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암환자가 되고 나서야 제 삶을 더 사랑하게 됐습니다. 반려자의 보살핌 덕에 더 너그러워졌고, 치료 과정 중 느낀 점을 춤으로 표현하며 밝아졌고, 삶의 깊이를 더해가고 있습니다. 나를 살리는 춤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기자말] |
지난 7월 말, KBS <인간극장>에 내 얼굴이 나왔다. <내겐 너무 소중한 그녀>의 그녀를 담당했다. 주인공으로 섭외됐지만, 촬영하며 주인공이되 주인공이 아님을 깨달았다. 내 삶이 나만의 것이 아님도.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또 다른 주인공들 덕분이었다.
시작은 <암과 함께 춤을> 1회를 연재한 4월이었다. <오마이뉴스>에 올라간 글을 본 <인간극장> 취재작가님이 연락해왔다. 몇 시간에 걸친 통화를 요약하면 대략 아래와 같은 내용이었다.
"널리 알려도 좋을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가진 분들에게 출연을 요청한다. 하지만 취재 전화가 곧 섭외 확정은 아니다."
확정은 아니라는 말, 안심이었다. <인간극장>을 잘 알진 못하지만, 공영방송의 대표 프로그램 아닌가. 그 화면에 내 얼굴이 나온다고? 상상이 쉽게 되지 않았다. 왜 나에게 연락했는지 설명한 것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사는 것처럼 살고 싶어서 살고 있을 뿐인데, 그런 내 삶을 알릴 만한 가치 있는 것으로 봐주다니.
지금에야 감동의 방향이 틀렸음을 알지만, 당시에는 마냥 신기했다. 나 같은 사람의 삶이 TV 방송으로 누군가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니? 물론 나 스스로 내가 용기 있는 사람임은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용기는 자연스럽게 나온 게 아니었다.
30대 중반, 암을 발견했다. 시속 300km로, 회사와 나를 위해 달(린다고 생각했으나 아니었던)리던 속도를 거의 멈추듯이 낮춰야만 했다. 퇴사 후 수술과 치료가 이어졌다. 병원의 설명대로 항암 약물은 각종 부작용을 일으켰다.
용기를 갖기 위해 노력했다. 정신적 피폐함과 육체적 고통을 받아들이려 삶과 죽음을 다룬 책을 찾았다. 달라진 일상과 당황스러운 감정들을 거부하지 않기 위해 춤을 췄다.
그런데 자연스럽게 삶의 방향을 전환한 사람들에 비하면 나는... 방송에는 그런 사람들이 나오는 거 아닌가?
자신감은 없었지만, 제작진의 섭외 전화가 매우 반갑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과거의 나처럼 갑자기 달리기 속도를 줄여야 하는 사람들이 나를 참고 사례로 활용해주길 바랐다.
내가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겠다 싶었다. 아 저런 사람도 저렇게 살려고 발버둥치는데, 내가 가진 건 없어도 암엔 안 걸렸는데 이 정도면 괜찮지. 이런 차원으로라도 활용되면 참 좋겠다 싶은.
촬영이 확정된다면, 내가 내 병을 어떻게 춤추며 돌보는지 일상을 전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일은, 당사자가 직접 전하는 말과 글의 비중만큼 중요한 게 또 있었다. 이제는 안다.
나와 연결된 사람들
6월 중순 촬영이 확정된 후 제작진은 약 3주 정도 나의 일상을 관찰했다. 나를 포함해 말을 할 수 있는 모든 이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동반자 '한몬'과 춤 공동체 '춤의학교 벗들', 부모님, 친구들, 은사님께 내 삶이 어때 보이는지 물었다.
제작진의 질문은 내 주변 이들에게 또 다른 씨앗으로 연결됐다. 평소 피상적으로 에둘러 말하거나, 생각만 하던 부분이 언어로 구체화됐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질문을 던지기도, 생각을 전하기도, 함께 특별한 이벤트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아버지와 굉장히 오랜만에, 적어도 십 년은 훌쩍 넘는 시간 만에, 바둑을 두었다. 어릴 적 나를 바둑학원에 보내던 추억을 제작진과 나누던 부모님, 오랜만에 그 시절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셨다.
사실 나는 이런 상황 자체가 어색했다. 무언가를 얻고 싶어서 꽤 긴 시간, 적어도 몇 년 정도 투여해본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갖고 싶은 대상에 애정과 증오를 동시에 느낄 수 있음을. 나의 경우 바둑이다.
꼬꼬마 시절 바둑 대회에서 여러 번 우승했다. 그런데 무언가를 잘한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재능을 보여 주목을 받고, 주목을 받아 전문 교육을 받다보니 욕심이 생겼다, 승리에. 언제부턴가 바둑이 즐겁지 않아졌다.
또한 사랑은 타이밍임을 아는 이들은 이해할 것이다. 한 때는 그토록 받고 싶었던, 사랑하던 사람의 관심도 때가 지난 후라면 다시 마음을 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둑을 다 끝내고 나니, 바둑과 아버지에 대한 복잡한 마음이 후련해졌다. 서로를 적으로 전제한 바둑 한 판이 끝났다. 바둑돌을 치우니, 그 아래 깔려있던 비어있는 바둑판이 드러났다.
돌이 사라진 바둑판이, 다시 살 기회를 잡은 내 인생 같았다. 한 판이 끝났다면 다른 한 판을 두면 될 일이다. 언제까지 이전 판의 아쉬움에 사로 잡혀 있을 건가. 한때는 내 세상을 힘들게 만든 애증의 대상도 사랑의 타이밍도, 뭣이 중헌디, 싶다.
