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경찰을, 사업가를, 음악가를, 간호사를, 배우를 꿈꿨던 159명의 바람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오마이뉴스>는 이태원 참사 100일을 맞아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편집자말] |
[생존자 이야기] "전 뭐라도 해야겠어요"
"정말... 울고 싶지 않습니다." 이 말을 김초롱(33)씨는 울면서 말했다.
2022년 10월 29일 이후, 이름 석자 앞에 '이태원 참사 생존자'라는 말을 쓰게 된 그였다. 지난 5일 참사 100일 맞아 국회에서 열린 10.29 이태원 참사 국회추모제에서 그는 생존자로서 발언대에 서야 했다.
그런데, 추모제장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온 공간을 휘감은 향냄새에 "압도당했다"고 했다. 단상 위에 있는 수많은 영정사진, 그 사진을 등지고 말을 해야 했다. "도망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데, "가까이서 처음 본 유가족들은 바라보기만 해도 눈물이 나는 존재"였다. 그랬기에 초롱씨는 "아직도 나서지 말라는 사람이 많은데 도저히 외면할 수 없다"라며 "잘못 없는 이들이 더 이상 고통을 겪지 않게 도와주시기 바란다"고 울며 호소했다.
발언대를 내려온 그를 안아준 건 한 희생자의 어머니였다.
"용기 내줘서 고마워요, 나는 초롱씨가 다 잊고 행복하게만 살아줬으면 좋겠어. 그간은 용기 내주길 바랐는데 오늘 보니 못할 짓이다 싶어."
'다 잊으라'는 위로 너머로 또 다른 말도 들렸다.
"초롱씨 글 다 챙겨 보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글 써주세요."
그리고 그날 이후, 초롱씨는 "더 많은 사람들이 아픔에 공감해줄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100일 글 썼으면 됐지, 더 쓰면 뭐해, 냉소적이 돼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추모제에서 유가족분들을 직접 보고 응원의 말을 들으니... '뭐라도 해야겠다, 지금까지와 다른 형태로라도 도움 되는 일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섰어요."
[유가족 이야기] "저는 끝까지 가보려고 해요"
그날, "계속 글 써주세요"라 외친 이는 진창희(53)씨다. 스물 두 살의 나이에 희생된 진세은씨의 고모다. 이름 석자 앞에 '이태원 희생자 유가족'을 적게 된 그는 이태원유가족협의회 대전지역 대표를 맡고 있다.
세은씨는 그의 막내 남동생의 막내딸이었다. "너무 예쁜, 맑고 밝은 아이였다"고 했다. 물론 "이모만큼은 못 되는 고모"였다. 그럼에도 "저 코로나 학번이라 MT도 못 갔어요, 친구도 못 봤어요"라며 울상짓던 세은이를, "전공은 정보통신학과인데 전 아이들이 좋은데, 뭐 하고 살죠? 고모" 하던 천진하던 세은이를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고 했다.
세은씨는 사고 후 사흘을 버텼다. 10월 29일 자정 전 병원에 도착한 세은씨는 응급처치를 받고 잠시 정신이 돌아와 엄마의 전화번호까지 말했다고 한다. 내부 장기 출혈이 심해 네 번의 수술을 거쳤다. "가망이 없다"던 의사는 "아이가 버티니 희망을 갖자"라고 했다. 그러나 11월 1일 새벽 세은씨는 떠났다.
참사 후 칩거를 택한 세은이 엄마를 대신해 세은이 아빠와 세은이 언니 그리고 고모는 유가족대책위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이 참사의 시작과 끝을 보겠다.' 제가 지금 유가족으로서 활동하는 이유에요. 끝까지 가보려고요."
고모는 세월호 참사를 겪으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정도로 아팠다"고 했다. 세월호 수습 현장 진도 팽목항에 가고 안산 분향소에 가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며 '왜 내가 이렇게 힘든가'를 되새김질해야 했다고 했다. 그렇기에 고모는 "내가 사상자도 아니고 부상당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힘든가를 계속 질문"하는 초롱씨의 마음을 너무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초롱씨가 올리는 글 하나하나를 모두 챙겨봤다. "어느 순간 유가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는데, 어느 순간 생존자라는 이름을 갖게 된 초롱씨를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리고 지난 14일, 두 사람은 만났다. 대전에 사는 진씨가 서울로 왔다. 초롱씨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오마이뉴스>가 그 자리에 함께했다.
