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윤석열 '검사'는 말이 짧았다.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중 비속어도 종종 썼다. 그래서 윤석열 '후보'의 대선캠프 수석대변인을 지냈던 이양수 국민의힘 의원이 지난 19일 MBN '판도라'에서 "윤 대통령이 나를 '이XX, 저XX'라고 불렀다더라"는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주장을 "(대통령은) 이런 말을 안 한다"고 했을 때, 좀 의아했다. 내가 따로 만나지 못한 윤석열 '후보'나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때와는 좀 달라졌나 했다.
의아함은 금세 풀렸다. 윤 대통령의 언행은 검사 때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 회의' 후 직접 온 국민에게 보여줬으니까.
국민 대다수의 청력을 의심하게 만드는 해명을 내놓은 김은혜 홍보수석조차 "이XX들이"란 표현 자체를 부정하진 않았다. 다만 그 대상이 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라는, 또 '바이든'이란 이름은 애초에 거론하지 않았고 '날리면'이라고 말했을 뿐이라는 신박한 논리를 펼쳤을 뿐이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의 비속어 파문은 잦아들지 않고 있다. 한국 언론을 모두 도배한 것으로 모자라 23일 오후 2시 기준 미국 CNN 홈페이지 첫 화면도 장식했다. 같은 시각 워싱턴포스트(WP) 홈페이지에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3위가 "한국 대통령의 미국 의회 모욕이 우연히 포착되다(South Korean president overheard insulting U.S. Congress as "idiots")"이다. 정말 낯뜨거운 상황이다.
외신 도배한 대통령의 '비속어', 더 큰 문제는...
하지만 '낯뜨겁다'로 그칠 수도 없는 상황이다. 더불어민주당 A의원은 23일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실언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국민들 보기에 성과가 있으면 해프닝으로 끝난다"며 "성과는 없는데 망언까지 해버리니까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이번 대정부질문에서 계속 문제 제기한 게 (한국 자동차기업들의 피해가 예상되는) 미국의 IRA(인플레이션 감축법) 아니냐"며 "이게 단순한 보조금 문제만이 아니다. 그냥 놔두면 대한민국 산업이 공동화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리나라에서 (IRA법이 정한 전기차) 생산지 요건을 충족 못하면 미국 현지로 자동차부품업체, 전기차, 배터리 관련 업체들 다 이전해야 한다. 거기다가 중국산(핵심광물이 들어간 배터리)도 (세제혜택에서) 배제한다는데, 우리나라 제조업이 중국과 연결된 게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바이든을 만났을 때) IRA를 적극적으로 얘기해야 하는데 (48초 회동으로 그치는 등) 실책한 거고.
'아무튼 우리가 최대한 대안을 찾아보려고 했다'는 메시지라도 나와야 그 다음 단계로 가는데... 오히려 미국 쪽에서 기분 상하는 얘기만 해버린 것 아닌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도 미국에 갔다는데 대통령이나 외교부가 저러면 힘을 받겠나. 나라도 '당신 대통령이 우리나라 와서 망언이나 하는데 그럴 마음(한국에 협조할)이 있겠냐'라고 할 것 같다."
문재인 청와대에서 일한 B의원은 '48초 회동'을 다룬 미국 백악관 보도자료에 주목하라고 짚었다. 그는 "거기 보면 그날 만난 수많은 사람들에 대해서 '리드아웃(Readout)'이라고 자료를 냈다. 일본 수상부터 시작해서 여러 나라 정상을 만난 얘기가 다 나온다"며 "윤석열 대통령은 그냥 '원 오브 뎀(One of them)'이다. 형식적으로, 의례적으로 만난 것처럼 돼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이번 만남에) 전혀 의미 부여를 안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한국 대통령실과 미국 백악관 발표자료는 내용, 표현 등 곳곳에서 온도 차가 크다. 다음은 대통령실에서 공개한 양국 발표자료 원문이다.
■ 미국 백악관
"조 바이든 대통령과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 간 회동 결과"
조셉 바이든 대통령은 유엔 총회를 계기로 오늘 뉴욕에서 윤석열 한국 대통령과 만났습니다. 양 정상은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긴밀한 협력을 계속해 나간다는 공약을 재확인했습니다. 또 양 대통령은 공급망 회복 탄력성, 핵심기술, 경제 및 에너지 안보, 글로벌 보건과 기후변화를 포함하는 광범위한 우선 현안에 대해 양국간 진행 중인 협력 방안을 논의했습니다.
■ 한국 대통령실
"한미 정상 간 환담 결과"
윤석열 대통령은 9.18(일) 런던에서 개최된 찰스 3세 영국 국왕 주최 리셉션과 9.21(수)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 및 바이든 대통령 내외 주최 리셉션 참석 계기에 바이든 대통령과 만나 △美 인플레감축법(IRA) △금융 안정화 협력 △확장억제에 관해 협의했습니다.
윤 대통령은 미국의 인플레감축법과 관련한 우리 업계의 우려를 설명한 뒤 미국 행정부가 인플레감축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측 우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한미 간 긴밀히 협력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은 우리 측의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면서 한미 간 계속해서 진지한 협의를 이어나가자고 밝혔습니다.
또한 양 정상은 필요 시 양국이 금융안정을 위한 유동성 공급장치(liquidity facilities)를 실행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해 나가기로 했습니다.
한편 양 정상은 확장억제 관련 한미 간 협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을 평가하였으며, 북한의 공격을 억제하고 북한의 도발에 대한 공동의 대응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양국 간 공조를 더욱 강화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B의원은 "미국과 중국의 경쟁 속에서 문재인 정부는 전략적 모호성을 취했지만 현 정부는 어떻게 보면 미국을 선택하고 있지 않냐"며 "그러면 반대급부로 얻어내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렇게 실리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실리적 외교'는 못하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또 "윤 대통령 SNS를 보면 (바이든이 주도하는) 글로벌펀드에 1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는데, 기존의 몇 배"라며 "예산을 투입해서 행사까지 갔는데, 아무 것도 얻은 게 없는 48초 면담을 했다"고 비판했다.
현안 산적한데... 국민들은 대통령이 불안하다
여론은 좋지 않다. 23일 한국갤럽 9월 4주차 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은 전주 대비 5%p 하락한 28%로 나타났다. 순방 역효과다. 부정평가 사유에서도 '경험·자질 부족/무능함'이 1순위였고 '외교'를 부정평가 사유로 답한 응답비중도 늘었다(9.20~9.22 전국 18세 이상 1000명 전화조사원 인터뷰 조사. 응답률 10.4%. 오차범위 95% 신뢰수준에 ±3.1%p.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참조).
결국 윤 대통령은 짊어지고 갔던 각종 숙제들을 해결하기는커녕, '대통령의 설화(舌禍)'로 인한 국민의 불안감을 하나 더 얹고 귀국하게 됐다.
최근 만난 C의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길을 가다가 넘어져도 대통령 탓을 한다"고 한 적 있다. 그만큼 대통령직이 어렵고 책임이 막중한 자리란 얘기였다.
현 상황만 보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통령 탓'은 더 이어질 것 같다. 윤 대통령의 '이XX', '쪽팔리게' 발언은 '빈손 외교'란 비판을 넘어 국민을 불안케 했다. 참고로 윤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이 강타한 22일 오전, 원/달러 환율은 무려 13년 6개월 만에 1400원을 넘겼다. 코스피는 23일 또 다시 큰 폭으로 하락해 2개월여 만에 2300선 아래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