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어느 한 고급 신축 아파트의 광고문구가 최근 화제가 되었다. 불평등을 찬양하는 듯한 이 광고문구에 많은 시민들은 불편함을 호소했고 결국 이 문구는 해당 광고에서 삭제되었다. 광고의 문구는 사라졌지만, 그 불편함의 여운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우리가 꿈꾸지 않았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이 바로 현실이기 때문 아닐까?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서 그리 멀리 갈 필요는 없다.
광고문구의 바로 그 아파트 신축 현장에서 딱 1킬로미터, 걸어서 20분만 가면 대한민국 최고법원인 대법원 앞, 바로 그 앞에 있는 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수 년동안 서울 서초구 대법원 앞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다. 대법원에 계류 중인 기업의 불법파견사건을 신속하게 마무리 해달라는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지난 5월 25일 열린 문화제에서 차헌호 아사히글라스 비정규직 지회장은 아래처럼 말했다.
아사히글라스는 불법파견과 부당노동행위 등 3개 사건이 대법원에 있다. 대법원에만 2~5년째다. 총 9년째 진행 중인 사건도 있다. 한국지엠의 불법파견 사건도 3년째 대법원에 걸려 있다. 심지어 지난해 7월 최종 선고가 난 포스코의 불법파견 사건은 전체 소송 기간이 총 11년이었다. 그사이에 정년퇴직해 피해를 복구 받지 못한 노동자도 나왔다. 판결이 늦어질수록 기업은 이익을 보고 노동자는 피해를 보게 된다.
늦어지는 재판을 기다리는 건 기업이나 노동자, 양 당사자에게 동일한 일이다. 그러나 늦어지는 재판기간 동안 겪어야 하는 현실은 기업과 노동자가 똑같을 수는 없다. 기업은 막대한 자금으로 대형로펌 변호사로 소송대리인단을 꾸리고 사건을 맡겨둔 채 자신들의 일에 집중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돈도 부족하고 지난한 재판기간 동안 생계를 유지하는 것도 버겁다.
한 IT노동자가 부당해고를 다투기 위해 약 3년 동안 법정공방을 벌인 후 패소했다. 대형로펌 변호사로 소송대리인단을 꾸린 기업은 변호사비용을 물어내라고 소송비용액확정신청서와 함께 내밀었던 소송비용청구서에는 그들이 재판을 위해 쏟아 부은 변호사선임료가 적혀 있었다.
1심 80,230,400원, 2심 76,249,800원, 3심 30,000,000원 합계 186,480,200원(약 1억 8648만 원).
기업이 돈을 쏟아 부어 호화 변호인단을 꾸리는 것이 허용되는 등 재판에서 무기대등의 원칙이 적용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재판이 공정하기 위해서는 힘 없는 자가 하루 빨리 송사에서 벗어나 일상이 회복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래서 신속한 재판받을 권리는 헌법에도 규정하고 있는 국민의 기본권이다.
헌법 제27조 제3항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
민사소송법 제199조(종국판결 선고기간)
판결은 소가 제기된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다만, 항소심 및 상고심에서는 기록을 받은 날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
민사소송법 제207조(선고기일) 제1항
판결은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2주 이내에 선고하여야 하며, 복잡한 사건이나 그 밖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아니 된다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6장 형사소송에 관한 특례, 제21조(판결 선고기간)
판결의 선고는 제1심에서는 공소가 제기된 날부터 6개월 이내에, 항소심(抗訴審) 및 상고심(上告審)에서는 기록을 송부받은 날부터 4개월 이내에 하여야 한다.
헌법에 규정된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 민사소송법 등 관련 법에 여러 규정들을 두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규정들은 법전에만 있을 뿐 현실에서는 사라진지 오래다. 소송당사자는 재판을 지연시키는 재판부에 지연 경고를 할 수 있고, 과도한 재판지연으로 불이익을 받은 경우 보상이라도 받으면 좋으련만, 우리나라에는 독일의 재판지연보상법(법원조직법 198조, § 198 GVG) 같은 규정은 전무하다. 그러다 보니 당사자들은 재판지연에 속수무책이다. (
[오마이뉴스 시리즈] 헌법 27조 3항이 사라졌다 https://omn.kr/213nu )
한 해고노동자는 2020년 9월 16일 해고무효를 확인해 달라며 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법은 소가 제기된 날로부터 5월 이내에 선고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첫 번째 변론기일은 소장을 제출한지 딱 1년째 되는 날인 2021년 9월 16일로 잡혔다. 그렇게 7번의 변론기일이 진행된 후 재판은 지난 5월 25일로 마쳤다.
지난한 과정이었지만 그래도 빨리 1심 선고가 나서 회사로 복직할 수 있다는 희망도 잠시, 재판부는 선고기일을 약 6개월 뒤인 11월 9일로 지정했다.
법은 복잡한 사건이나 그 밖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에도 변론이 종결된 날부터 4주를 넘겨서는 아니된다고 규정되어 있지만, 6개월 뒤로 선고기일이 지정되었다는 소식에 해고노동자는 또 한 번 좌절하고 말았다.
바야흐로 법치의 세상이다. 검찰총장 출신 대통령은 2023년 신년사부터 노동개혁의 출발점으로 '노사법치주의'를 들고나왔고, 검사장 출신 법무부장관도 신년사를 통해 '반(反)법치 행위 엄단'을 중점 추진과제로 제시했다. 최근 이 법치가 노동자들의 집회시위를 겨누고 있다.
민노총이 또 다시 노숙투쟁을 이어가는 것은 오히려 법치를 조롱하는 것
민노총의 불법집회와 시위에 대해 엄정대처하는 것은 시민의 자유를 지키기 위한 정부의 기본적 책무
집회와 시위의 자유로 다른 시민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
최근 대통령실에서 노동자들의 집회, 시위에 대해 내뱉은 말이다. 이 말이 내뱉어진 이후 경찰은 평화롭게 진행되는 문화제 등에도 강제해산을 일삼고 있다.
타인의 법익이나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험이 명백하게 초래되지 않을 경우 경찰의 해산명령이 적법하지 않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립된 판결이다(대법원 2021. 11. 11. 선고 2018다288631 판결 등 다수). 그러나 대법원 판결을 조롱이라도 하듯 경찰의 해산명령, 강제연행이 어제(9일) 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앞에서 진행되었다(관련 기사:
경찰, 비정규직 농성 또 강제해산... "차라리 우릴 죽여라" https://omn.kr/24ant ).
민사소송법에 '5개월 이내에 선고해야 한다'는 법을 지키지 않고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는 대법원, 법을 지키지 않은 재판지연을 토로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법원이 법을 지키라고 절규하고 있는 노동자들. 법을 지키지 않은 대법원이 아닌 노동자들을 대법원 판례에 어긋하는 해산명령을 날리고 노동자들을 마구잡이로 연행하는 경찰들.
'국왕이라 할지라도 법 밑에 있다'라고 주장하며 영국에서 처음 시민들이 들고나온 법치주의, 시민들이 부당한 공권력을 향해 외쳐야 하는 법치주의가 오히려 공권력의 무기가 되어 시민들을 겨누고 있는 현실, 노동자들의 집회시위를 겨누는 법치주의가 법을 지키지 않는 법원과 경찰에게는 철저히 무력한 현실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그 아파트 광고문구를 떠올리게 된다.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이 광고문구는 틀렸다.
우리가 꿈꾸든, 꿈을 꾸지 않든, '평등하지 않은 세상'은 바로 우리 코 앞에 이미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