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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9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경찰에 첫 신고가 들어왔다. "압사당할 거 같다." 공권력이 제대로 대응만 했다면 159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비극을 막을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는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34분 이태원 희생자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이태원 참사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편집자말]
 아들의 흔적들로 가득한 방에서 그리운 아들 사진을 보며 추억하는 김희정씨.
아들의 흔적들로 가득한 방에서 그리운 아들 사진을 보며 추억하는 김희정씨. ⓒ 권우성
 
1.9kg로 약하게 태어나 초등학교 때까지 틈만 나면 괴롭힘당하던 아이. 그럼에도 한 번도 울고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 '울면 지는 거'라는 말에 눈물을 꾹 참았다는 여린 아들. 걱정이 많았던 엄마는 구청과 교육청에서 하는 학교폭력 예방 교육을 찾아다녔다. 그러던 아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확실히 달라졌다. 

"어머님, 민석이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요. 초반에 공격당하고 참아주면 계속 표적이 되니까요."

자기 책상에 쓰레기를 버린 친구와 싸움을 벌인 날, 엄마는 교무실에서 만난 선생님의 말에서 아들의 변화를 감지했다. "싫다는 항의 표시를 하고, 맞대응했다"는 아들은 그렇게 스스로 보호하는 방법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친구도 자연스럽게 많아졌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선 학급 임원도 맡았다. 의료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간호학과에 합격해 간호장교 입대를 앞둔 2022년 10월, 엄마의 말처럼 민석이는 이태원에서 "연기처럼 사라졌다".

아들 '라파엘'의 야무진 꿈 

이태원참사 희생자인 고 최민석씨(2002년생)의 천주교 세례명은 '라파엘'. 몸과 마음을 치유 해주는 성인이라 의료인들이 많이 찾는 이름이다. 

"우리 민석이 참 라파엘처럼 살았군요."

장례식장을 찾은 아들의 주일학교 신부님의 이 말을 엄마는 곱씹었다. 청진기와 가운을 입고 포즈를 취한 어린 시절의 사진부터, 과학이며 수학 경진대회에서 받은 수많은 상장들을 볼 때마다 아들이 오랫동안 이 꿈을 품어왔구나, 생각했다.
 
 고 최민석(라파엘)씨의 첫 영성체 기념 사진.
고 최민석(라파엘)씨의 첫 영성체 기념 사진. ⓒ 권우성
 
 고 최민석씨가 의료기기 장난감을 착용한 어릴적 사진과 학생간호사 실습 당시 사진.
고 최민석씨가 의료기기 장난감을 착용한 어릴적 사진과 학생간호사 실습 당시 사진. ⓒ 권우성
 
고된 일이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반대도 해봤지만, 아들의 의지는 분명했다. 민석씨의 어머니 김희정씨는 지난 11일 <오마이뉴스>와 만나 "(민석이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너무너무 좋아했다"고 했다. 간호학과에 입학하려고 다른 대학교의 등록과 취소를 5번 반복하고, 겨우 입학에 성공했을 때 아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들은 "나 계획이 있어"라며 군 입대부터 간호사 국가고시, 해외 취업 등 자신의 계획을 브리핑했다.
 
"그러니까 엄마, 내가 해보고 힘들면 다양한 방법으로 또 일할 수 있으니까. 일단 해보게만 해주세요."


학교에서 마련한 아들의 명예 졸업식이 열린 지난 2월, 엄마는 지도교수님과 친구들로부터 아들의 다정하고 성실한 일화들을 잔뜩 전해 들었다. 성인이 되면서 집을 떠나 자취했던 아들. 엄마가 몰랐던 모습이 많았다. 편입학해 적응하기 힘들어하는 친구들에겐 항상 먼저 밥을 먹자고 손을 내밀고, 울적한 일이 생긴 친구들에게는 마술을 보여주며 분위기를 바꿨다는 아들. 교수님께는 진로며 자격증이며 늘 묻고 상담하던 학생이었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민석씨는 등록금 걱정 없이 매번 장학금을 받았다. 

