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애도는 고맥락적 행위다. 죽음에 대해서 흔히 '슬픈 일'이라고 말하지만, 나와 어떤 사회적 관계도 맺지 않은 타인의 죽음에 슬퍼하는 것은 본능적이거나 당연한 행위는 아니다. 이해하고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하나의 판단이자, 결심이다.
특히 대형 참사에 대한 애도는 단순히 '내가 슬퍼함'을 표시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이상의 효과를 낸다. 사회의 안전망에 구멍이 생겨서 발생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애도를 통해 비극을 잊지 않으며 살아있는 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한다. 같이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고통과 절망을 나누어 가진다.
그리고 그 애도의 형태는 다양하다. 누군가는 조용히 분향소에 꽃 한 송이를 올려놓고, 누군가는 억울한 죽음의 원인을 조망한다. 누군가는 '재발 방지'를 위해 민원을 넣고, 누군가는 바쁜 하루를 살다가 늦은 퇴근길에서야 포털 뉴스 댓글에 추모 메시지를 달아놓는다.
그러므로 '틀린 애도'라는 것은 없다. 애도는 경합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나은 형태의 애도가 무엇인지 우리 사회가 고민해나갈 수 있으려면, 애도하는 마음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선이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종종 애도를 그저 '침묵'과 동의어로 쓴다는 생각이 든다. 상당수의 애도는 매우 선택적이고 정치적인, 아주 강하고 시끄러운 위로와 연대일 텐데 말이다.
정부가 강요하는 '애도'
윤석열 정부는 이태원 참사 다음 날인 지난 10월 30일,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들을 국가적으로 애도할 대상으로 지정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들을 '애도 되지 못하는 존재'로 만들고자 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부가 나서서 참사 피해자들에 대한 애도에 앞장서는 것은 겉보기에는 옳은 행동이다. 문제는 애도의 내용이다.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태원 참사에 대해 "경찰 인력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10월 30일 정부종합청사 브리핑)라고 말해서 구설에 올랐다. 그런데 이에 대한 해명으로는 "정확한 사고 원인이 나오기 전까지는 섣부른 예측이나 추측이나 선동성·정치적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31일 서울시청 합동분향소 앞)라고 말했다. '일방통행' 등 경찰의 적극적 통제가 있었다면 참사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애도'의 말들을 선동성·정치적 주장으로 몰아세우고, '닥치고 있으라'고 이야기한 셈이다.
정진석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지난 10월 31일 기자들 앞에서 "지금은 슬픔을 나누고 기도해야 할 시간으로 추궁의 시간이 아니고 추모의 시간이다"라고 하는가 하면, 일명 '윤핵관'으로 꼽히는 권성동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같은 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추모를 정쟁으로 변질시켜서 안 된다(...) 정치적 유불리를 판단하지 말고 위로와 사고 수습을 우선 순위로 삼아야 한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윤 대통령 자신은 애도 기간 동안은 출근길 문답을 하지 않는다고 역시 같은 날 밝혔다. 애도를 이유로 갑작스럽게 듣지도, 말하지도 않겠다는 것이나 다름 없다. 대통령 스스로 정치적인 발언을 삼가고(피하고), 침묵하겠다는 것이다. '진정한 애도'의 방법이 무엇인지 정부와 여당이 우리 사회에 주입시키는 분위기다.
심지어 정부는 지난 일요일부터 이번 주말까지 준비된 모든 부처·공공기관·지자체가 주최하는 행사와 축제 등을 대부분 취소하게 만들었다. "애도기간 동안 시급하지 않은 행사는 연기하고 부득이 개최할 경우 안전을 최우선하라"라는 내용의 공지는 사실상 '웬만하면 하지 마라'라는 압박에 가깝다. 심지어 강남구는 식품접객업소 영업주들에게 휴업을 권고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유명 가수들도 '공연 취소'에 나섰고, 오히려 일정대로 공연을 진행하는 음악가들이 비난을 받기도 하는 모양새다.
지자체 행사와 공연은 각각 수십 또는 수백 명의 생업과 연관되어있다. 연기나 취소로 인한 손해는 막심하기 그지없다. 보상책이 있다면 상관없지만 대부분 그렇지 않다. 음악을 즐기면, 가족끼리 나들이를 나가면 이번 참사에 대해 슬퍼하지 않는 걸까. '애도하는 척'하기 위한 일방적인 결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는지 정부는 알고 있을까? 왜 애도의 형태를 하나로 정형화시키는가.
침묵만이 진정한 애도?
침묵 혹은 '반 정치'를 선언한 애도만이 '진정한 애도'로 인정받고 그것이 강요되는 사회에선, 애도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진정성을 의심받으며 고통받게 된다. 동시에 '나는 애도하지 않는다'라고 떠벌리거나 '피해자 탓'을 하면서 비극을 조롱하는 사람들을 제어할 수단도 없어진다. 왜냐하면 애도의 순수성이 끊임없이 검열받는 상황에서는 애도의 힘 역시 점점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걸 세월호 참사 때 이미 목도했다.
애도는 판단이자 결심이고, 각자의 위치에서 무엇을 할지를 찾는 행위다. 그러나 이 정부가, 그리고 혹자가 원하는 유일한 형태의 애도는 침묵뿐인 것 같다. 따지지 말고, 조용히 슬퍼만 하라는 것. 하지만 침묵은 애도의 형태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다. 함께 슬퍼하는지, 고통스러워하는지, 피해자들의 억울함에 공감하는지조차 알아차리기가 어려워서다.
이번 사건이 잊히지 않기 위해서, 기억되기 위해서는 계속 소리쳐야 한다. 억울함을 달래기 위해서, 그들의 죽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왜 일어났는지'도 따져물을 수 있어야 한다. 안전망을 더 촘촘히 만들기 위해서는 삿대질을 해야할 수도 있다. 함께 공연장에서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할지도 모른다. 조용한 방 안에서 홀로 속삭이며 기도도 할 것이다. 그것들이 나는 모두 '애도'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