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이 생존권을 위해 쟁의행위를 하면 수십 수백억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 '노란봉투법' 제정 요구가 커지고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야당은 연내 법 제정을 약속했지만 정부·여당·재계의 반대가 거세다. 노란봉투법의 의미를 살펴보는 연쇄 인터뷰를 진행한다.[편집자말] |
"노란봉투법 되면 파업이 판칠 거라고요? 아니 월급도 못 받는데 누가 파업 좋아합니까? 저희 하청들은 노가다 뛰면서 파업해요. 당장 생활이 안 되니까. 당진엔 일거리도 없어서 서울이나 경기도 가서 노가다 뛰고 와서 밤에 천막 지킵니다. 근데 그렇게 파업해도 원청은 타격이 하나도 없어요. 곧바로 다른 하청업체와 계약해서 일 줘버리니까. 결국 하청한테는 점거 같은 극단적인 방법밖에 안 남아요. 그렇게라도 안 하면 원청이 나오질 않는데요?"
현대제철 당진공장 하청 노동자인 이상규(46) 금속노조 충남지부 현대제철비정규직지회장은 지난해 9월 현대제철로부터 246억 원에 달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했다. 정부로부터 불법 파견 판단을 받은 원청 현대제철에 직접 고용을 요구하며 52일간 점거 농성을 한 대가였다.
2021년 2월 고용노동부는 현대제철에 불법 파견 시정 명령을 내렸다. 현대제철이 하청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휘 감독하며 사용해놓고 직접 고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청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늘 원청과 함께 일했지만 임금은 50% 수준이었다. 노동부 시정 명령이 나오자 하청 노동자들은 원청에 직고용을 촉구했다. 하지만 현대제철은 그해 7월 자회사를 만들어 고용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자회사는 현대제철 정규직 임금의 80%만 약속했다. 심지어 현대제철은 자회사 채용 조건으로 하청 노동자들이 진행 중이던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취하하고, 앞으로도 불법 파견과 관련된 소송을 제기하지 않겠다는 부제소 동의서까지 요구했다.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이기면 회사는 해당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채용해야만 한다. 같은 소송으로 현재 현대제철 순천 공장 하청 노동자들이 2심까지 승소해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고, 최근 7월엔 동종 업계 포스코의 하청 노동자들이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당진 공장 건은 1심이 진행 중이다.
하청 노동자들은 즉각 반발했고 현대제철에 교섭을 요구했다. 하지만 원청은 하청 노동자와 고용 관계가 없으니 교섭할 의무가 없다며 거부했다. 자회사 전환 같은 사안은 하청 업체들에게 권한이 없다. 하청 노동자들 입장에선 대화 상대가 증발한 꼴이었다. 파업을 하고 천막을 치고 선전전을 해도 원청은 요지부동이었다. 하청 노조는 결국 지난해 8월 23일 현대제철 당진 공장 내 관제센터를 점거했다. 점거는 10월 13일까지 52일간 이어졌다. 그러자 현대제철은 하청 노동자 641명을 상대로 246억 원의 손배를 청구했다.
현장은 크게 동요했다. 이 지회장은 "살면서 과태료 한 번 안 내본 사람들이 대다수인데 법원에서 몇백억 원을 내라고 두꺼운 소장이 날아오니 얼마나 불안했겠나"라고 했다. 파업 탓에 9월 임금마저 '0원' 이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4000명에 이르렀던 조합원들 중 2000명이 자회사로 떠났다. "생계를 위해 떠난다"고 하면 붙잡을 수 없었다. 파업은 끝났고, 이 지회장을 비롯한 2000여 명은 노조에 남아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계속 하고 있다. 사측은 여전히 하청 노조와의 교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 지회장은 "하청 노동자도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노조법 2조를 고쳐야 현장에서 불법 행위가 줄어든다"고 강조했다. "하청을 좌지우지 하는 진짜 사장은 원청인데, 하청이 원청을 상대로 파업하면 불법이라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다. 사용자의 개념을 넓히는 노조법 2조 개정과 함께 파업 노동자들에 대한 기업의 무분별한 손배를 제한하는 노조법 3조 개정이 포함된 '노란봉투법'은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이 지회장을 지난 20일 충남 당진 현대제철 앞 하청 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힘겹게 얻어 낸 '불법파견' 시정명령, 달라질 줄 알았지만…"
- 지난해 2월 고용노동부가 현대제철에 불법 파견 시정 명령을 내렸다.
