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속한 종자 개량과 육종 성과는 과거 우리 국민의 주린 배를 채워준 고마운 존재다. 반면 오로지 '생산성'만을 우선시 하게 돼 예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 고유의 생명자원을 잃게 한 배경이기도 하다. 화학비료와 농약에 잘 견디고 수확량이 많은 개량종자에 밀려 토종의 설 자리는 점점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생명 다양성을 위한 유기농업이 근근이 우리 들녘 한편을 지켜오면서 토종씨앗도 그 가느다란 명맥을 이어왔다. 땅과 사람에게 이로운 농업, 다양한 생명자원을 향한 노력의 일환으로 토종씨앗을 연구하는 이를 만나 지금 우리가 토종씨앗을 지켜야 하는 이유를 들어봤다. 충북 괴산의 흙살림 토종연구소 윤성희 소장이다. 인터뷰는 지난 3월 21일 진행됐다.
(*<월간 옥이네>를 발행하는 지역문화활력소 고래실은 올해 충북 옥천군 신활력플러스사업단과 함께 옥천토종씨앗학교를 운영한다. <월간 옥이네>는 그 현장과 함께 지역 안팎에서 토종씨앗을 지켜가는 다양한 활동을 지면을 통해 소개할 예정이다.)
토종종자, 유기농업에 반드시 필요한 영역
- 특별히 토종종자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흙살림 역사에 대한 설명이 먼저 필요할 것 같다. 흙살림은 유기농업을 연구하고 확산하는 운동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다(1991년 이태근 회장 설립). 자연스레 토종종자'도' 흙살림이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주제가 됐다.
정책과 기술 등 유기농업을 이야기하는 데 있어 여러 갈래가 있지만 유기농의 기본 원칙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종자'다. 누군가(종자기업)로부터 계속 종자를 사서 쓰는 것이 유기농업의 원칙과는 맞지 않다. 이제 우리는 상용종자(상업종자)를 당연하게 생각하게 됐지만 이는 '종자 지속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종자 자급과 지속가능성이 유기농업의 중요한 가치라는 점에서 그 지역에 적응된 종자, 토종은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개인적으로 대학에서 종자 관련한 공부를 했고, 1990년대 초 우리나라 유기농업 초창기 흙살림 활동에 참여하면서 토종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그냥 놔두면 사라지고 마는 것들, 소멸 위기의 토종씨앗에 관심이 많다."
- 최근 몇 년 사이 토종에 대한 관심이 과거보다는 부쩍 커졌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여전히 '토종'은 낯선 존재이기도 한데.
"그 범위도 넓고 정의하기 나름이긴 하지만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토종 자원들도 있다. 바꿔 말하면 토종 중에서도 성공적인 모델이 있는 건데, 바로 '한우산업'이다. 일만 하던 소가 고기를 활용하는 소가 되면서 비약적으로 성장했는데, 우리 일상 속에 '토종'이 자리매김한 대표 사례인 셈이다.
또 하나는 인삼인데 이는 텃밭에서 길러 먹는 수준이 아니라 대단히 큰 산업이다. 지역으로 따지면 상주의 곶감산업도 들 수 있다. '둥시'라는 종자로 곶감을 만드는데 토종이라는 재래자원으로 성공적인 지역 특산품을 만들었다. '진돗개'도 잘 유지되고 있는 토종의 예다. 마늘 중에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의성종, 단양종, 서산종 같은 것들이 있다."
- 앞서 지적하신대로 유기농업, 친환경농업과 토종종자는 뗄 수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를 지켜가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이나마 '수월한' 토종씨앗 보전을 위해서는 어떤 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보나.
"각 시군이나 도에서 토종종자 보전 조례를 만들어 토종작물 직불금을 지원하는 식의 나름의 정책이 있긴 하다. 아직까지는 지자체마다 대동소이하지만, 문제는 토종종자가 이미 많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농가 단위에서, 지역 단위에서 유지가 힘들기에 지자체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 시군 지방자치단체에서 자체적으로 그 지역 종자를 수집·보존·유지하는 일을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종자는 정책과 기술이 항상 붙어 다녀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토종종자 수집과 보존·채종·증식과 재배기술을 함께 보급해야 하는 것이다. 종자를 다루는 특수한 기술의 영역인데, 이를 위한 종자 특성 조사와 연구에도 관심과 지원이 필요하다. 지자체마다 각 지역의 종자 은행을 운영했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에 비용 지원과 전문성이 중요한데 이걸 민간이 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행정과 정치의 역할이 중요한 부분이다.
우리의 경우 농촌진흥청이 토종씨앗 수집과 조사·관리 영역에서는 잘 하고 있다. 하지만 지역 차원에서는 아직 이런 부분에 대한 관심이나 활동이 미약한 수준이다. 외국에서는 토종 보전 활동을 흔히 '종자 운동'이라고 표현하는데, 선진국의 종자 운동은 그 역사가 깊다. 우리는 길어봐야 20년 정도인데 반해 그들은 40~50년 수준이다.
이런 곳들을 보면 정책적인 기반과 함께 민간 활동도 굉장히 활발하다. 비영리기관이 운영하는 종자 은행도 있고 그곳에서 종자 수집과 보급을 함께하기도 한다. 이렇게까지 나아가려면 중앙정부 차원의 토종종자 정책이 각 지역 특성에 맞는 정책으로 확대돼야 한다. 이를 해내는 게 각 지자체의 역할이다."
토종종자들, 1%를 찾아라
- 흙살림은 2010년 경 괴산에서 토종씨앗 수집 등 관련 활동을 진행한 바 있다.
