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MBC 예능 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를 보던 중이었다. 전현무, 박나래, 이장우가 팜유 원정대를 결성해 베트남 달랏으로 여행을 떠난 에피소드였다. 그들은 한 식당에 들어가 볶음밥, 볶음면 화로구이를 시킨 뒤 간장처럼 보이는 소스에 고추와 라임을 넣었다. 그리고 맛을 본 전현무가 하는 말.
"이 간장은 무조건 사 가야겠다. 이게 느억맘(nước mắm)이야?"
순간, 느억맘이 조만간 한국에서도 유행하겠구나 싶은 동시에 근거를 알 수 없는 '느억맘 부심'이 느껴졌다. 훗, 나는 예전부터 써 왔던 조미료였는데. 그 좋은 걸 이제 알다니. 아무튼 환영합니다. 느억맘의 세계에 온 것을.
(방송에서도 간략히 설명이 나왔지만) 느억맘은 베트남의 액젓소스를 말한다. 방송에서는 출연진들이 간장이라 표현했지만 콩을 이용한 공정은 전혀 없고 오로지 생선을 발효시켜서 만드므로 액젓의 한 종류로 보는 게 맞다. 흔히들 피시소스라고도 부르는데 사실 이 또한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다 같은 피시소스가 아니다
피시소스는 생선을 발효시켜 만든 동남아식 액젓의 통칭이다. 동남아의 여러 나라들이 생선을 발효시킨 피시소스를 만들어 쓰지만 그 종류나 쓰임새가 나라와 지역마다 차이가 있다. 발효기간, 발효 해산물의 종류, 발효에 쓰는 설탕과 소금의 양에 따라 맛과 색이 다르며 저마다 명칭도 다르다.
베트남에서는 이를 느억맘(nước mắm), 태국에서는 남플라(Nan Pla), 미얀마에서는 응안 뱌르 아이(Ngan byar yay)로 부른다. 한국의 대형마트에서 피시소스라는 이름으로 파는 것들은 대부분 남플라다. 남플라는 느억맘보다 색도 검고 맛과 향도 훨씬 진하다. 남플라는 남플라 나름의 맛이 있지만 한국 가정에서 일반적인 조미료로 쓰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느억맘 소스란 말일까? 느억맘 소스에 대한 규정은 베트남 품질표준원 TCVN 5107: 2018에서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황금 갈색이나 또는 짙은 갈색을 띠어야 하며 느억맘 고유의 냄새가 나야 한다. 그리고 소스는 투명해야 하며 침전물 없이 맑아야 한다(물론 모든 발효식품이 그렇듯 완제품에서 일부 침전물이 발견될 수 있다). 결정적으로 일정 염도 이상을 넘기면 안 된다. 맨밥과도 잘 어우러져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자린고비가 천장에 굴비를 매달아 놓고 반찬삼아 먹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베트남에서도 구두쇠같이 절약하는 모습을 '쌀밥에 느억맘을 찍어 먹는다(Cơm chan nước mắm)'고 표현한다. 한국의 굴비처럼 느억맘은 그 자체로 밥과 잘 어울린다.
그만큼 베트남 사람들은 거의 모든 음식에 느억맘을 곁들인다. 느억맘을 덮밥에 뿌리기도 하고, 월남쌈에 찍어 먹기도 하고, 쌀국수의 간을 맞추기도 한다. 액젓임에도 불구하고 염도가 낮은 편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굳이 비교하면 진간장과 비슷하거나 조금 낮은 정도다.
개인적으로는 베트남 대기업 마산 컨슈머의 제품을 쓴다. 한국으로 치면 CJ나 오뚜기 같은 기업으로 현지 마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느억맘을 생산한다(한국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맛있는 느억맘은 현지의 재래시장과 가정집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집집마다 된장 고추장을 담그듯 베트남 역시 저마다의 느억맘을 만들어 먹는 문화가 있다.
1980년대부터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며 삶의 여러 분야에서 대기업 위주의 공업화가 이뤄졌다지만, 각 지역과 가정에서만 유통되는 재래 느억맘은 여전히 전체 유통량의 약 40%를 차지한다. 동네 방앗간에서 막 짠 참기름이 기성품보다 훨씬 맛이 좋은 것과 같은 이치다. 현지 요리에 관심이 많고 귀국 시 검역 법규가 허락한다면 그 지역에서만 파는 느억맘을 사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어디에나 잘 어울리는 느억맘의 힘
느억맘 최대의 장점은 범용성이다. 한국 액젓에 비해 맛과 향은 순한 반면 감칠맛은 더 강하기 때문에 여러 음식에 쓸 수 있다. 우선 모든 동남아 요리에 쓸 수 있다. 쌀국수의 간을 맞출 수도 있고, 월남쌈 소스로도 좋다.
편마늘과 잘게 썬 고추, 라임즙과 설탕, 느억맘을 넣으면 하노이 스타일의 마늘 소스를 뚝딱 만들 수 있다(볶음밥과 정말 잘 어울린다). 특히 분짜 육수는 현지에서 먹던 맛과 완전히 똑같이 낼 수 있다. 현지에서 먹던 베트남 음식 맛이 그립다면 느억맘부터 구비해 놓자. 놀랄 만큼 현지의 맛과 비슷해질 것이다.
동남아 요리만이 아니라 한식에도 충분히 쓸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김치찌개, 제육볶음, 닭볶음탕 같이 얼큰한 요리를 할 때 조금씩 넣어 쓴다. 레시피대로 끓였는데 어딘가 맛이 부족할 때 느억맘은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다. 겉절이를 할 때도 느억맘이 위력을 발휘한다.
멸치액젓보다 향이 순하기 때문에 감칠맛을 적절히 채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게 맛을 낼 수 있다. 오이냉국을 할 때도 간장을 한 숟갈 줄이는 대신 느억맘을 한 티스푼 넣으면 맛이 훨씬 풍성해진다. 이국적인 조미료를 한식에 썼을 때 느껴지는 위화감? 단언컨대 전혀 없다. 제조 방식과 맛을 내는 원리 모두 한국의 액젓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금 미심쩍을 수 있다. 동남아 조미료를 한식에 쓴다니. 하지만 낯선 식재료를 한식에 접목해 쓴 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이미 선조들은 수백 년 전부터 동남아에서 후추를 들여와 음식에 써왔다(조선의 성종은 아예 종자를 들여와 후추농장을 일구려 했다). 더 나은 맛 앞에서 국경을 따지는 건 선입견에 불과하다. 좋은 조미료는 어느 요리에 써도 진가를 발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