아직 사망신고 하지 못한 엄마 
 

민석씨의 방에는 그의 생애 기록 전부가 모여 있었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주려고 보관해 둔 배냇저고리부터 난생 처음 신은 보행기 신발, 유치원 때 직접 만든 도자기 장난감, 첩첩이 파일로 정리해 둔 상장과 어버이날 편지, 직접 그린 그림들이 차곡차곡 놓였다. 비어있는 유일한 아들의 기록은 국가기관으로부터 받아내지 못한 사망 당일 마지막 흔적뿐이다.
 
 김희정씨는 아들이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주려고 고 최민석씨의 배냇저고리와 신발 등을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김희정씨는 아들이 결혼해서 아기를 낳으면 주려고 고 최민석씨의 배냇저고리와 신발 등을 고이 보관하고 있었다. ⓒ 권우성
 
그리고 민석씨의 봉안함이 책상 위에 있었다. 엄마는 아들을 아직 보내지 못했다.

"저는 그 서류를 만들 수가 없어서, 민석이 사망신고도 안 했어요. 저 죽을 때 해달라고 했어요. 어처구니없이 떠밀려 그렇게 장례 치르고... 우리 아이 평생 산 20년 중에, 유치원, 학교, 학원 다닌 시간 빼면 온전히 저랑 있었던 시간은 7년 정도 되겠죠..."

이미 지방의 한 추모관에 관리비까지 완납한 상황이지만, 그 먼 거리에 아들을 두고 올 수가 없었다고 했다. "매일매일 보낼 생각도 하지만, 지금까지도 못 보내고 있다"고 했다. 아들의 유골 일부로 옥색 빛의 구슬을 만들었다. 민석씨의 생일 때 아들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찾아오거나 하면 늘 구슬을 지녀 함께 했다.
 
 고 최민석씨의 책상에 놓인 봉안함.
고 최민석씨의 책상에 놓인 봉안함. ⓒ 권우성
 
그날 밤, 엄마가 보고 들은 것 

참사 당일, 민석씨는 신분증과 자격증, 헌혈증이 담긴 지갑을 통째로 도둑맞았다. 아들이 친구와 맞춘 지갑이라 찾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 지갑은 올해 1월 2일에야 경찰서 등기우편으로 집에 돌아왔다.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은 것은 아들의 사망 당시 흔적과 기록들이다. 정보공개청구를 해도, 아들이 참사 당일 어떤 구급 조치를 받았고, 어떤 경로로 이송되었는지 전달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날 밤, 엄마는 참사 현장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그날 보고 들은 것들은 여전히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일을 마치고 밤 11시 30분께,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은 순간 걸려 온 전화가 시작이었다.

"(10월 29일 오후) 11시 37분에 민석이 번호로 전화가 왔어요. '어, 민석아' 하니 낯선 여자예요. '누구세요?' 했더니 '어머니 되시나요?' 해요. '네' 하니까 '아드님이신 거 같은데 여기 이태원 해밀톤호텔 옆 편의점 앞에 아드님이 쓰러지셔서 CPR(심폐소생술)을 20분 넘게 하고 있다'고, '의식이 없으니 빨리 와주세요' 이래요. 그래서 '제발, 전화 끊지 말아 달라'고, '우리 아들 옆에 있어주시면 제가 갈 테니까 15분 아니 10분이면 된다고... 기다려달라'고 했어요."
 

마음이 다급한 나머지 남동생에게 도움을 청하느라 전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다시 전화하니 받지 않았다. 양말도 신지 못한 채 입던 옷 그대로 달려 나가 택시를 잡아타고 외쳤다.

"죽을 것 같은 사람 한 명만 살려 주세요 아저씨... 해밀톤호텔로 빨리 좀 가주세요."

그러나 이미 삼각지 고가부터 차들이 멈춰 서있었다. 택시기사는 걸어가는 게 더 빠를 거라고 했다. 용산 대통령실 부근에 차가 섰고, 물어물어 경사도로를 오르기 시작했다. 녹사평역에 다다랐더니 119 구급차가 수십 대 보였다.

엄마는 "소방관만 보였기 때문에 대형화재가 났구나 생각돼서 가슴이 두근거렸다"고 했다. 녹사평역 초입에서 이태원역으로 가는 길 사이, 엄마는 길바닥에 눕혀진 수 많은 아이들을 목도했다. 그 후 엄마는 몇 번씩 정신을 잃었다 깨길 반복했다. 무릎이 까진 것도 모르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며 아들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경찰을 만났다.

