시 눈을 맞출 수 있었다.
죽는 게 이상하지 않을 순간을 지나쳤다
눈을 떠보니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수술은 잘 됐다고 했다. 내가 받은 의료 자료를 살펴보니 한 시간 정도 수술이 진행되었다. 깨진 뼈를 잇기 위해서는 꽤 많은 살을 가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수술의 흔적은 작은 상처 자국 정도로 남아있었다. 의료 기술의 발전이 놀라웠고, 성공적인 수술로 부서진 내 몸을 치료해준 의사 등 의료진들이 고마웠다.
입원 며칠 후 정신이 조금씩 들다보니 통증이 몰려왔다. 먹는 진통제는 기본이었고, 그것으로 통증이 가라앉지 않으면 링거 진통제가 들어왔다. 그것으로도 역부족이면, 마약성 진통제가 링거에 더해졌다. '너무 아파요'라고 애원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나는 그렇게 했다. 언제까지 이 통증이 계속 될지 공포가 밀려왔다. '아프지만 않다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수술 후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링거 진통제 없이도 편히 잘 수 있는 날이 찾아왔다. 그 순간만큼은 지상 최대의 소원을 이룬, 누구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날아다닐 듯했다. 그 힘든 통증의 시간도 지나갔으니, 병원에 누워있어야 하는 이 시간도 지나가리라는 긍정의 에너지가 피와 함께 몸 속을 힘차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통증을 느끼지도 못할 만큼 몸의 많은 부분이 고장 나있던 상황, 극도의 통증의 시간, 그리고 그 통증으로부터의 해방의 시간이 지났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생활이 익숙해지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과 기억들이 오갔다. 사고 장소에서 내 앞에 보이던 트럭이 스냅 사진처럼 떠올랐다.
오빠의 말에 따르면, 사고 현장에서 정신이 들어 소방대원들의 질문에 대답을 하기도 하고, 사고가 좀 났다고 오빠에게 전화도 했다 한다. 내 말투가 별스럽지 않아서 오빠는 큰 사고가 났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나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사고 며칠 후 경찰이 전화가 와서 현장 사진을 보니 트럭 밑에 자전거가 있더라는 말을 해주었다. '죽거나 혹은 머리나 척추가 다쳐서 의식에 문제가 생겼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순간이었구나'란 생각에 진저리가 쳐졌다.
최대한 피해보려고 구석으로 피하는 나를 왜 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고, 타인에게 치명적인 무기가 될 수도 있는 차를 몰면서 사람들이 너무 부주의하단 생각에 혼자 분노했다. 며칠 전까지도 당연했던 나와 어머니의 일상이 손에 닿지 못할 과거이자 미래로 멀어진 현실이 생생하면서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다.
슬기로운 환자생활을 이어가면서
내가 이전에 마음 편히 즐겨 걷던 마을길이 무서워졌다. 달리는 차가 나를 덮치는 순간이 자꾸 상상이 됐다. 앞으로는 예전처럼 마을길을 편안히 즐길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서로 지킬 것을 지키면서 서로를 지켜 주리라는 믿음이 완전히 부서졌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삶'이라는, 너무 익숙해서 특별할 것 없던 말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눌렀다. 알 수 없는 어두운 미래를 더듬으면서 살아나가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에 숨이 막혔다. 내 머리나 마음으로 감당하기 힘든 생각들이 나를 내리눌러 마치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듯 답답한 순간들이 불쑥 불쑥 찾아왔다. '으악!' 소리라도 질러야 할 것 같았다. 이런 정신적 어려움을 오랫동안 그리고 나보다 훨씬 더 강하게 겪어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은 얼마나 힘들지 아주 조금은 이해할 것도 같았다.
두 달 조금 넘게 병원 침대에 누워계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들에 대해서도 평소보다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삼키느라 목이 아프지는 않은지, 매 끼니 나오는 약을 넘기는 일은 안 힘든지, 간병사님과는 좀 친해졌는지 등 묻지 못한 말들이 많다. 나는 그래도 뼈가 잘 붙으면 예전처럼 자유롭게 걸을 수 있으리란 희망이 있지만, 그런 희망조차 없이 현재를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은 이런 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는 걸까라는 생각도 들곤 했다.
침대가 내 공간의 거의 전부인 단순한 생활 속에서도 여러 생각이 오고 가고, 또 나름 다양한 순간들을 맞았다. 5월의 어느 날인가는 우연히 간병사님의 생일인 것을 알게 되어 케이크를 사고 촛불을 끄고 옆 칸 이웃과 수다 떨며 나누어 먹었다.
또 언젠가는 노래를 흥얼거리는 나를 문득 발견하기도 하고, 간병사님과 이야기를 하다가 소리 내어 웃는 시간도 있었다. 황무지에 작은 새싹이 돋아나듯 내 삶에도 언젠가부터 노래, 웃음 등 내가 평소에 즐기던 순간들이 고개를 내밀기 시작했다. '어~ 내가 흥얼거리고 있네!', '내가 소리내서 웃는구나~'라며 속으로 놀라곤 했다.
병원으로의 이송, 수술, 나의 손발이 되어주고 있는 간병사님, 매일 전화를 해서 나의 하루를 묻는 언니들, 나의 안부를 묻고 걱정을 나눠주던 친구들의 마음 등 많은 것들이 병원에서의 내 삶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지금까지 3개월이 넘게 내 대신 오빠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렇게 다양한 관계 속에서 나의 부서진 몸과 마음과 일상은 다시 조각조각 모자이크처럼 자신의 자리를 채워가고 있다.
분노, 슬픔, 고통의 시간도 많지만, 감사와 기쁨과 즐거움의 순간 역시 존재한다. 병원 밖의 평범한 삶처럼 병원에서의 삶 역시 희노애락이 뒤섞인 삶임을 이제 조금 알아가고 있다. 처음 병원생활에 비교하면, 말도, 웃음도, 눈맞춤도 많아진 지금의 순간을 충분히 즐기며, 건강한 내일을 위해 열심히 재활하며 슬기로운 환자생활을 오늘도 이어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