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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한국에 몇 안 되는 희소한, 만년필 수리공입니다. 원래 토목공학을 전공했지만, 전역 후 길을 걷다 우연히 고교 시절 문학회 친구를 만나면서 삶의 방향이 급선회했습니다.

시와 소설이 배움을 통해 길러지는 학문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만, 멀쩡히 잘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문예창작과에 들어갔습니다. 졸업 후 홍은동 옥탑방에서 2년간 시인의 꿈을 키웠고, 그 뒤 사회복지사, 일식 조리사를 포함해 예닐곱 개 직업을 거치며 귀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거짓말 같은 인연으로 참 좋은 사람을 만나 가정도 꾸렸지요.

만년필을 접한 뒤, 십 년 가까이 수천 명하고 인연을 맺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손 편지를 써 보냈고, 적지 않게 받은 답장을 보물처럼 아낍니다. 여태 만 자루가 넘는 만년필을 손 보는 과정에서 좋은 분들을 많이도 만났어요. 이런 이야기를 흘려보내기 아까워 3년 전 이맘때 오마이뉴스에 첫 글을 써 보냈습니다.

감사하게도 지면을 할애해 줘 '김덕래의 만년필 이야기'를 3년째 연재하는 과정에서 라디오에도 소개되고, 대학이나 도서관 등 다양한 곳에서 만년필 관련 강연을 했습니다. 그러다 '나 역시 필기구를 애정해 만년필로 원고 수정을 한다'는 편집자를 만났습니다.

원고만 넘기면 뚝딱 책이 만들어지는 줄 알았는데, 본문을 다 써놓고 시작했음에도 부수적인 일들이 무수했습니다. 먼저 판형을 정해야 했고, 종이는 어떤 걸 쓸지, 폰트 선정과 크기, 목차 등 끝이 없었습니다. 사이사이 본문도 몇 차례 반복해 읽어가며 어법에 맞게 다듬었습니다.

제목을 짓고, 표지를 만드는 일은 더 난제였습니다. 강렬한 원색을 써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표지도 생각했지만, 수수하고 차분한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오래된, 여기저기 아픈 펜을 고치고, 그 과정에서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니,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와닿는 편이 더 어울린다 싶었습니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편집자와 의견이 맞지 않아 난감해하는 제게 친구가 짧은 이야기 한 편을 들려줬습니다.

"동네 이발소에 새로운 이발사가 왔어. 단골 위주로 운영되는 작은 이발소야. 그런데 이발을 마친 대부분의 손님들이 무슨 머리를 이렇게 깎아놨냐고 화를 내는 거야. 고객들 입장도 이해가 되는 게, 늘 해오던 머리 모양대로 깎지 않고, 생경한 스타일로 잘라놨으니 어색했던 거지. 그 이발사가 조근조근 말해. '이 스타일이 손님에게 더 잘 어울립니다. 사람마다 두상의 생김새가 다 다르니, 며칠만 지나면 훨씬 마음에 들 거예요' 그럼에도 원성은 잦아들지 않았어.

마음씨 착한 이발소 주인은 어쩔 수 없이 그 이발사를 내보내. 그런데 몇 주 뒤 지난번 고객들이 다시 와서 그 이발사를 찾는 거야. 만나는 사람마다 여태까지보다 지금의 머리 모양이 훨씬 잘 어울린다더라는 거지. 이발사는 이미 먼 곳으로 떠나 다시 부를 수 없었어. 이발소 주인도 손님들도 다 아쉬워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나.

내가 중학생 때 라디오에서 들은 단편 드라마 이야기니 요즘 세상과 맞지 않을 수도 있어. 근데 난 이 이야기가 늘 마음에 남더라고. 그 이후 머리를 깎을 때는 물론, 옷을 고를 때도 매장 종업원이 추천해 주는 색깔과 무늬 등을 가능한 좋게 보려 해. 내 취향이야 물론 있지. 그래도 한 분야의 전문가 의견을 존중하는 건 서로를 위해 옳은 일 아닐까?"


더러 가까운 사람이 잘 모르는 사람보다 더 아픈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너를 위해 하는 말이라 포장하지만, 진심이 담기지 않은 충고는 때론 폭력이 됩니다. 슬쩍 들려준 친구의 이야기 덕분에 편집자와 순조롭게 의견을 조율할 수 있었습니다.
 
