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집밥 커뮤니티에 가입했다. 적극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주로 남이 쓰는 글을 읽거나 약간의 질문들을 할 뿐이다. 사실 그 정도로도 꽤나 재밌다. 집이랑 일터 말고는 오가는 곳이 없는 내게 남이 사는 이야기를 이렇게나 많이 접할 수 있다는 건 적지 않은 일상의 환기다.
'변압기 교체 때문에 두 시간 동안 단전이라는데 냉장고는 괜찮을까요?', '집들이할 때 괜찮은 메뉴 좀 추천해주세요' 같은 질문을 하면서 적지 않은 꿀팁을 얻어가는 건 덤. 약 보름 동안 커뮤니티를 염탐한 결과 깨달은 게 딱 두 개 있다. 사람 사는 건 결국 다 비슷하다는 것. 주부로서 밥을 차리는 일이란 그게 누구든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기계처럼 차리는 집밥의 고통
이건 비단 '내일 뭐 해 먹지?' 같은 고민만은 아니다. 밥을 차리는 이의 수고를 존중하지 않는 가족 구성원들의 모습에 속을 썩이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다.
최근에 가장 눈에 띈 글은 매번 같은 루틴의 음식을 돌려막기 하듯이 만드는 주부의 이야기였다. 10년 차 주부였는데 그동안 남편에게 하루 두 끼 밥을 차려주면서 단 한 번도 맛있다 맛없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의 일상은 대략 다음과 같다. 점심이다. 근처에서 일하는 남편이 집에 온다. 손을 씻고 아내가 차려준 밥을 먹는다. 대화 몇 마디 하지 않고 10분 안에 밥을 먹는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양치를 하고 일터로 나간다. 아내는 남편이 떠난 식탁을 치우고 말없이 설거지를 한다.
밥을 차리는 즐거움을 거세당한 것 같다고 하소연한 그녀는 더 이상 새로운 걸 만들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했다. 그저 두부 부침과 콩나물국, 김치와 제육볶음을 기계처럼 차려낼 뿐. 어차피 공들여 만들어 봐야 이게 맛있는지 맛없는지도 알 길이 없단다. 그녀는 그 일상이 생각보다 꽤 우울하다고 했다. 만약 그게 내 일이었다면 어땠을까.
상호작용이 없는 결과물들은 그저 몸부림에 불과하다.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책, 아무도 보지 않는 영화와 그림을 생각해보자. 당연히 요리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먹어주지 않으면 그 요리는 그저 자원 낭비에 불과하다. 물론 집밥은 좀 다른 결이다. 책도, 영화도, 맛집의 메뉴들은 전부 모두를 위한 요리지만 집밥은 오직 식구들만을 위한 요리니까.
그만큼 집밥은 다른 창작물들과 다르게 지극히 사적이다. 집밥이 모두에게 맛있을 필요가 없는 이유기도 하다. 모두가 맛없다 말할지언정 우리만 맛있으면 되니까. 흑임자 치킨이나 산낙지 잔치국수 같은 괴식이라도 상관없다. 식빵에 케첩을 찍어줘도 괜찮다. 사적인 틀 안에서는 개인의 선언이 절대적인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냥 내가 맛있다는데 어쩔 건가.
세상 모두가 맛이 없다 해도
그 지점에서 집밥의 위대함이 존재한다. 오직 내 사람들의 지지만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 그것은 사랑이기도 하고 더불어 결혼의 본질이기도 하다. 세상이 어떻게 생각하든 나는 너를 응원하고 사랑한다. 결국 '맛있다'는 말은 그 선언의 연장인 셈이다.
다큐멘터리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속 할아버지의 삶은 그런 의미에서 교과서 그 자체라 할 수 있겠다. 제작자인 진모영 감독의 말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평생을 한 번도 음식을 맛이 없다고 하신 적이 없고 다 맛있다"라고 하셨단다. 심지어 정말 맛이 없을 때조차도. 그것이 가장 강한 사랑의 증거라는 걸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계셨던 게 아닐까?
'밥보'라는 미슐랭 3스타 식당에서 일한 경험을 적은 작가 빌 버포드는 자신의 저서 <앗 뜨거워>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이 담기지 않은 음식은 실패다." 이제 그의 말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사랑이 담긴 음식은 혼자만의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 음식의 절반은 먹는 이의 사랑으로 만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