[참사 생존자와 만난 참사 희생자 유가족] "고마워요"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맞잡은 두 손을 한참이나 놓지 못했다.
"그날 '계속 써주세요' 말한 게 저였어요.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초롱씨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거였어요. 남은 사람으로 잘 살려고 너무 애쓰지도 말고, 억지로 잊으려고 하지도 말고요. 이 슬픔이 지겹고 힘들면 훌쩍 멀리 도망갔다가, 모른 척도 했다가, 그러다가 또 생각나면 오고 그랬으면 좋겠어요." (진창희씨)
"사실, 온라인에서는 응원해주고 연락해주는 분들이 많은데 현실에서 이런 얘기를 들을 일이 많이 없어요. 유가족분들에게 이런 말씀을 듣는 건 차원이 다른, 되게 결이 다른 위로고 슬픔이더라고요.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까 확실히 부담이 덜해져요.
그런데 '부담 안 되는 선에서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찾게 돼요. 참사 100일 되기 전에는 뭘 잃어버린 거 같은 느낌, 부유하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유가족분들 직접 뵙고 말씀 듣고 나니 불순물들이 싹 가라앉았어요. 정신이 맑아지고 이성적인 시선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요. 100일 추모제에서 '계속 써라'는 응원의 말, '다 잊어라'는 위로의 말을 듣고 난 후 훨씬 좋아졌어요. 그래서 지금 되게 좋아요." (김초롱씨)
유가족의 위로는 초롱씨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하는 자양분"이 됐다. 그렇게 적어내려 간 초롱씨의 글은 다시 고모에게 큰 위로가 됐다.
"초롱씨가 전해주는 현장 이야기를 보고 또 봤어요. 이태원 술집에서 문을 열어줘서 사람들을 구했구나, 이때는 이랬고 저때는 저랬구나. 저희는 당시 상황을 전혀 모르니까, 자꾸 그런 글에 머물고 싶어요. 정말 큰 위로가 되니까요. '유가족들은 얼마나 고독할까요, 외로울까요' 이렇게 적은 초롱씨 글은 끝까지 못 읽고 바깥 바람을 쐬고 왔어요. 한 구절 한 구절이 맺혀서 다음 글을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고마웠어요. 우리를 궁금해줘서요." (진창희씨)
[맞닿은 마음] "그날의 초침을 꿰어 맞추고 싶어요"
두 사람은 "그날의 모든 순간들을 알고 싶다"는 데 한마음이었다.
"지금 저희는 그날의 모든 초침들을 하나 하나 꿰어서 맞춰보고 싶어요. 우리 아이들이 몇 초에 어디 있었고, 몇 초에 넘어졌고, 몇 초에 구조 됐는지 모든 초침을 다 맞추고 싶은데 수사가 하나도 안 된 거잖아요. 빈 시간들을 채워나가는 작업은 시작도 안 했어요." (진창희씨)
"저도 너무 공감해요. 저도 그날 제가 있었던 일을 초 단위로 말할 수 있어요. 그날 영상을 많이 찍었는데, 스스로 머릿속에서 그 영상을 편집해서 시간대별로 맞춰보고 있더라고요. 생존자나 유가족분들은 그날의 실체적 상황을 보고 싶은 거잖아요. 누가 잘못했냐 아니냐를 따지고 싶은 게 아니라 알고 싶은 거거든요. 근데 이것도 제 시선에서의 그날이라, 최대한 많은 목격자들의 진술을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저도 드는 거죠. 이 현장을 하나하나 사연 모집하듯이 다 듣고 싶어요." (김초롱씨)
'나의 시선'에서 '타인의 시선'까지 목격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도 유가족이라고 했다. 초롱씨는 유가족들의 뒷모습을 얘기를 꺼냈다.
"공청회 때, 추모제 때 유가족분들 뒷모습을 봤는데 어깨가 축 쳐져서... 국회의원들하고는 어깨부터 걸음걸이부터 달라요. 그걸 보고 너무 놀랐어요. '힘드시겠다' 하는 건 그냥 내 어림짐작이었구나. 그 슬픔의 실체가 드러나니까 감정의 휘용돌이가 막 올라오는 거예요. '내가 본다'고 노력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구나. 내가 얼마나 안다고 자만했나, 보면 볼수록 안 보이던 게 보이는데 뭘 얼마나 했다고 '글을 그만써도 되겠다' 한 건가 싶었죠." (김초롱씨)
깨달음은 자신을 일으켜 세우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오천만 국민 중에 딱 159명, 유가족이나 피해자 많아 봤자 1000명이에요. 아무도 모르는 걸 혼자서 느끼고 있는 그 고립감은 어떨까요. 저도 인간관계가 끊기는데 유가족분들은 어떨지 상상도 못하겠어요.
