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누군가와 맛있는 음식이면 충분하니까."
한 식품유통회사 광고 카피 중 일부다. 해당 광고에선 맛있게 요리된 음식을 여럿이서 나눠먹는 장면들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추운 겨울 보기만 해도 따뜻한 장면들. 내가 생각하는 집들이의 로망이 거기 다 있었다. 신혼으로 그 로망을 실현할 기회!
이제 막 부부가 된 동생과 부모님이 우리 집에 올 예정이었다. 신혼부부로서 첫 집들이. 광고를 본 뒤 바로 아내와 회의를 시작했다. 한식? 중식? 이탈리안? 요리랑 담을 쌓고 살아오진 않았으니 시간만 넉넉하게 주어지면 뭐든 자신이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가 제일 큰 문제였다.
한식은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므로 웬만큼 잘하지 않고서는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없을 것 같았다. 중식은 재료만 다듬어 놓으면 조리시간도 빠르고 실패할 확률이 낮았다. 예산이 적게 나가는 게 무엇보다 강점이었다.
문제는 호불호였다. 부모님이 중식을 그리 좋아하지 않아 탈락! 태국? 역시 중식과 같은 장점을 가졌지만 호불호 때문에 탈락! 결국 남은 건 이탈리안이었다. 가격대가 좀 들지만 호불호가 갈리지 않고, 조리방식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료만 좋다면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었다.
메뉴 선정부터 까다로운 집들이 행사
그렇다면 무슨 메뉴를 할까. 어설프게 잔기술을 부렸다가 망하지 말고 안정적인 메뉴를 고르자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더불어 대화를 나누면서 식사시간이 길어질 수 있고, 방문하기로 한 인원들이 약속시간에 늦을 수도 있기 때문에 식어도 맛이 크게 변하지 않아야 했다.
그렇다면 오일 파스타보다 토마토 파스타가 더 괜찮아 보였다. 라구 파스타와 시금치 크림 스피니치(Creamed Spinach, 시금치를 생크림에 넣고 졸인 곁들임 요리), 스테이크 4인분, 채끝 구이와 아스파라거스 볶음으로 정리했다. 전날에 샬롯이나 양파를 다듬어 조리시간을 최대한 줄였다.
집들이 당일. 그럼에도 막상 조리를 시작하니 만만치 않았다. 유튜브에 나오는 레시피는 전부 4인분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계량을 전부 새로 해야 했다. 그렇게 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이 여기저기서 생겨났다. 8분이 지나면 면이 익어야 하는데, 6인분이 들어간 파스타 면은 10분이 지나도 도무지 익는 것 같지 않았다. 레어 상태의 스테이크는 아무리 익혀도 다음 단계로 넘어갈 기미가 없었다.
시금치 크림 스피니치를 만들겠다고 사놓은 시금치 한 단을 끓는 물에 넣으니 이내 한 줌도 남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으로 체에 건져 물을 꼭 짜냈다. '역시나'였다. '이거, 여섯 명이서 다 먹을 수 있나?' 싶었던 부피의 시금치는 '이걸 누구 코에 붙여야 하나' 싶은 양으로 줄어 있었다. 1인용 레시피에 무조건 곱하기 6을 한다고 그 맛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걸 그때는 몰랐던 것이다.
1인분을 만들 때의 화학작용과 6인분의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왜 라면을 한 번에 세 개 이상 끓이면 맛이 없는가' 하는 의문을 그때 품지 않았을까. 하물며 라면도 아니고 파스타에 스테이크인데. 분명 이탈리아 요리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이미 연애시절에 만들어 본 메뉴들이라는 것.
시련의 대량조리, 예상과는 전혀 다른 화학작용
그게 우리의 자신감이었다. 근데 어째서 지금은 이 모양이란 말인가! 돌이켜보면 원인은 간단했다. 살면서 6인분 이상 요리를 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긴, 라면도 3인분 이상 끓여본 적이 없었는데. 이대로 가다가는 무려 10만 원어치의 재료를 망가뜨리고 치킨과 족발로 집들이를 할 판이었다.
