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먹는 자세에 관한 이야기다. 밥을 먹다 혼이 났기 때문이다. 쉬는 날 점심, 아내와 밥을 차려 놓고 먹는 중에 한 소리를 들었다. 다른 손으로 핸드폰을 보면서 밥을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누가 봐도 잘못된 습관. 만약 아이가 있었으면 "아빠는 보는데 왜 나는 못 봐?"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을 것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렇다. 둘 다 늦잠을 자고 띵한 머리로 나와 밥을 깨작깨작 씹으니 대화가 될 리 없었다. 그래서 SNS에서 뭐 좀 재밌는 걸 보여주면 말이 트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빵 터지는 것도 없어 핸드폰마저 깨작대던 타이밍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날아온 잔소리.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사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도 늘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밥을 먹곤 했으니까. 그만큼 내 식습관은 굳어져 있었다. 돌이켜보면 혼자서 밥을 먹을 때에는 여지없이 한 손에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핸드폰 보면서 밥 먹는 습관
부모님과 살았을 때도 내가 밥을 먹는 태도는 꽤나 불량했다. 아침에 엄마가 밥 먹으라고 하는 소리가 얼마나 싫던지. 밥 먹으라는 소리를 대여섯 번쯤 듣고 나면 그제야 마지못해 밥상에 앉았다.
그리고 나서는 포털사이트 뉴스를 뒤적이거나 티브이를 보면서 밥을 먹곤 했다. 억지로 한 수저씩 떠서 먹을 뿐 음식의 맛을 느끼려는 노력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쓸어 담듯이 먹고 나면 다시 침대로 향했다. 당연히 그때도 잔소리를 들었다. 끝내 고쳐지지 않았을 뿐.
이제 내가 밥을 차려 먹는 입장이 되니 그것이 얼마나 모자란 짓인가를 생각한다. 엄마의 가사노동을 완전히 무시한 짓이었기 때문이다. '맛있다'라는 말은 못 할지언정 가족들과 말 한 마디 섞지 않은 채 쓸어 담듯이 밥을 해치우고 방에 들어가다니.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집중해야 한다. 그것은 음식을 향한 집중이기도, 함께 밥을 먹는 이를 향한 집중이기도 하다. 가사노동을 해낸 이에 대한 존중이기도 할 것이다. 어색하다고, 심심하다고 핸드폰에 시선을 돌리는 만큼 애써 만든 음식의 맛은 희미해진다.
이는 틱낫한 스님의 가르침과도 맥이 닿는다. 스님은 자신의 책 <틱낫한의 먹기 명상 HOW TO EAT>(한빛비즈, 2018)에서 단지 음식만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는 행위를 식사에서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색함을 버리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순간, 존재를 느끼기 위해 오감이 깨어난다.
불가에서는 이를 현존(現存)이라고 칭한다. 현존의 상태에선 사과 한 조각을 먹을 때도 나무가 맞았던 비와 햇살을 생각할 수 있다. 과장된 이야기가 아니다. 이탈리아 투스카니의 푸주한(소, 돼지 등 동물을 잡아서 파는 사람)들은 좋은 소의 고기에서는 길게 자란 풀과 거친 언덕의 향이 난다고 표현한단다.
만화 <미스터 초밥왕>에서 심사위원들이 고등어 초밥을 집어먹자마자 일대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로 변하는 건 과장일지언정 허풍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현존의 상태인 것이다.
음식을 있는 그대로 음미할 때 우리는 식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게 된다. 모두 핸드폰을 내려놓고 미식의 경지에 도달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핸드폰을 내려놓는 '혼밥'이라면 잠시 분위기를 환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하며 먹는다면 그 사람과 즐거운 추억이 될 것이다.
최고의 밥도둑
그 가르침을 따라 밥을 먹어보기로 했다. 아내가 친구들과 놀러 간 날. 티브이도 스마트폰도 켜지 않은 채 냉장고에서 시금치 나물과 달래장을 꺼냈다. 수저를 들어 밥을 한 숟갈 먹고 시금치 나물을 씹었다.
음, 시금치가 이런 맛이었군. 시금치의 흙내와 달래의 아린 향이 그날따라 새롭게 다가왔다. 지렁이가 꾸물대는 땅의 생명력을 음미하는 경지까지 도달하진 않았지만, 분명 내가 평소에 먹던 반찬의 맛과는 조금 달랐다.
받아들이는 자의 자세에 따라 음식의 맛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는 걸까. 단출하지만 훌륭한 식사였다. 밥 먹을 때 웹툰 보지 말라는 엄마의 잔소리가 진리였음을 깨달은 건 덤. 거기까지 깨달으니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현존이 최고의 밥도둑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