"몇 년 전 계약이 종료된 한 협력업체 대표가 노조 사무실에 찾아와 사과박스 한 박스를 놓고 갔다. 안에는 서류 더미가 한 가득이었다. 현대제철이 노동조합을 사찰하고, 협력업체 사장들을 모아놓고 노조 관리를 지시한 내용들이었다. 이게 논란이 되면서 국정감사가 이뤄졌고, 이후 근로감독까지 진행된 결과였다.
제철소는 제품을 직접 생산하는 조업 업무, 설비 보전이나 수리를 하는 정비 업무 등이 연속해서 이뤄진다. 롤 수시 교체 등 하청이 중간중간 공정을 하지 않으면 공장이 굴러갈 수가 없다. 아무리 회사가 불법 파견을 피하려 해도 현장에서 원청이 지휘 감독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하다.
모든 공정이 현대제철의 제품을 만들기 위해 돌아가는데, 사람만 하청에서 더 싸게 가져다 쓰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MES(생산관리시스템) 같은 것도 꼼수일 뿐이다. 예전에 구두로 지시하던 게 불법 파견으로 걸리니 이젠 컴퓨터로 대신하고 있는 거다."
- 원·하청간 차이는 어땠나.
"안전모부터 달랐다. 직영은 하얀색, 협력은 노란색. 작업복도 차이가 났다. 한 눈에 구분할 수 있게 차별한 것이다. 2012년 하청 노조가 생긴 이후 시정됐다.
임금은 절반 수준이다. 몸이 힘들거나 위험한 작업은 하청몫이고, 교대 근무 등 업무 강도가 더 높은데도 격차는 벌어졌다. 10년 차로 비교했을 때 직영 연봉이 8000만 원 선, 협력은 4000만 원 선이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갑질도 다반사다. 직영들은 함께 일하는 하청의 잔업·특근을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 적은 임금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잔업이 필수이기 때문에 하청 입장에서는 직영들의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다. 그러니 직영이 하청에게 작업 지시서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시키거나 자신의 일까지 부려먹는 경우가 많다. 식사 시간인데 시도 때도 없이 일을 시키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현재 당진 공장에는 1만8000명의 노동자가 있고, 이중 6600여 명만 정규직이다. 나머지는 자회사나 협력사다."
"노가다 뛰면서 파업하는 하청... 왜 우리만 불법인가"
- 고용노동부 불법 파견 시정 명령 이후 불과 6개월 만인 2021년 8월, 노조가 통제센터를 점거했다.
"국가에서 불법이라고 했으니까 당연히 뭔가 바뀔 줄 알았다. 아니었다. 불법 파견 시정 명령 이후 얼마 안 돼 갑자기 회사에 한국노총 노조가 생겼다. 현장에선 '자회사가 생길 거고 직영 임금의 80%를 맞춰준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장 반대 입장을 냈다. 회사 측과 대화를 요구했다. 회사는 응하지 않았다. 자신들과 우린 고용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2021년 7월 초, 현대제철이 자회사를 설립하겠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해버렸다. 새로 생긴 한국노총에선 곧바로 환영 입장이 나왔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2021년 7월 23일부터 천막 농성을 하고 선전전을 벌였다. 소용 없었다. 8월에 쟁의권을 획득해 파업을 벌였다. 그래도 소용 없었다. 파업 중인 14개 협력업체를 폐업시켜버린 것이다. 여기 속하는 하청 노동자가 2000명이나 됐다. 회사는 우리 대신 다른 하청업체들과 계약을 하고 일을 줘버렸다. 하루 일당을 50만 원씩이나 주고 알바를 쓰기도 했다. 조합원들은 고용 승계 안 되는 것 아니냐고 불안해 했다. 사측은 확답을 주지 않고 피를 말렸다. 몰릴 대로 몰렸다. 어떻게든 원청을 나오게 해야 했다. 2021년 8월 23일, 사장실이 있는 통제센터를 점거했다."