긴급상황. 우리는 레시피를 집어던지고 감에 맡기기로 했다. 음식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강박증에 걸린 사람처럼 재료의 변화를 체크했다. 소금 간은 최대한 적게 넣은 뒤 수시로 간을 맞췄다. 스테이크는 10초 간격으로 눌러보며 상태를 관찰했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자꾸 걸려오는 가족들의 전화. 갑자기 주문이 몰려 가게가 엉망진창이 됐을 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왜 하필 손은 두 개일까. 왜 하필 머리는 하나일까. 그렇게 발을 동동 굴러가며 음식을 했다.
레시피보다 믿어야 할 것은 자신의 '혀'
임기응변에 기댄 결과 그대로 먹을 만한 수준의 결과물은 나왔다. 예의상일지언정 맛있다는 말은 무리 없이 나올 것 같았다. 혼자서 생각했다. 그래, 최선을 다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 근데 두 번은 못 하겠다. 다음에는 그냥 족발에 탕수육 시켜야지, 하하!
다행히 집들이는 좋은 분위기에서 무사히 끝냈다. 남김없이 다 비워진 파스타 접시가 그 증거였다. 시금치 크림 스피니치 레시피를 따로 알려달라는 제수씨의 칭찬도 진심인 것 같았다. 스테이크가 조금 남긴 했지만 내 생각에 그건 맛보다는 양의 문제였다. 치킨 한 마리를 넷이서 먹고도 남기는 집안이니까.
이번 집들이에서 다시금 깨달았다. 1인분이야말로 가장 맛있는 레시피라는 사실을. 이탈리안 셰프들이 기어이 파스타를 하나하나 따로 조리하는 이유를. 하지만 주방의 생산량을 넘어서는 주문을 소화하려면 차선책인 대량 조리를 택할 수밖에 없다. 그게 가정집 집들이라면 말이다. 이럴 경우 요리할 때 예상하기 힘든 화학작용들이 벌어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둬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의심하는 것이다. 모든 감각을 동원해서. 그리고 레시피나 계량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음악도 끄고 핸드폰도 옆에서 치워 놓자. 집중해야 한다. 왜 면의 상태가 바뀌지 않지? 간은 제대로 된 건가? 강박증에 걸린 것 마냥 수시로 상태를 체크해야 비싸게 산 재료를 지킬 수 있다.
간도 최대한 보수적으로 봐야 한다. 경험상 조미료는 4인분 레시피에서 15% 늘린 양을 구해 계량하는 게 적절하다. 인원 수가 50% 늘었다고 조미료도 50% 더 치면 요리는 망한다. 소금의 농도를 그만큼 올리면 어떤 요리도 당연히 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결국 판단은 레시피가 아닌 자신이 해야 한다.
대량 조리는 그 자체로 위대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애초에 메뉴를 잘 고르는 것이다. 구성원의 나이대나 취향을 고려해야겠지만, 여러 번 집들이를 해 본 결과 가장 반응이 좋았던 건 베트남 요리였다. 맛도 산뜻하고 조리법도 간단하며 재료비도 적게 든다. 결정적으로 식어도 맛있다.
손님들이 약속시간보다 늦게 도착하거나 그들과 집 여기저기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분짜와 월남쌈은 한결같은 상태로 손님을 맞는다. 겨울이라면 여기에 밀푀유 나베 같은 일식 전골을 곁들이는 것도 좋겠다.
그럼에도 대량 조리는 분명 고된 일이다. 대체 구내식당의 여사님들과 병영의 취사병들은 수백 명분의 음식을 어떻게 매일 만들어내는 걸까. 나에게는 딱 하루 주어진 시련이었지만 그들에게는 매일 해내야 할 일상일 텐데. 대량 조리는 그 자체로 위대한 행위다. 그들에게 이 글을 빌려 존경의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