원래 내가 갖고 있던 외로움의 2배, 3배, 4배가 될텐데, 이 외로움은 결국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거든요. 그런데 저조차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고 그걸 알고 나니 다른 방향으로 저를 일으켜 세우게 돼요. 적어도 보고 느낀 게 있으면 눈은 감지 말자, 이렇게 결론이 자꾸 나요." (김초롱씨)
그래서 초롱씨는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현장을 겪은 나도 이런데 뉴스로만 이 사건을 보는 사람들은 절대 모르겠구나, 하나하나 떼어서 보여줘야겠다"고 마음 먹었다고 했다. 그는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듣게 하고, 느끼게 해줘야 겠다. 감각으로 전달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겠다' 싶다"라며 "그게 결국 영화인 거 같다"고 말했다. 초롱씨는 시나리오 작업을 준비 중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 과정은 결국 진상 규명에 닿아있다.
"진상 규명, 사실 별 거 아니거든요. '1초마다 이런 일이 있었구나' 그렇게 사회적으로 합의가 되고 인정이 되면 되는 거거든요. 그게 안 되면 마음의 멍울이 빠져나가지 않고 계속 여기(가슴을 가리키며)에 있는 거란 말이에요. 그 멍울이 해결되지 않으니 후시딘이라도 발라줘야 될 거 아니에요. 그게 바로 진상 규명이에요. 멍이 든 상태로 30년, 아니 죽을 때까지 이걸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끔찍해요. '제가 살아야겠으니 도와주세요' 개념인 거거든요. 진상 규명이 결국 치료에요" (김초롱씨)
"맞아요. 진상 규명이 저희한테는 애도의 출발이자 애도의 끝이에요. 내 프레임 그 너머의 것도 보고 싶다, 그게 제가 갖고 있는 마음이었어요. 이 참사는 아직 우리에게 도달하지 않았어요. 조금도요. 우리가 궁금한 모든 1초들이 다 밝혀졌을 때, 우리가 들어야 할 모든 이야기들을 듣고, 사과받아야 할 모든 사람이 사과받고, 처벌받아야 할 사람들이 처벌됐을 때. 우리는 드디어 아이들을 보낼 수 있겠죠. 초롱씨 말처럼 30년, 40년이 될까봐, 너무 무서워요." (진창희씨)
그리고, 초롱씨는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이 사건을 틀어서 보는 분들, 왜 저렇게까지 하나 생각하는 사람 분명히 많을 거잖아요. 그렇다고 해도 쓴소리 안 하고 침묵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애도가 돼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위로 하는 방법을 잘 몰라서 자꾸 남탓을 하고 비판하고 그러는데요. 응원을 못하겠으면 비난이라도 말아야지, 이건 굉장히 가벼운 마음이잖아요. 그걸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게는 힘이 돼요. 침묵도 애도가 된다는 거, 많은 분들이 알아주셨으면 해요." (김초롱씨)
[에필로그] "봄이 오잖아요, 괜찮아요"
두 사람은 10여 년 전 같은 대전 지역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 살았었다는 사실에 "스치듯 지나쳤을지 모른다"며 반가워했다. 진씨의 딸이 산다는 서울 서대문구에 초롱씨도 살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전혀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두 사람은 이태원 참사를 통해 연결됐고 앞으로의 연을 기약했다.
'상황을 문장으로 기억해 버릇 해 참사 이후 글을 쓸 수 있었다'는 초롱씨에게 오늘 만남은 어떤 문장으로 기억될까.
"오늘 말해 주신, '도망가도 된다'로 기억될 거 같아요. 세게 와닿았어요. 저한테 외면해도 된다고 말해줄 수 있는 유일한 분들이 그런 말을 해주니 얼마나 도움 되는지 몰라요. 힘들면 도망갔다가 다시 돌아와도 되고 안 와도 된다, 이 말이 너무 슬프면서도 또 얼마나 저를 자유롭게 하는지 몰라요. 어쨌든 자유로워야, 제가 뭐라도 할 수 있잖아요."
진창희씨는 말했다.
"저는 그냥 초롱씨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봄이잖아 이제 봄, 봄이 오잖아요... 다 괜찮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