"쓰러지고 넘어지고 걸어걸어... 그러다 겨우 간 곳이 (호텔 인근) 스티커 사진 가게인데, 거기서 호흡곤란이 왔어요. 그때 한 남성이 저를 부축해서 그분한테 물어봤어요. 왜 경찰이 한 명도 없냐고. '저도 사복경찰입니다' 대답을 정확하게 해줬어요. 저를 한 팔로 부축하고 있던 중에 전화 오는 걸 받으며 저에게 호흡하라고 종이를 씌워주는데, 그때 (그 경찰이 한) 통화 내용을 잊지 못해요. '이태원 마약 단속 중이었어, 난리났어'... 이런 말이었어요. 정확히 기억해요. 통화하는 사이 저는 민석이를 찾아야하니까 다시 도망치듯 피해서 다른 곳을 찾았어요. 그러다 또 쓰러지고."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모셔진 고 최민석씨 영정사진과 지인들의 메모.
서울광장에 마련된 이태원참사 희생자 합동분향소에 모셔진 고 최민석씨 영정사진과 지인들의 메모. ⓒ 권우성
 
한 구급대원이 아들이 다쳤다면 병원에 있을 테니 가까운 순천향병원으로 가보라고 했다. 다시 길을 물어 병원으로 향했다. 치료 중일 거라는 희망으로 응급실로 들어갔지만 제지당했다. "우리 아들 찾아야 해요" 통곡했다. 다음날인 10월 30일 새벽 3시쯤에는 현장을 지키던 기자들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다른 병원을 가봐야 하나 하던 차. 새벽 3시 20분께, 민석이 번호로 전화가 왔다. 동대문경찰서였다. 아들의 주민등록번호를 물어왔다.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다.

검안 의사가 내린 아들의 사망 원인은 압착성 질식사였다. 압사로 인한 사망이 분명한데도, 경찰은 부검 의사를 물어왔다. "무슨 부검이냐"고 화를 냈다. 민석씨는 코피만 조금 났을 뿐 얼굴 변색 없이 깨끗하게 누워 있었다. 살갗을 만지니 따뜻하기까지 했다. "자는 듯이 얼굴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엄마가 안고 있으면 심장이 다시 뛸 거 같아 떨어질 수가 없었다. 결국 사지가 들려 밖으로 나왔다.

엄마는 장례를 치른 후에도 참사 현장을 찾고 또 찾았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서", 직접 알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행 중 생존해 아들의 장례식장을 찾은 친구로부터 그날의 상황을 전해 들었다. 민석씨는 그날 친한 형의 생일을 맞아 이태원을 찾았다고 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축제 중인 거리를 한 바퀴를 돌고 헤어지는 계획이었다. 엄마는 민석씨가 그날 밤 저녁을 먹었다는 식당에서부터 참사 현장을 며칠에 걸쳐 네 바퀴 돌았다. 골목길 음식점마다 내걸린 CCTV를 볼 때마다 아들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애가 탔다.

사망신고 하지 않은 아들의 금융정보가 털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계속해서 일어났다. 사망신고도 하지 않은 아들의 금융 정보가 열람됐다. 사건 종결 이후 '죄명 : 변사'라고 기입한 수사 결과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엄마는 통지서 곳곳에 수정할 부분을 빨간 펜으로 표시해 직접 경찰에 항의했고, '죄명'이 삭제된 수정본을 다시 받아냈다. 그는 "사망자는 자기 의사를 표현할 수 없으니 열람해도 된다는 주장을 하는데, (민석이는) 사망신고도 안 했는데 (금융 정보를) 열람했다"고 원통해 했다. 

마르지 않는 눈물은 시력을 앗아갔다. 장례 후 안경만 서너 번을 갈았다. 짠맛이 어느 순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혀끝이 갈라져 피가 맺히기 일쑤였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감각기관이 둔화될 수 있다고 했다. 밤 11시부터 새벽 5시까지는 잠이 오지 않았다. 잠을 너무 못 자서 아들이 꿈에 찾아오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어 억지로 잠에 들곤 했다. "병이 올까 봐" 걱정스러운 나날들이었다.

