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최 영어는 늘지 않는다. 나처럼 세기의 문법책, 빨간 영어책으로만 영어를 배운 세대라면 다들 영어콤플렉스를 갖고 있지 않을까? 영어는 정말 우리말과 다르다고 느낀다. 말도 안 되는 말인 줄은 알지만, 어떨 땐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끼리는 진짜 서로 소통이 될까'라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나의 '애증의 언어' 원조국 영국에 왔다. 한 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세계를 주름잡았고 자국 언어를 세계 공용어로 만들어버린 '대영국'은 음식만큼은 불명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01년 영국 외무장관 로빈 쿡이 영국민이 즐겨 먹는 '치킨 티카 마살라(Chicken tikka masala)'를 영국의 국민요리로 치켜세웠다가 '진짜 영국음식으로 볼 수 있느냐'의 논쟁만 불러오고 오히려 '영국 음식은 피시앤칩스' 공식만 더 각인시켰다고 한다. 하필 미식계의 엄친아 프랑스가 이웃이라 영국의 음식이 더욱 평가절하된 면도 있다고 한다.
피시앤칩스는 단체급식의 생선튀김?
런던에 와 보니 영국 음식 내지 유럽 음식을 내는 식당에서는 무조건 피시앤칩스를 취급하는 것 같았고, 모든 펍(Pub)의 첫 번째 메뉴가 피시앤칩스였다. 피시앱칩스 테이크아웃 전문점도 꽤 있었고 햄버거, 피자와 더불어 3대 패스트푸드였다. 물론 이 '피시앤칩스 르포'는 런던 생활 일주일 관찰자 시점이다.
난 영국에 오기 전 피시앤칩스를 빙어튀김이나 미꾸라지튀김 정도로 상상했다. '칩스'가 주는 어감이 얇게 썬 감자칩을 떠올리게 했는지 맥주 안주로 집어먹기 좋은 작은 생선 튀김인 줄 알았다. 예상과 다르게 큰 생선덩이를 튀겨 손가락 마디만 한 굵은 감자튀김과 같이 내왔다. 대개 대구류(Cod, Hadock)의 흰살생선을 튀기고 레몬 조각과 타르타르소스를 곁들인다. 어디서 먹어 본 차림이다. 우리나라 단체 급식에 종종 나오는 생선가스와 다르지 않다.
피시앱칩스는 쉽게 구할 수 있는 생선과, 한 때 먹을 것이라곤 감자밖에 없었던 서민들의 주식인 감자가 만나 만들어진 대표적인 노동자 계급의 음식이라고 한다. 산업혁명으로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구해 도시로 밀려들던 시절부터 빠르고 간단하면서도 열량 높은 음식으로 서민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오늘날 피시앱칩스는 여전히 대표적인 길거리음식이면서 동시에 식당에서 맥주와 함께 즐기는 한 접시의 요리로 정착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성금요일에 육식을 하지 않는 기독교 전통이 아직도 남아 있어 학교 급식에서 금요일 메뉴로 피시앤칩스를 더러 낸다고 한다.
더블린을 거쳐 런던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피시앤칩스는 주야장천 먹었다. 갓 튀긴 신선한 흰살생선의 첫 몇 입은 고소하고도 감칠 맛이 난다. 문제는 '튀튀조합'. 생선튀김을 감자튀김과 같이 먹는 건 적어도 내겐 고역이었다.
피시앤칩스에 싫증 났을 무렵부터 '다른 영국적인 음식은 없을까'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영화 <노팅힐>의 배경으로 유명해진 포토벨로 마켓을 갔을 때였다. 현지인 넷이서 똑같은 음식 접시를 하나씩 들고 야외 테이블에 앉는 모습을 봤다. 처음 보는 음식이라 다가가서 음식 이름을 물었다. 파이앤매시라고 했고 그 가게는 바로 파이앤매시 전문점이었다.
영국인에게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요리
나도 파이 한 개와 매시 한 개를 시켰다. 파슬리를 넣어 만든 투명하면서도 걸쭉한 리큐어(iquer) 소스를 끼얹어줬다. 파이앤매시(Pie and Mash)는 다진 고기가 든 빵과 으깬 감자를 같이 먹는 요리였다. 운율을 살려 지은 요리 이름이 재치 있다. 6유로 정도면 먹을 수 있는 저렴한 음식으로 간단한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하다. 동네 사람들이 포장을 많이 해가고 있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100년도 넘은 파이앤매시 식당이 있어 들어갔다. 내공 있는 파이집답게 파이의 종류가 많았는데 가장 신기한 건 장어파이였다. 파이는 고기나 야채 등을 다져 구운 빵이라 만두가 연상되었다.
실제로 매시앤파이는 영국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거나 위로를 주는 소박한 음식으로 '컴포트 푸드(comfort food)'에 속한다고 한다. 다시 영국에 간다면 또 파이앤매시를 먹어보고 싶다. 그때엔 3차 도전이니 레벨을 한 단계 더 높여 장어파이나 장어젤리파이로 시켜봐야지.
런던 거리를 다니다가 영화배우 콜린퍼스 같은 남자를 더러 마주쳤고 그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어느 날 런던의 수많은 콜린퍼스 중 한 사람이 공원 벤치의 내 옆자리에 앉는다면 "당신네 나라 음식 하나를 추천해 주실래요?" 정도는 그럴싸한 영어로 물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영포자(영어 포기자) 구제 프로젝트로 돌입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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