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시절, 언론고시 준비를 한 적이 있다. 매일 오후에 스터디원들끼리 모여 무작위로 하나의 단어를 던져주면 정해진 시간 내에 손바닥 만한 글 한 꼭지를 써내야 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6개월쯤 하다 보면 예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아, 대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하루를 지배한다.
가장 힘든 건 더 이상 쓸 게 없다는 기분이다. 말 그대로 더 쓸 게 없었다. 속으로 매일 절규했다. 매일 6개월 간 쓴 글이 360편이야! 여기서 또 뭘 쓰라고! 단 하루도 쉬지 않고 뭔가를 만든다는 건 괴로운 일이다. 특히나 그것이 매일 새로워야 한다면 더더욱.
매일 무언가를 만든다는 것
경험해보니 밥 차리기도 비슷하더라. 뭐든 잘 먹는 아내 덕에 매일 새로운 반찬을 만드는 강박은 없지만, '오늘은 또 뭘 하지?'라는 걱정은 결코 가벼운 게 아니다. 차라리 글은 제약 없이 쓸 수 있다. 정 쓸 게 없다면 시사 이슈에 묻어가면 된다.
집밥은 그보다 제약조건이 많다. 김치찌개? 아직 김치가 덜 익었는데. 그럼 된장찌개? 그거 어제 먹었잖아. 찜닭을 할까. 아냐, 손이 너무 많이 가. 삼겹살? 환풍기 청소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토스트? 그럼 내일 뭐 해줄지 또 고민해야 하잖아. 결국 그날 저녁은 계란과 베이컨으로 토스트를 만들어 줬다. 다행히 아내가 잘 먹는다. 하지만 임시방편. 하, 그럼 내일은 또 뭘 해야 하나.
그 무렵 때맞춰 찾아온 명절. 엄마가 준 곰탕과 갈비는 천군만마와도 같았다(역시나 어마어마한 양). 곰탕은 냉동실에 넣어 놨다가 언제든 녹여서 먹을 수 있다. 슬슬 떠오르는 과거의 자신. 너무 많으면 부담스럽다고 내 입으로 말했는데. 이래서 인생이란 좋고 나쁘고가 없다는 걸까. 어쨌든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며칠간 뭘 만들지 궁리할 필요가 없어지니 후련했다.
하지만 오병이어의 기적을 바라지 않는 한, 음식은 결국 바닥 나기 마련이다. 새로운 영감의 원천을 찾아야 했다. 쉬는 날 앉아서 SNS를 반나절 간 검색했다. 그중에서 팔로우 수가 상당한 아이 엄마 계정을 하나 찾았다. 아이가 먹는 반찬을 식판에 담아 거의 매일 피드에 올리고 있었다.
메추리알 장조림, 쇠고기뭇국, 두부조림 같은 메뉴들이 매일 다르게 식판에 담겨 나왔다. 영양 면에서도 균형이 잘 잡혀 있었다. 무엇보다 1인당 식비도 적당했다. 이 정도면 한 달 정도는 괴로워 하지 않고 뭔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호라. 망설이지 않고 바로 '팔로우' 버튼을 눌렀다.
좋은 인풋은 좋은 아웃풋을 낳는다
이제 좀 알 것 같았다. 왜 시대가 변해도 요리 프로그램이 꾸준히 사랑받는지. 경험해보니 맛있는 걸 만드는 것보다 먹는 사람이 오랜 시간 질리지 않게끔 하는 게 더 어렵다. 아무리 맛있어도 매일 같은 것만 한 달 내내 먹을 순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집밥이란 고도의 창작 행위다.
여러 요리들을 참고해야 하는 건 그래서다. 뭘 쓸지 고민하는 작가들이 타인의 책을 수없이 읽는 것처럼. 좋은 인풋은 좋은 아웃풋을 낳는다. SNS 계정들을 찾아보는 것도 좋고, 요리 프로그램을 꾸준히 시청하는 것도 좋다(외국 음식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면 해외 셰프들의 요리 채널도 꼭 구독하시라). 그 행위만으로도 자연스레 요리 실력이 는다.
그리고 가끔은 나가서 먹자. 집밥 번아웃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그러니 밥 차리는 이가 '오늘 뭐 해 먹지?'라고 물어온다면 예의상으로라도 '오늘은 나가서 사 먹을까?'라고 한 마디만 해 주자. 의견을 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배우자에게 SOS를 보내고 있다는 의미니까.
때로는 사 먹는 것이 "사랑해" "수고했어"라는 말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나처럼 벌써 이틀째 외식 중이라면 얘기는 좀 다르겠지만. 그럴 때는 "맛있는 걸 많이 먹어야 맛있는 걸 해주지!"라는 논리로 맞서자. 반박 불가능한 팩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