엄마가 건강을 다시 생각하게 된 건 이태원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를 위한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다. 분향소에 오전 8시에 나가 밤 11시 30분에 돌아오곤 했다. 지난해 11월부터 유가족협의회에 들어가 이태원 녹사평역 분향소 설치부터 아이들의 49재, 시청역 시민분향소 설치, 이태원참사 특별법 발의까지 함께 지켜봤다. 최근에는 국민의힘에 특별법 동참을 호소하는 24시간 농성에도 참여했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최민석 어머니 김희정씨.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최민석 어머니 김희정씨. ⓒ 권우성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내고 있다.
아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 문자를 보내고 있다. ⓒ 권우성

좌절하다가도 버틸 수 있는 이유 

"내가 살아남아서 할 일이 있다는 것에 감사해요. 그래서 나는 열심히 진실을 알리고 좋은 특별법을 만들도록 더 많은 일을 해야겠구나 생각해요. 그래서 시간만 나면 참석해요. 오늘 아침에도 국민의힘 당사 앞에서 선전전을 하고 왔어요. 그리고 오후에 손님 두 분 있어 일하고. 밥은 어떻게 먹고 사느냐 하는 분도 있는데, 밥은 먹고 살겠죠. 밤에는 또 24시간 농성해야 하고, 분향소도 가야하고... 그러다 보니 예전보다 잠은 잘 자요. (참사 이후) 종일 녹사평 분향소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 제가 살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 일들, 이제 시작도 안 됐어요. (진상규명) 조사도 제대로 안 됐고 책임자도 그대로 있고요. 특별법으로 (독립적 조사기구에 의한) 조사가 되고 책임자가 내려와야 (피해자들에게) 위로도 되고, 재발방지도 된다고 봐요. 그 모든 게 아무것도 안 된 상태인데... 분향소에 오시는 시민 분들, 촛불행사 때마다 오시는 분들, 피켓 들어주시는 수녀님들... 시민 분들 덕분에 힘이 생겨요.

'계란으로 바위치기야' 좌절하다가도, 응원 한 말씀 때문에 '아 이분들도 안전하려면 우리가 해야겠구나, 지치면 안 되겠구나' 해요. 사람이라서 지칠 수도 있어요. 그런데 (유가족들이) 여러 사람이잖아요. 오늘 민석이 엄마가 힘들면 다음에는 누구 아빠가 하고, 그다음에는 누구 엄마가 하고..."


엄마는 "릴레이로 버티고 버텨서, 힘을 합치고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어도... 스스로 열심히 돕고 최선을 다하면 기적을 주실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래는 엄마가 아들 민석씨에게 전한 메시지를 정리한 내용이다. 
 
[엄마가 아들에게]
 

"민석아. 너는 지금 하느님 아빠 옆에, 성모님 엄마 옆에. 이 땅에서의 부족한 엄마보다 더 안전하고 훌륭하고 영원하신 분들 옆에서 평안하게 잘 있는 거라고 엄마는 확신해. 마지막 인사는 못 했지만.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못 한 대신 엄마 꿈에 한 번만 밝고 예쁜 모습으로, 한 번만 꿈에 나와서 엄마가 안아줄 수 있게 해주면 좋겠어. 우리 민석이 열흘 동안 엄마랑 보지 못한 채 헤어졌잖아.

엄마는 민석이 엄마답게...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고 있어. 엄마가 민석이 만나러 갔을 때 "엄마 잘했어. 역시 엄마가 내 엄마라는 게 자랑스러워! 역시 우리 엄마야" 하도록 엄마가 만나는 그날까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게. 민석이가 사랑했던 친구들 몫까지 엄마가. 민석이 살아있을 때 친구들을 섬기고 아끼고 챙겨준 거처럼 그 친구들 엄마가 챙길게.

그리고 가끔 엄마 꿈에 나와서 예쁜 민석이 얼굴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우리 민석이는 엄마한테 올 때도 선물이었어. 엄마는 네가 있어서 행복했어. 그래서 열심히 살았고, 또 민석이 엄마 아들이라 엄마는 정말 행복한 엄마였고, 지금도 행복한 엄마야. 천국에서, 민석이가 있는 같은 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엄마가 남은 삶도 민석이 못지않게, 찬란하게는 아니더라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다가 다시 만나는 날을 기다릴게. 그날에는 민석이가 엄마 제일 먼저 마중 나오길 바란다."

#이태원참사#유가족#진상규명#책임자처벌#10.29이태원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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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이태원 압사 참사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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