  보기 드문 '만년필 에세이'『 제 만년필 좀 살려주시겠습니까?』
보기 드문 '만년필 에세이'『 제 만년필 좀 살려주시겠습니까?』 ⓒ 김덕래

표지 한가운데 사진은, '만년필의 아버지'로 불리는 워터맨의 스틸 펜촉입니다. 세월을 몸으로 받아내 여기저기 벗겨지긴 했지만, 기능상으론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표지 앞면 사진과 후면의 글도 서로 이어지게끔 배치했습니다.

요즘은 생략하는 분들도 많던데 저는 사진도 욱여넣었고, 간략히 남겨야 센스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저자 소개도 가능한 자세히 썼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만년필 수리공이라니.. 어떤 사람일까? 궁금할 것 같았어요. 머리말과 맺음말을 '작가의 말'로 묶어 싣는 경우도 많지만, 저는 굳이 나눠 따로 썼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렇게 3년간 써온 33편의 글을 엮은 책이 나왔습니다. 대나무가 생장 시기에 맞춰 자라다 더 높이 올라가려면, 잠시 숨을 고르며 매듭을 지어야 한다지요? 그래서 대나무의 진정한 강함은 길게 뻗은 높이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단단한 매듭에 있다고도 합니다. 바탕이 탄탄해야 휘둘리지 않고 솟구칠 수 있을 테니까요. 이 책은 저의 매듭입니다.

이 책엔 제가 그간 만 자루가 넘는 만년필을 접한 내용과 개인적인 감상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제 원래 꿈은 시인이었습니다. 시인도 보기 힘든 업(業)이지만, 만년필 수리공은 더더욱 그렇지요. 저는 꽤 요즘 드문 일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만년필에 관한 책이기도 하지만, 제가 가지 못한 시인의 길을 슬며시 바라보는 시집이며, 품은 속내를 다 적은 일기장이기도 합니다.
   
 어떤 필기구보다 까다롭지만, 그걸 뛰어넘을 만큼 매력적인 '쓸 것'이 만년필입니다
어떤 필기구보다 까다롭지만, 그걸 뛰어넘을 만큼 매력적인 '쓸 것'이 만년필입니다 ⓒ 김덕래
  
나보다 나를 더 귀하게 여겨주는 친구가 3년 전 만년필 한 자루를 건넸습니다.

"네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을 거야. 물론 쉽지야 않겠지. 그래도 내가 아는 넌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지금처럼 계속 나아가다 보면 언젠간 너의 책이 세상에 나올 테니, 그때 청하는 독자가 있으면 이 펜으로 사인해 줘. 기운 내. 다 잘 될 거야 친구."

수없이 많은 분들의 응원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다만 제가 할 일을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런 저를 크게 봐준 여러분들은 모두 비범한 분들입니다.

펜수리가 제게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면, 글쓰기는 한동안 미뤄놓고 살아온 오랜 꿈입니다. 소신과 보람을 귀하게 여기며, 누군가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그런 일을 하며 살고 싶었습니다. 나라 안팎에서 보내오는 여러 브랜드의 다양한 만년필을 고치고, 그 속에 담긴 소중한 사연을 글로 쓰는 이 일을 저는 천직으로 여깁니다.

불어온 바람을 피하려 돛을 내린 배가 나아갈 수 있을 리 없습니다. '그래도 다행히 넘어지진 않았다.. 나는 멈춰 있는 것뿐이니, 그나마 현상 유지는 하고 있다' 생각해도 조류가 바뀌면 나도 모르는 새 거꾸로 갈지도 모르지요. '적절한 시기에 때마침 불어온 너라는 바람 참 반갑다' 생각하며 돛 높이 올리겠습니다. 바람을 끌어안겠습니다.

옆으로 밀었다 뒤로 옮겨 그 힘을 추진력 삼아 좀 더 멀리 나아가 보겠습니다. 닻을 내리기엔 아직은 너무 이릅니다. 모두 다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제 만년필 좀 살려주시겠습니까? - 죽은 만년필 살리고 다친 마음 고치는 펜닥터 김덕래 이야기

김덕래 (지은이), 젤리클(2022)


#만년필#펜닥터#책이나왔습니다#김덕래#제만년필좀살려주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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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펜샵코리아 차장 거침 * 광주여대, 범어도서관, 이육사문학관, 진주문고 외 강연 * 교보문고 5회, 광주여대 1회 손글씨대회 심사 * 섬마을인생학교 13기 교사 * 지평선고등학교 외 특강 * KBS, MBC, SBS, CBS - 방송 출연 * 현대제철, 한국국제교류재단 외 칼럼 기고 * '펜닥터D의 수리공작소' 운영 * driftk56@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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