- 회사는 점거 도중인 2021년 9월, 641명 조합원을 상대로 246억 원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황당했다. 우리는 불법을 바로잡으라고 회사에 요구한 건데, 되레 우리 보고 불법이라면서 수백 억을 물어내라고 한다. 생산 라인을 세운 것도 아니고 사장실이 있는 통제센터 건물을 점거했는데 246억 원이나 피해를 봤다는 것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아예 건물 출입을 막은 것도 아니었다. 통제센터에서 관제 일을 하는 직영들은 들여보내줬다. 단지 일반 사무직들이 컴퓨터 업무를 사무실에서 못한 정도의 피해였다.
하지만 수백억 원 소장에 내 이름이 적혀있다는 것만으로도 조합원들은 크게 흔들렸다. 집으로 소장이 가는데 가족들이 보고 뭐라고 하겠나. 이미 파업으로 월급도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우리 월급날이 매달 10일인데, 9월 10일 월급날엔 8월 23일 파업 시작 전까지 일한 월급이 나와서 그나마 괜찮았다. 하지만 10월 10일 월급은 0원이었다. 한계였다."
- 점거는 2021년 10월 13일까지 52일간 이어졌다. 최근 큰 관심을 받았던 대우조선 하청 노동자들의 파업 역시 51일 갔다.
"파업 50일 정도 되면 하청은 생계 꾸리기가 안 된다. 제가 11년 차인데 월급이 240~250만 원 정도다. 네 식구 생활이 되겠나. 자회사 들어오고 나서 저를 포함해 많은 조합원들이 야간 교대 없이 낮 근무만 하는 공정으로 변경됐다. 불이익을 받은 거다. 도저히 힘들어서 파업 도중 노가다나 알바를 뛴 조합원들도 있었다. 일 마치고 밤 늦게 다시 현장을 지키러 온다.
한편에선 어쩔 수 없이 이탈자가 늘었다. 하나둘 자회사로 넘어갔다.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을 취하하라는 요구를 1200명가량이 수용했다. 당초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 참여한 인원은 3200명 정도였는데, 현재 2000명 정도로 줄었다. 조합원 4000여 명 가운데 절반이 떠났다. 비정규직은 파업을 해 봤자 원청에 타격을 못 준다. 오히려 스스로 타격을 받기만 한다. 자해행위다."
"비정규직은 노동 3권에서도 차별"
- 노란봉투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정부·여당은 반대하고 있다.
"왜 비정규직은 교섭에서도 차별 받아야 하나. 진짜 사용자는 원청이고 원청 마음대로 하청의 임금과 노동 조건을 정하는데, 하청이니까 하청 업체랑만 교섭하란다. 파업도 하청 업체에만 해야 하고 원청에 하면 불법이란다. 도대체 하청은 뭘 어떻게 하라는 건가? 교섭도 못하고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는데 뭣하러 노조를 하나?
지금 상태로는 비정규직은 점거 같은 불법 행위를 하지 않고선 원청을 만날 수조차 없다. 원청은 하청업체를 꼭두각시로 세워놓고 뒤에서 조종한다. 사용자가 불분명하니까 매번 투쟁하면서도 이게 불법인지 합법인지 판단도 잘 안 선다. 하청 노동자가 원청과 교섭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된다면 극단적인 투쟁을 할 필요가 없다. 당연히 불법 행위도 줄어들 것이다.
정규직 노조의 파업이 과격하지 않은 이유가 뭔가. 교섭하고 대화할 수 있어서다. 비정규직도 그렇게 해달라는 게 무리한 요구인가. 법이 동등해야지, 비정규직이라고 노동 3권(단결권·단체교섭권·단체행동권) 보장 안 되는데 그냥 이대로 둘 건가. 계속 불법을 양산하겠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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