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경찰을, 사업가를, 음악가를, 간호사를, 배우를 꿈꿨던 159명의 바람은 이뤄졌을지 모른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편집자말] |
지난 겨울 광주엔 유독 눈이 많이 내렸다. 폭설이 온 어느 날, 엄마는 아들을 보러 가겠다고 했다. 애써 말리던 아빠는 결국 아내와 함께 차에 올랐다.
어렵사리 도착한 광주 영락공원 묘역. 두텁게 쌓인 눈 때문에 아들의 납골묘를 쉽사리 찾을 수 없었다. 아빠는 아들이 잠들어 있는 곳을 가리키며 "대략 이쪽이니까 인사하고 가세"라고 말했다. 하지만 엄마는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켜켜이 덮인 눈을 쓸어내며 아들의 묘를 찾아 나섰다.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의 언 손 사이로 '김재강' 세 글자가 보였다. 아들의 묘비를 닦고 또 닦아내며 엄마는 눈물을 쏟아냈다. 그런 아내의 모습을 보며 아빠도 하염없이 눈물을 훔쳤다.
지난 2월 26일 그곳에서 재강씨의 아버지 김영백(61)씨를 만났다. "제가 원래 눈물이 없었거든요. 근데 여기만 오면 눈물이 나요." 아들의 묘비 앞에 선 그의 눈시울이 또다시 붉어졌다.
아들의 눈물, 아빠의 진심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김재강(1994년생)씨는 취업 3개월 차 토목회사 신입사원이었다. 초등학교 내내 반장을 놓치지 않았던 재강씨는 자연과 환경 그리고 토목과 건축 분야에 관심이 많았다.
운동을 즐기고 건강했던 재강씨는 고3 때 갑자기 몸이 아파 어려움을 겪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머리와 눈 쪽에 생긴 대상포진 때문에 입원까지 한 그는 재수를 고민하다 곧장 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정했다. 고향인 광주의 한 대학에서 토목공학과를 졸업한 그는 토목기사 자격증을 취득하며 서울의 탄탄한 토목회사에 취직했다. 회사에 다니면서도 재강씨는 토목시공기술사 자격증을 준비하며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빠는 꿈을 향해 달려온 재강씨의 노력을 너무도 잘 알기에 더욱 마음이 아리다.
"2년 가까이 취업 준비를 하는 동안 늦게까지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독서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거기서 밤도 새고 그랬죠. 근데 평소에 의연하던 아들이 어느 날 친구들이랑 술 한잔 하고 왔는지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아빠는 그날 아들과 나눴던 대화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아들 : "아빠는 그 어려운 시절에 고등학교까지만 나와서도 가정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살아오셨는데 저는 대학까지 나와서 나름대로 노력하는데도 쉽지가 않네요."
아빠 : "아빠는 너무 일찍 직장에 들어갔던 게 오히려 힘들었단다. 절대 미안한 마음 갖지 말고 네가 원하는 꿈 이루고 직장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천천히, 차분히 준비해라. 절대 늦지 않았다. 아니 늦어도 괜찮다. 아빠 아직 젊고 괜찮으니까."
아빠는 취업 직후 기뻐하던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특히 본인 전공을 살려 일을 할 수 있게 돼 정말 신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아이가 세상을 떠나 버려 너무도 마음이 아픕니다"라고 울먹였다.
직장을 구하며 서울로 떠난 재강씨는 고향을 향한 애정을 놓지 않았다. 광주 소식을 다룬 기사를 자주 챙겨보며 특히 최근 물 부족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아빠는 "대견하기도 하고 마음이 아리기도 합니다"라며 깊은 숨을 내쉬었다.
"아들이 고향 문제를 허투루 보지 않더라고요. 본인 전공도 그렇고 직장도 그쪽 계통이니 댐 연계 방법 같은 걸 고민하고 회사 안에서도 이야기한 모양이에요."
서울살이를 시작한 후 재강씨는 매일 가족 카카오톡 단체방에 '퇴근 후 주차' 사진을 올렸다. 운전을 막 시작했던 터라 가족들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였다. 어떤 날은 아빠가 "사이드미러를 접지 않았다"고 하자 다음 날 바로 접힌 사이드미러 사진을 올린 재강씨였다. 재강씨의 주차 사진은 10월 28일(이태원 참사 전날) 이후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여행과 산책을 좋아했어요. 가족 여행을 가게 되면 계획부터 마무리까지 도맡아 하는 다정다감하고 듬직한 아이였죠. 저와 나이 차이는 좀 있었지만 아들이 제 마음을 잘 읽어줘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산책 후 경치가 좋은 찻집에서 함께 차를 마시며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제법 잘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보며 얼마나 흐뭇했는지 몰라요. 참사 전엔 해외로 가족 여행을 가자고 그랬었는데 이제 할 수 없게 됐네요."
여전한 의문
아빠는 2022년 10월 29일에서 30일로 넘어가던 오전 5시께 TV로 참사 소식을 접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경찰이 전화를 받았다. 경찰은 아들의 휴대전화가 "분실 접수된 상황"이라고 했다.
