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기자들이 취재 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롭게 쓰는 코너입니다.[편집자말] |
신생 온라인 매체 <민들레>가 <시민언론 더탐사>와 협업을 통해 지난 14일 오전 공개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 명단'에 놀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유가족의 동의를 받지 않고, 즉 그들의 뜻을 전혀 존중하지 않은 채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는 점이 의아했다.
<민들레>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데 호명할 이름조차 없이 단지 '158'이라는 숫자만 존재한다는 것은 추모 대상이 완전히 추상화된다는 의미다"라면서 명단 공개의 이유를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들을 보고서도 애도의 대상이 구체화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 호명이 힘을 잃은 이유
수많은 사례를 통해 우리는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한 사람의 '부재'를 더욱 크게 실감하게 되며, 동시에 그 죽음에 대해 하나의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 문익환 목사의 연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직후 5.18 광주 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민주화운동 열사'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의 이름을 언급한 것은 많은 이들을 감동케 했다. 이처럼 호명은 분명 일반적이면서도 가장 곡진한 애도의 방식이며, 그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민들레>의 명단 공개에선 처음 사망자 숫자를 듣고 나서의 망연함, 그 이상 그 이하의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아득했다. 한 명 한 명의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아마 얼굴 사진이 있더라도 비슷했을 것이다. 각각의 구체적인 서사, 삶을 통해 남긴 의미, 빛나고 찬란했던 순간들은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호명을 함에 있어서 가장 힘이 센 주체는 결국 살아생전 그를 기억했던 사람들이 될 수밖에 없다. 죽은 이의 삶을 재구성하고 의미를 부여하고, 또 부재에 대해 안타까워 할 때 이름은 비로소 힘을 가지게 된다.
'명단 공개'에서 유가족의 동의가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족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대체로 고인의 삶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온갖 '희로애락'를 고인과 함께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름을 부르면서, 세상을 떠난 이의 세계를 잠시나마 되살리기 위해선 '누가' 부르냐가 정말 중요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민들레>가 공개한 유가족의 동의도 안 받은 희생자 명단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망자의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서 그들 각자의 존재와 맞닿게 하지 않으면 '전시' 혹은 '박제'나 다름없다. 아무나, 아무렇게나 부른다고 죽은 이들을 더 깊게 애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 자의 의무
윤석열 정부는 이태원 참사를 축소하거나, 지우려고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합동분향소 명칭에 '참사' 대신 '사고'를, 희생자·피해자가 아닌 '사망자'를 썼다. 정부·지자체가 설치한 합동분향소에는 다른 참사들과는 달리 이례적으로 영정사진이나 위패가 없었다. 또한 윗선은 향하지 않는 '꼬리자르기' 수사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유가족 동의 없는 희생자 명단 공개가 정부의 이러한 태도에 대항하는 '적확한' 방법인지도 의심스럽다.
10여 년 전 국립5.18민주묘지에 처음 갔을 때 묘비에 쓰여 있던 글귀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희생자의 부모님이나 배우자가 적어놓은 몇 자 안 되는 말들이 가슴에 박혀서, 참배하는 내내 눈물을 펑펑 흘렸던 기억이 있다. 이처럼 고인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또 유가족과 고인을 깊이 애도하는 호명은 분명 그 죽음을 큰 사건으로, 동시에 '부당한 죽음'에 맞설 수 있는 에너지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민들레>가 윤석열 정부의 '참사 지우기'에 맞서서 해야 할 것은 섣부른 '희생자 명단 공개'가 아니라, 개인의 죽음에 주목하고 개별적인 서사를 부여하는 작업을 유가족과 함께 혹은 동의를 얻어서 시작하는 일이다. <민들레>에 따르면 15일 오전 기준으로 이미 10여 명의 이름이 유가족들 요구로 삭제됐다고 한다.
신당역 스토킹 살인사건의 피해자, '구의역 김군'을 우리가 이름을 알기에 애도한 것은 아니었다. 한 명의 시민으로서 또 한 명의 노동자로서의 구체적이고 고유한 맥락이 대중들에게 전달됐기에 우리는 애도하고, 기억하며, 나아가 그들을 잃게 만든 세상에 분노할 수 있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애도는, 기표만 남은 이름을 부르고 외우는 일이 아니다. 한 사람의 세계를 기어코 기억하고 되살리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고, 망자의 부재를 체감하며 산 자의 의무를 깨닫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의 옆에 서기 위해 충분히 인내하지도 않으면서, 어떻게 그들은 "진정한 추모와 책임규명"을 이야기할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