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 숙명여자대학교 명신관 416호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함께하는 숙명여자대학교 간담회'가 열렸다. 간담회는 숙명여대 이태원 참사 유가족 간담회 기획단, 평화나비 네트워크 숙대지부 숙명눈꽃나비가 주최하고, 10.29 이태원 참사 유가족협의회, 10·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 국회의원 용혜인이 주관했다.
이날 간담회에는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최유진씨의 아버지이신 최정주씨, 고 이상은씨의 어머니이신 강선이씨가 패널로 참석했다. 이 글을 통해 간담회를 준비하며, 그리고 진행하며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을 전하고자 한다.
희망을 보다
처음 간담회 홍보를 준비하기 시작했을 때는 두려움이 앞섰다. 에브리타임에 홍보 글을 게시하고, 대자보를 써 붙이고, 유인물을 나누어주는 과정에서 어쩌면 크고 작은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서 흔히 접하는 혐오 발언들을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겁을 먹기도 했다. 그러나 날짜와 주최 단체가 확정된 다음부터는 대부분의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유인물을 자연스럽게 받아 주었고, 홍보 부스에 관심 있게 다가와 연대 메시지를 남겨 주기도 했다.
학교 곳곳에 붙여 두었던 대자보는 훼손 없이 행사 당일까지 보존되었다(오늘날 많은 대학에서 대자보 훼손은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학교를 찾아주실 유가족 중 남성 분이 있어 건물 내 출입에 대해 양해를 구하는 에브리타임 게시글은 '좋아요'가 60개를 넘기기도 했다.
직접 뛰는 홍보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교수님들께 간담회 소식을 학생들에게 알려달라고 부탁드리기 위한 이메일을 보냈을 때는 따뜻한 격려가 돌아왔다. '유가족들에게 숙명인들의 따스한 마음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수고에 감사하며, 잘 진행되길 기원합니다'라는 답변을 주신 분도, '내일 참석하려고 합니다. 자리 마련해주어 고맙습니다'라는 답장을 보내주신 분도 있었다.
학생이나 교원이 아닌 다른 분들의 응원도 있었다. 여대의 경우 외부인 출입에 대하여 민감할 수밖에 없기에 외부인 출입에 대한 양해를 구하기 위해 경비실에 찾아갔을 때였다. 경비원 분들에게 간담회의 취지와 내용을 바쁘게 설명하면서도 속으로는 처음으로 속상한 일을 겪을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부당하게도 유가족의 학교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는 타 대학들의 사례를 익히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말씀을 듣고 그것이 기우였음을 깨달았다. 이후 추가적인 의사소통이 필요해 몇 차례 더 찾아뵈었을 때에도 경비원 분들은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주셨으며, 평소와 다름없이 협조해주셨다.
인터넷에서, 그리고 현실에서 이해하기 힘든 발언과 행동을 많이 목격했다. 참사를 일차원적으로 폄훼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올바르게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시도조차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걱정과 경계는 어쩌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간담회를 실제로 준비하며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조심스러운 태도로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이해하고자 했다. 우리는 앞으로 4년간 몸을 담고 살아가야 할 '숙명'이라는 공동체의 희망을 보았다. 존재했어야만 하는 순간에 국가는 어디에 있었는지, 그리고 지금은 어째서 폭력의 형태로 정당한 목소리들을 탄압하는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함께 묻고 싸울 수 있는 공간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놀러 가서 죽었기에' 국가 탓이다
간담회 당일, 명신관 416호의 의자가 하나둘씩 채워지더니 어느덧 꽉 찼다. 유가족 패널들도, 청중들도 그 자리에서 무엇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조심스럽게 서로를 눈에 담고 있었다. 첫 질문은 이태원 참사 이후 피해자들이 겪었던 일을 묻는 내용이었다. 하나뿐인 딸들을 하늘로 보내야 했던 두 유가족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주었다.