재강씨 가족은 곧장 실종신고를 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 사는 친척·지인들과 재강씨를 찾아 나섰고 동분서주 끝에 오전 11시께야 아들을 영안실에서 마주했다. 경찰로부터 연락이 온 건 그로부터도 약 6시간 후, 참사 발생(10월 29일 오후 10시 30분께) 기준으론 약 18시간 만인 10월 30일 오후 5시께였다.
아빠는 그 긴 시간 동안 정부와 지자체, 경찰은 무엇을 했는지 지금도 답답할 뿐이다. 아들 소지품 중 신분증이 있었고 첫 통화 때 아들 정보를 다 이야기했음에도 왜 그토록 연락이 늦었는지, 간밤에 아들은 어떤 상황이었는지, 혹시 아들을 구할 골든타임을 놓치진 않은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또 영안실에서 마주한 아들이 나체 상태였던 점과 경찰이 갑자기 부검과 마약을 거론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분노가 차오른다. 이 같은 의구심을 해소하기 위해 아빠는 구급일지 등을 당국에 요청했지만 감감무소식이다.
4년 전 퇴직 후 양봉 일을 하던 아빠는 참사 후 일손을 놨다. 엄마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고 재강씨 누나 역시 부모님을 돌보기 위해 일터를 떠났다. 아빠는 "뭘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고 공허합니다"며 "심리치료를 받아도 마음의 변화가 없습니다"라고 토로했다.
"돌이켜보면 젊었을 때부터 제 삶은 순탄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눈물을 흘릴 일도 거의 없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매일 눈물이 나요. 제가 한 직장에서 40년 동안 일했습니다. 그 오랜 직장생활 동안 앞에 나서서 소리 낸 적도 없고 조용히, 평범하게 지내왔습니다. 분노라는 걸 해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좀 다릅니다. 전 이제 무서울 게 없어요. 우리 아들 생각만 하면, 그 억울함을 벗겨줄 수 있다면 지금은 뭐라도 하고 싶습니다."
엄마·아빠는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분향소에서 참배객을 맞이하고, 기자회견에 참여하는 등 다른 유가족과 함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빠는 "대통령의 진정한 사과, 능력이 부족한 고위 공직자들의 교체 등이 하루빨리 이뤄져야 합니다"라며 "또한 제대로 된 추모 공간을 마련과 독립적 조사기구 설치도 어서 진행돼야 합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어 "국가의 첫째 임무는 국민의 안전보장이건만 그날 이태원은 치안 공백 상태였습니다"라며 "나태하고 무능한 고위 공직자들 때문에 수많은 우리 청춘들이 세상 떠났습니다, 별이 된 망자들의 억울함을 조금이라도 달래주고 싶습니다"라고 덧붙였다.
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아들아. 너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이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 네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정신을 차리면 마음이 너무 공허하고 허탈해 어떤 일도 할 수가 없구나. 2022년 10월 붉게 물든 단풍이 우리 아들의 핏방울처럼 보인다. 그 아름답던 자연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구나.
요즘은 술을 조금씩 한다. 취해야 잠에 들 수 있구나. 엄마는 음식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그냥 배달 음식으로 한 끼, 두 끼 먹고 만다. 시도 때도 없이 아들 생각이 날 때면 엄마는 영락공원에 가서 운다. 그런 엄마를 보며 아빠도 마음이 아프다. 특히 이번 설 명절엔 아들이 더욱 더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재치 넘치던 네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내가 보기엔 엄마에 비해 누나의 음식 솜씨가 덜했는데 넌 항상 '누나만의 독특한 맛이 있다'고 격려와 용기를 줬었지. 여느 비슷한 또래의 남매 같으면 그냥 '맛없다'고 했을 텐데 말이야. 얼마 전 집 가까운 식당에서 밥을 먹는데 네 누나가 밥을 먹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더라. 들어보니 네가 취업 준비로 힘들어 할 때 누나가 자주 불러내 밥을 사줬다면서? 우리가 간 식당이 누나와 네가 자주 갔던 식당이었던 모양이다. 그때 아빠 마음이 얼마나 아프던지.
목욕탕에 가면 항상 아빠 등을 밀어주던 아들. 왜소한 아빠의 건강을 걱정했던 우리 아들의 손길이 간절하다. 가끔 서울에 갈 일이 생기면 네가 기차표를 예매해 꼭 휴대폰으로 전송해주곤 했었잖아. 며칠 전 서울에서 유가족 간담회를 마치고 광주로 내려오는 기차를 타는데 네 생각이 너무 많이 나서 혼자 많이 울었다.
이런 참사가 없었다면 아들 배웅을 받으며 행복한 마음으로 기차를 탔을 텐데... 네가 항상 기차 객석까지 들어와 자리도 찾아주고 손도 흔들어줬잖아. 기차는 그렇게 좋은 추억이 담긴 곳이었는데 이젠 기차를 타는 것도, 서울을 오가는 것도 괴로운 일이 되고 말았다. 안전하지 않은 이 세상에 미련 두지 말고, 저세상에선 안전하고 편안히 네가 못다 이룬 꿈을 맘껏 펼쳤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