바둑의 본질보다 바둑의 승리에 집착했기에 애증을 품었던 것 같다. 함께 산책하며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부녀의 이미지를 원했던 청소년 시절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는데, 여태껏 꽁해있었던 것 같다.
인생도 바둑처럼 매 한 판 최선 다해 두고, 끝난 후 아쉬움도 기쁨도 바둑돌에 묻어 담으면 될 일인데. 다시 바둑을 둘 수 있으나 집착하지 않아도 될 일인데. 이걸 이제야 알았다니.
그제야 대본 없이 나의 일상을 따라다니는 제작진의 의도가 확실히 이해됐다. 이들의 휴먼 다큐는 주인공이 전하고 싶은 특정한 모습이나 이야기를 전하기 위한 장르가 아니었다. 주인공이 일상을 살아가며 느끼는 것들을 생생하게 담는 게 중요했다. 그렇기에 주인공과 연결된 이들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제 내가 카메라에 담기는 것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카메라에 담긴다는 게 뿌듯해졌다. 세상을 향해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모습을, 지향하는 삶의 태도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다큐 속 주인공은 결코 혼자 살지 않는다. 같은 인간 종족 외에 다른 동물과 종과 사물을 만난다. 뒷산 둘레길 산책에서 만나는 나뭇잎의 흔들림, 산 중턱 공터에서 춤추며 느끼는 날벌레의 떨림,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만난 한 책 속 철학자의 고통. 카메라는 이 모든 것을 담았다.
마치 포트럭 파티(초대받은 손님들이 각자 음식을 준비해서 나누어 먹는 모임)처럼 주변 모든 것들의 합으로 내 인생의 상차림이 완성된다. 다만 부모님의 경우 평소에도 자식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을 자주 표현하시니, 그 강력한 원심력에 빠지는 대신 적절한 거리감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반대로 나의 동반자, 친구들, 커뮤니티 등에게 '나란 인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어 보이는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평소에 듣기 힘든 이야깃거리다. 마음에 있지 않아서가 아니다. 마음에 있어도 그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없을 수 있다. 혹은 이런 이야기는 너무 진지한 것, 맨 정신으로 나누기엔 부끄러운 것으로 치부하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다.
방송 덕분에 우리 주변 이들의 마음을 언어로 전달받을 수 있었다. 동반자 '한몬'의 일터 근처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는 자리에서, 춤벗들과 공연하고 밥 먹는 자리 전후로, 야외로 놀러 가는 특별한 주말 은사님 댁 옥상 테라스에서. 주변 사람의 인터뷰 장면 하나하나가 모여서, '나'의 인생이 인간극장에 막을 올렸다.
인터뷰 장면에 등장한 이들은 각기 인생의 주인공이다. 동시에 내 인생을 구성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잠시 조연으로 등장했다. 그들의 인간극장을 촬영한다면 이제 내가 조연으로 등장할 때다.
만약 나 혼자만 이야기하는 내 삶이라면 얼마나 단촐하고 무색무취였을까. 삶이란 건 나와 연결된 사람들의 다층적인 합으로 구성되는구나.
삶이라는 인간극장 속에서
방송이 끝난 후 주변 반응에 새로운 깨달음이 생겨났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건너 건너 감동을 전해왔다. '저 사람도 저런데, 나는 이 정도면 살만하지' 정도 위안받는 수준은 아니었다. 나처럼 덜 현명하게 삶을 전환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니.
나를 멋지게 보아준 누군가의 관점에 배워야 하는 것은 '우왕 나를 이렇게 봐주는 사람이 있다니' 같은 놀라움이나 감동이 아니었다. '역시 내가 틀리게 살지 않았어' 같은 자기 확신도 아니었다.
살고 싶어서 살 뿐인 내 일상에,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내가 순간순간 어떤 생각과 목적에서 행동을 하는지는 그들에게 덜 중요하다. 그저 내 삶의 모습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필요한, 감동받은 무언가를 느낀다.
타인의 삶에서 무언가를 발췌하여 내 삶에 연결할 수 있는 인생의 편집 능력, 누구나 이 능력을 동등하게 갖추고 있다는 것. 나에게 멋지다고 해주는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했던, 이제는 어렴풋이 감이 온 깨달음이다.
인간은 누구나 언제고 어떤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깨달을 수 있는 동등한 존재라는 것. 세상은 이 배움이 교차 편집되는 구성물이라는 것.
동네 골목길에서 방송 잘 봤다며 인사하는 하얀 머리의 여인, 시내 한복판에서 사진 촬영을 부탁하는 수줍은 미소, 문자와 SNS 메시지들. 이들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 혼자만이 내 삶을 만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또한 타인의 삶에 나 역시 조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각각의 분량이나 중요도는 다르지만, 모든 존재는 각각의 <인간극장> 주인공이자 조연으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다른 이의 삶을 구성함으로써 존재한다.
[곽승희의 암과 함께 춤을]
① 삭발하고... 애인과 부모님 앞에서 춤췄습니다 http://omn.kr/1yc2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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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70대 같은 30대의 몸이지만... 이 얼마나 대단한가 http://omn.kr/1zq9v
⑧ 빨래 방망이 두드리고, 고함 치고... 이거 '춤' 맞습니다 http://omn.kr/1zxoy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 송고합니다. 글쓴이는 춤의학교 연구원으로 활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