강선이씨는 "이태원 참사가 명백한 국가의 실책이라는 것만큼은 모두가 공감할 줄 알았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집 안에 갇혀 두려움에 떨지 않고 바깥에서 자연스럽게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일상적인 장소에서 일상적인 일을 하다 죽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년 10월, 그 믿음은 무참히 깨어졌고 어떤 사람들은 비난의 화살을 피해자에게 돌렸다. 최정주씨는 '놀러 가서 죽은 건데 그게 왜 국가 탓이냐'라는 2차 가해성 발언이 얼마나 유가족들을 괴롭혔는지 토로했다. 한 친구는 간담회가 끝나고도 놀러 가서 죽으면 안 되는 것이 당연하다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가가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쏟아지는 폭력적인 상황을 방관하고, 오히려 주도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최정주씨는 경황이 없던 참사 직후에 빨리 지원금과 장례비를 받아가라며 울려대던 휴대폰을 떠올리며 "국가가 책임을 법리적인 것에 한정시켜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희생자들이 구체화되는 과정, 국민들이 희생자들과 일체화되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 애도 기간을 설정해 참사를 닫으려 시도했다"는 그의 설명과, "진상 규명이 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정부가 정말로 진상에 대해 모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는 강선이씨의 말이 겹쳐 들렸다. 희생자를 애도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특별법 제정에 힘쓰는 대신 정치적 공방에만 집중해 책임을 회피하기 급급한 정부에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바삐 어딘가로 향하던 대구의 지하철 안에서,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떠나던 선박 안에서 그랬듯이, '놀러 가서 죽었는데 그게 왜 국가 탓'인 것이 아니라 '놀러 가서 죽었기에' 국가 탓이다. 최정주씨는 시청 앞 분향소로 이전해오기 전 녹사평역 부근에 설치되었던 시민분향소 옆에서 들려오는 신자유연대의 혐오 발언을 녹음한 영상을 보여주셨다. 너무 힘들어 다 지우는 바람에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씁쓸한 미소와 함께. 유가족들은 참사 200여 일이 지난 오늘까지도, 국가의 부재로 온전히 애도하지 못하고 진상 규명과 희생자의 명예 회복을 위해 싸우고 있다.
'별가족'들의 또 다른 집, 시민분향소
강선이씨는 분향소가 유가족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느냐는 질문에 "분향소는 유가족들의 또 다른 집"이라 표현했다. 영정사진 뒤에 아이들이 사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도 함께였다. 강선이씨에게 분향소는 딸을 재회하는 장소이자, 별이 된 아이들이 맺어준 새로운 가족들인 '별가족', 즉 다른 유가족들을 만나는 장소였다. 강선이씨는 별가족들과 함께 아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위로받고, 희생자들이 잊히지 않도록 기억할 수 있는 분향소가 소중하다고 했다.
최정주씨는 참사 유가족과 주변인들이 '유가족'이라는 단어에 갇히게 되는 경험을 나눠주었다.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과도 예전처럼 즐겁게 이야기를 주고받기 어렵고, 그러다 보니 만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최정주씨에게 분향소는 눈치 보지 않고 웃을 수 있고, 눈치 보지 않고 아이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장소였다.
"안전을 원하거든 참사를 기억하라"
이 글의 초고를 작성하는 5월 30일은 세월호 참사로부터는 약 9년, 이태원 참사로부터는 215일이 지난 날이다. 국민들은 4월 16일에 국가는 어디에 있었느냐고 물으며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들었다. 그러면서 참사가 다시는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8년이 지난 해의 10월 29일, 국가는 다시 있어야만 했던 순간에 부재했다. 간담회에 참석했던 학생들은 2014년 당시 대부분 초등학생에서 중학생으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기에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유가족들의 목소리를 듣는 지금은 대학생이 되었고, 책임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가장 답변을 듣고 싶었던 질문은 마지막에 나왔다. '참사를 보고 들은, 기억하고자 하는 청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무엇인가요?' 강선이씨는 당신께서 이미 나이가 많기에 다음 세대가 이어서 진상 규명을 위해 힘써주었으면 좋겠어서 대학 간담회에 왔다고 답변했다. 또래가 기억해야만 참사가 더 오래 기억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최정주씨는 모두 자신이 지닌 생각의 가지를 주변에 뻗을 수 있는 청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마지막 질의응답 시간에는 정부 여당과 언론이 참사에 씌워놓은 프레임을 타파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최정주씨는 마이크를 잡고, 보고 듣고 느끼는 대로 행동하라고 당부했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으므로 한 명에게라도 진실을 더 알려달라고, 분향소에 한 번이라도 더 와서 희생자들을 만나 달라고, 무엇보다 '놀러 가서 그렇게 된 거잖아'라는 말에 단호하게 틀렸다고 말해달라고.
간담회를 통해 주변에 있는 사람이 잘못된 말을 했을 때 논쟁을 피하지 않고 바로잡는 것, 그리고 오래 분노하고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되새겼다.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려고 시도한다면 분명히 연대의 감각을 느낄 수 있다는 깨달음도 함께였다. 이태원 참사 200일 추모 촛불 문화제에서 울렸던 "안전을 원하거든 참사를 기억하라"는 구호의 의미를 되새긴다.