"당시 괴산군에 제안해 진행한 '토종거점 육성사업'의 일환이었다. 토종씨앗 수집뿐 아니라 연구, 관련 교육을 함께 했다. 수집한 종자는 농촌진흥청에 기탁했고, 자체적으로 보관하며 토종 채종포를 꾸준히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지금도 종종 씨앗 수집 및 특성조사, 증식과 씨앗을 교류한다.
아마 지금 시점에서 수집한다면 당시 모았던 300종의 종자 중 상당수는 사라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무리 늦었다고 해서 이게 필요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옥천군 역시 이미 유실된 씨앗이 많다 하더라도, 지금이라도 씨앗 수집을 해야 한다. 종자를 수집해 목록을 만들고 시범재배를 통해 고유한 특성과 맛을 남겨야 한다. 이 과정을 반복해 순도 높은 종자를 보존하고 이게 어느 정도 정리돼야 농가 단위의 토종종자 사업화가 가능해진다."
- 실제로 농사짓고 있는 토종종자는 어떤 것이 있는지, 또 실제 식생활에서는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연구소 농장에서 토종 농사를 짓고 있다. 현재 농촌진흥청 사업으로 '토종종자 유기농업 활용 연구'를 진행 중인데 벼, 콩, 조, 팥 중에 유기농 재배에 적합한 토종종자를 골라내고 수집·증식해 농가 재배를 확대해본다는 게 그 목표다.
농사지은 것은 100% 다 먹어보는데, 가능한 여러 방법으로 조리한다. 예를 들어 토종콩을 수확하면 밥에도 넣어보고 두부로도 만들어보고 콩국으로도 먹어보는 식이다. 팥 역시 밥에 넣어보고 죽이나 양갱을 만들어 맛과 특성을 비교한다."
- 토종이 익숙하지 않은 만큼 그 맛에 대해서도 환상이 있다. 선비잡이콩이 그렇게 맛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어봤는데, 직접 먹어본 토종은 어떤가.
"소위 말해 '겁나게' 맛있다면 낮은 생산성과 상관없이 무조건 살아남았을 것이다. 너무 기대는 말아야 한다(웃음). 현재 우리 농업판이라는 것이, 아주 우월하게 개량된 유전자와 재래종이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서 참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토종의 가치를 찾고 여기서 경쟁력을 확보하는 작전을 써야 하지 않겠나. 그런 시도가 필요한 시기이고, 또 그게 가능한 시기가 되고 있지 않나 싶다.
수많은 토종콩 중 99%는 맛이 엇비슷하다. 1%의 차이를 찾아나가야 한다. 재배적인 측면에서 유리할 수도 있고, 특별한 맛이 있을 수도 있다. 밥보다 콩국, 된장이나 간장 등을 만드는 게 더 유리한 종자가 있을 수도 있다. 토종에 있어서는 그걸 계속 찾아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요즘 젊은 사람들 중에 토종을 활용한 가공 식품화를 고민하는 이들도 종종 등장하는 듯하다. 그런 쪽으로 토종의 가능성이 열려있다고 본다."
- 일상에서 토종종자를 만날 기회를 많이 만들어 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 보인다. 지역에서는 어떻게 이런 활동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저는 다른 지역에 가면 그 지역 로컬푸드직매장을 반드시 들른다. 간혹 토종종자가 나오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토종이 있는 매장은 매년 가보는데, 매년 바뀐다. 사라지는 것도 있고 새로 등장하는 것도 있다. 어찌됐든 계속 토종작물이 나온다는 것은 누군가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거고, 누군가 심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작은 규모이든, 좀 더 큰 시장이든 그렇게 선순환으로 굴러가게 하는 게 제일 좋은 일이다."
"토종씨앗의 매력은 다양성"
- 토종씨앗의 매력,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지켜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다양성이다. 종자는 우리 역사, 문화와 결합돼 있다. 외국의 유명한 와인을 보면 다 그 지역에서 오래도록 이어져온 포도 품종을 활용한 것이다. 거기에 깊이가 있고 이야기가 있다. 또 맛이 있다. 이는 상당히 큰 매력이다. 반대로, 우리 토종종자는 소멸돼가는 만큼 희소성이 있지 않나. 시장가서 돈 주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계속 탐구하고 보전할만한 가치가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 옥천토종씨앗학교에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런 시도가 중요하다. 물론 지금은 낮은 수준의 활동이지만 이후 관련 교육을 통해 원대한 꿈을 만들어 가야 한다. 옥천은 토종씨앗으로 어떤 비전을 그려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을 해야 한다.
종자 수집과 관리, 보관법 등은 여러 기술적 영역이 있고 이건 배워야 하는 부분이다. 옛날 농민들은 모두 이런 능력이 있었지만 지금의 우리는 잃어버린 것들이다. 이를 배우고 기록하고 문서화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지금 단계에서는 무엇보다 채종포(씨앗을 받기 위해 마련한 밭)를 계속 운영하고 유지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더불어 토종씨앗 관련 여러 단체와 조직이 있으니 가능한 많은 협력망을 구축해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옥천에서는 과거 안내·안남·청성 쪽에서 돼지찰벼(옥천 돼지찰벼, 안내찰 등의 명칭으로 불림)를 많이 했다. 이걸 다시 수집하고 종자 순계분리를 통해 순도를 높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특성조사와 함께 관련 기록 생산도 필요하다. 이렇게 기록을 남기는 것이 과학이고 향후 토종이 계속 재배될 수 있는 밑바탕이다. 그렇게 되면 옥천 돼지찰벼로 떡, 뻥튀기, 막걸리 등 다양한 지역 특화 상품으로도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옥천을 넘어 전국을 상대로 지역의 토종 자원이 확산할 계기를 만들어 가시길 바란다."
월간 옥이네 통권 70호 (2023년 4월호)
글·사진 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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